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앞에서 갈라디아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 답답한 심경을 밝힌 사도는 성경으로부터 한 가지 예를 취하여 설명을 이어간다. 사도는 그들을 “율법 아래에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21절)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내려 온 유대주의자들에게 설득되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사도는, 그들이 율법 아래에 있기를 바라니 율법이 하는 말을 들어 보라고 요청한다.
사도는 하갈과 사라, 이스마엘과 이삭의 이야기를 비유로 사용한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 중 하나는 여종에게서 났고 다른 하나는 자유인에게서 났다(22절).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육신을 따라” 즉 자연법칙에 따라 태어났다. 반면 자유인에게서 난 아들은 “약속을 따라 태어났다”(23절). 자연법칙으로는 불가능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태어났다는 뜻이다.
사도는 두 여자를 두 언약에 비유한다(24절). 하갈은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가리킨다. 하갈이 종이었듯이 율법은 우리를 종으로 만든다. 지금의 예루살렘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을 신봉하고 있는데, 실은 그것에 종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25절). 반면 사라는 아브라함을 통해 맺은 언약을 가리킨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26절)에 속한 사람들이다.
여기서(27절) 바울은 이사야서 54장 1절을 인용한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예언하신다.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구원해 주실 것이다. 패망한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은 불임의 사라에게 아기가 들어서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한 것을 이루어 주셨다. 그것처럼 이사야를 통해 주신 약속도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이루셨고, 그 믿음으로 갈라디아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
복음을 받아들인 갈라디아 사람들은 “약속의 자녀들”(28절)이다. 모든 민족을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해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육신을 따라 난 사람”(29절) 즉 율법에 속한 사람들(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주의자들)이 그들을 “박해”하고 있다. 사도는 그것이,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렸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라고 말한다(창 21:9). 그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요청대로 여종과 그 아들을 쫓아내라고 하셨다(창 21:10). 이렇게 말함으로써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주의자들을 멀리하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여기서 사도는 “여러분”이라는 대명사를 버리고 “우리”(31절)라는 대명사를 사용한다. 자신과 갈라디아 교인들을 동일화 시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인의 자녀다. 율법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해 주심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따라서 다시 율법의 종살이로 돌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5:1).
묵상:
율법을 지키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반응을 읽다 보면 “이것이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그리 해로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율법 안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더 기뻐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관한 한 바울 사도는 털끝만큼의 타협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율법 아래에서 신음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율법에 대한 이해력과 율법에 철저하게 순종하려는 열심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뒤질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것에 전 인생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 열심과 노력과 헌신은 그를 좌절시킬 뿐이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해 영적 자유를 얻기 위해 분투했는데, 분투할수록 그는 더욱 더 영적으로 결박되었고, 더 깊은 영적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 죄로 인해 자신이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만남으로 인해 그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그분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 그분을 믿으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그분께 자신을 맡겼을 때 그는 평생토록 추구해 왔던 영적 해방감을 맛보았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짓누르던 저주로부터 해방되고 죄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시고 자녀로 회복시켜 주셨음을 알았습니다. 과거에는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율법을 연구하고 실천했습니다. 주인의 눈에 들려고 애쓰는 종의 심정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랑받는 자녀가 되어 아버지의 뜻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유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하게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사랑 안에서의 자유”를 버리고 “사랑 밖에서의 방탕”을 택했습니다. 그로 인해 인간은 죄의 힘에 사로잡혔고, 악한 영의 힘에 예속되었으며, 저주 아래에 있게 되었습니다. “노예됨”이 인간의 실존 상태가 된 이유입니다. 이 상태로부터 우리가 해방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만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만든 비참한 운명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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