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5장 1-5절: 합당함의 윤리

해설:

사도는 “하나님을 본 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절)라고 권면한다. 바로 앞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4:32)라고 했다. 2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어 주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사랑으로 살아가십시오”라고 권한다. 앞뒤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을 본 받는다는 말은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본 받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만 가능하다.

이어서 사도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행위”와 “탐욕”을 입에 올리지도 말라고 권한다(3절). “성도”라는 이름을 받았으니,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 “더러운 말”(4절)은 “추한 행동”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어리석은 말”은 음담패설 같은 속된 말을 가리키고, “상스러운 농담”은 희롱성의 우스갯 소리를 가리킨다. 그 대신에 성도에 합당한 말은 “감사에 찬 말”이다. 

사도는 “음행하는 자”와 “행실이 더러운 자”와 “탐욕을 부리는 자”는 “우상 숭배자”와 다름이 없다고 규정한다(5절).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무엇을 두고 섬기는 사람은 누구나 우상 숭배자다. “음행하는 자”는 성적 쾌락을, “행실이 더러운 자”는 자아를, “탐욕을 부리는 자”는 욕망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고 사는 사람이다. 사도는, 그런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몫이 없다”고 단언한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등지고 살았으니, 죽은 후에 그 결별이 영구화 된다.

묵상:

바울은 “합당함의 윤리”를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상 받기 위함도 아니고 징벌을 피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윤리학 용어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목적론적 윤리”(그렇게 해야 모두가 행복하기에 그렇게 한다)가 아니라 “존재론적 윤리”(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문화에서든 “사람다운 언행”에 대한 기준이 있습니다. 사람 됨에 대한 공유된 기대가 있고, 그 기대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 지어진 사람들이기에 자연인과는 다른 차원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부르심에 합당하게”(4:1), “자녀답게”(5:1) 그리고 ”성도에게 합당하게“(5:3) 말하고 행동하라고 권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5:1)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와 유대고의 윤리가 갈라지는 지점입니다.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 배워 알았던 유대교의 윤리는 하나님의 높은 기준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원래 율법은 제사장의 나라로 선택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합격 받기 위해 노력하라는 뜻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선택된 사람들 답게 살아가라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 시대에 유대교는 그것을 구원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율법을 행하여 높은 의의 기준에 도달해야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회심한 후에 사도는 유대교에서 본말을 뒤집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 새로운 존재가 되었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새로운 존재로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신분을 기억하고,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것은 억지로 행하는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행하는 응답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얻자는 노력이 아니라 이미 주신 은혜에 대해 보답하자는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의를 이루었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주장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Comments

4 responses to “에베소서 5장 1-5절: 합당함의 윤리”

  1. 십자가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하며 모든 생각과 언어와 행함과 삶이 주님께드리는 거룩한 산제물이 되어야 하는데 자주 세상의 가치관에 흔드리는 연약한 모습입니다.주님과 저사이에 세속적인 죄가 드려올려고 몸부림을 치고있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부활의 증인으로서 모든 행함과 삶이 예수님의 향기가되어 이웃에게 나아가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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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chi049 Avatar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을 십자가 값으로 지불하시고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 자녀됨의 은총을 허락하심을 통하여 영생의 길로 인도하여 주신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우상에 이끌려 하나님 아버지 자녀임을 잃어 버릴때가 있습니다. 주님! 아직도 연약합니다. 성령님께서 동행하여 주셔서 순간순간 마다 공격하는 사탄을 말씀으로 막아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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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Chris Yoo Avatar
    Chris Yoo

    하나님에 사랑을 알기에 그 은혜를 알기에 우리에 삶이 매사 감사 하며 성도에 합당한 말과 행동을 하게 됨을 늘 기억하게 됩니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것이 아니요,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이 됐으니 하나님에 자녀로 마땅히 매사 의롭고 선하게 살기를 힘씀니다.

