해설:
사도는 “하나님을 본 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절)라고 권면한다. 바로 앞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4:32)라고 했다. 2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어 주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사랑으로 살아가십시오”라고 권한다. 앞뒤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을 본 받는다는 말은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본 받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만 가능하다.
이어서 사도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행위”와 “탐욕”을 입에 올리지도 말라고 권한다(3절). “성도”라는 이름을 받았으니,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 “더러운 말”(4절)은 “추한 행동”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어리석은 말”은 음담패설 같은 속된 말을 가리키고, “상스러운 농담”은 희롱성의 우스갯 소리를 가리킨다. 그 대신에 성도에 합당한 말은 “감사에 찬 말”이다.
사도는 “음행하는 자”와 “행실이 더러운 자”와 “탐욕을 부리는 자”는 “우상 숭배자”와 다름이 없다고 규정한다(5절).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무엇을 두고 섬기는 사람은 누구나 우상 숭배자다. “음행하는 자”는 성적 쾌락을, “행실이 더러운 자”는 자아를, “탐욕을 부리는 자”는 욕망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고 사는 사람이다. 사도는, 그런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몫이 없다”고 단언한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등지고 살았으니, 죽은 후에 그 결별이 영구화 된다.
묵상:
바울은 “합당함의 윤리”를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상 받기 위함도 아니고 징벌을 피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윤리학 용어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목적론적 윤리”(그렇게 해야 모두가 행복하기에 그렇게 한다)가 아니라 “존재론적 윤리”(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문화에서든 “사람다운 언행”에 대한 기준이 있습니다. 사람 됨에 대한 공유된 기대가 있고, 그 기대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 지어진 사람들이기에 자연인과는 다른 차원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부르심에 합당하게”(4:1), “자녀답게”(5:1) 그리고 ”성도에게 합당하게“(5:3) 말하고 행동하라고 권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5:1)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와 유대고의 윤리가 갈라지는 지점입니다.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 배워 알았던 유대교의 윤리는 하나님의 높은 기준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원래 율법은 제사장의 나라로 선택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합격 받기 위해 노력하라는 뜻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선택된 사람들 답게 살아가라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 시대에 유대교는 그것을 구원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율법을 행하여 높은 의의 기준에 도달해야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회심한 후에 사도는 유대교에서 본말을 뒤집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 새로운 존재가 되었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새로운 존재로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신분을 기억하고,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것은 억지로 행하는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행하는 응답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얻자는 노력이 아니라 이미 주신 은혜에 대해 보답하자는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의를 이루었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주장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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