    연약해서 늘 넘어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과 사랑을 늘 품고 매일 매일이 새롭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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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청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이니 하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라 (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남을 사랑하며 살라고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놓으시어 하나님 앞에 향기나는 희생 제물이 되었다 (2절)고 말합니다. 메세지 성경의 번역은 현대적인 감각을 잘 전하고 있습니다. “His (Christ’s) love was not cautious but extravagant. He didn’t love in order to get something from us but to give everything of himself to us. Love like that.” 그리스도의 사랑은 조심스럽지 않고 사치스러웠습니다. 우리에게서 뭔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모든 것을 주려고 사랑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십시오. 바울은 연이어 몇 가지 ‘하지 말라’ 명령을 합니다. 그가 경고하는 행동들의 공통점은 자기 위주,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행동이라는 점입니다. 자기를 만족 시키는 데 골몰하는 것은 지극히 유아적인 일이며 그 상태가 계속되면 우상 숭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메세지 성경은 우리가 사람들, 종교, 혹은 다른 것들을 이용해 자기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게 우상 숭배이며,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윤리와 도덕을 말하면서 시대라는 배경을 걷어내고 말할 수 없습니다. 윤리나 도덕이 시대마다 달라진다면 그건 참 멀미나게 어지러운 일이겠지만, 반대로, 시대가 어떻든 윤리와 도덕의 잣대는 하나여야 한다고 하는 것도 무섭고 숨막히는 일입니다. 율법에 대해서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만,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 율법인지 그리스도인지 생각해 보면 답은 금방 나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가득 하면 ‘어떤 종류의 악이나 탐욕’도 틈타지 못할 것입니다. 설령 유혹의 순간이 온다 해도 이겨낼 힘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한 가지 개인적인 주석을 달고 싶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오락물 중에 스탠드업 코미디 stand-up comedy가 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고를 때는 코믹물 취향이 아닌데 스탠드업 코미디만큼은 무척 즐깁니다. 아마 코미디언 -영어로는 카믹 comic-의 개성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라이브 오디언스 앞에서 하는 ‘연기’인 만큼 엔터네이너로 갖춰야 할 능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나도 어떤 계기에 보게 되었는데 처음 봤을 때는 충격이 컸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경계하는 더러운 말, 저속한 농담, 음담패설…등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안 나오는 경우는 없기 때문입니다. ‘언어’를 사용하는 직업이니 언어의 무게를 잘 다룰 줄 알아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속되고 상스러운 욕만 나열한다고 코미디가 되지는 않습니다. 스탠드업 코미디의 성공여부는 앞보다 뒤, 겉보다 속, 큰 것보다 작은 것, 많은 것보다 적은 것을 얼마만큼 잘 보여주느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탠드업 코미디는 태생적으로 자기 비하와 자기 경시의 기술입니다. 권력에 맞설 수 없는 약자들의 분출구입니다. 해마다 4월 말경에 백악관 출입기자 협회 만찬 White House Correspondents’ Association Dinner 가 있습니다. 그날 프로그램에 카믹이 나와 대통령과 백악관 참모, 정부 요인 등을 ‘안주’ 삼아 조크를 합니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대통령을 ‘까거나’ 흉을 봅니다. 미국에서만 가능한 일인지, 다른 나라에서도 하는 지는 모릅니다만 그 시간을 견뎌내는 대통령의 모습도 나중에 회자됩니다. 이쯤되면 바울의 경고가 먹히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무색하고 무용한 지경이라고 할 만 합니다. 바울이 스탠드업 코미디를 본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생각해 봅니다. 불같이 화를 냈을까요. 귀를 씻고 동네를 몇 바퀴 걸었을까요. 혹은, 언어를 무기 삼아 시대와 사회의 부조리를 부수는 카믹들에게 격려의 편지를 쓸까요. 우리 시대에 만연한 허위, 위선, 맹목성, 자기애, 이기심, 공명심, 탐욕…이런 ‘비극’이 희극의 포장지에 싸여 우리 앞에 배달됩니다. 우상 숭배의 덫을 잘 피하며 살게 하소서. 자기 기만의 마취에서 깨어나게 하소서.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기에 나도 남을 돕고 권면하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도덕과 윤리에 예민하다면 연민과 자비에 있어서도 예민한지 스스로에게 묻는 아침입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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