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4장 21-5장 1절: 자유하게 하시는 분

해설:

앞에서 갈라디아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 답답한 심경을 밝힌 사도는 성경으로부터 한 가지 예를 취하여 설명을 이어간다. 사도는 그들을 “율법 아래에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21절)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내려 온 유대주의자들에게 설득되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사도는, 그들이 율법 아래에 있기를 바라니 율법이 하는 말을 들어 보라고 요청한다. 

사도는 하갈과 사라, 이스마엘과 이삭의 이야기를 비유로 사용한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 중 하나는 여종에게서 났고 다른 하나는 자유인에게서 났다(22절).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육신을 따라” 즉 자연법칙에 따라 태어났다. 반면 자유인에게서 난 아들은 “약속을 따라 태어났다”(23절). 자연법칙으로는 불가능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태어났다는 뜻이다.

사도는 두 여자를 두 언약에 비유한다(24절). 하갈은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가리킨다. 하갈이 종이었듯이 율법은 우리를 종으로 만든다. 지금의 예루살렘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을 신봉하고 있는데, 실은 그것에 종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25절). 반면 사라는 아브라함을 통해 맺은 언약을 가리킨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26절)에 속한 사람들이다. 

여기서(27절) 바울은 이사야서 54장 1절을 인용한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예언하신다.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구원해 주실 것이다. 패망한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은 불임의 사라에게 아기가 들어서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한 것을 이루어 주셨다. 그것처럼 이사야를 통해 주신 약속도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이루셨고, 그 믿음으로 갈라디아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

복음을 받아들인 갈라디아 사람들은 “약속의 자녀들”(28절)이다. 모든 민족을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해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육신을 따라 난 사람”(29절) 즉 율법에 속한 사람들(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주의자들)이 그들을 “박해”하고 있다. 사도는 그것이,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렸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라고 말한다(창 21:9). 그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요청대로 여종과 그 아들을 쫓아내라고 하셨다(창 21:10). 이렇게 말함으로써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주의자들을 멀리하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여기서 사도는 “여러분”이라는 대명사를 버리고 “우리”(31절)라는 대명사를 사용한다. 자신과 갈라디아 교인들을 동일화 시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인의 자녀다. 율법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해 주심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따라서 다시 율법의 종살이로 돌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5:1). 

묵상:

율법을 지키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반응을 읽다 보면 “이것이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그리 해로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율법 안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더 기뻐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관한 한 바울 사도는 털끝만큼의 타협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율법 아래에서 신음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율법에 대한 이해력과 율법에 철저하게 순종하려는 열심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뒤질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것에 전 인생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 열심과 노력과 헌신은 그를 좌절시킬 뿐이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해 영적 자유를 얻기 위해 분투했는데, 분투할수록 그는 더욱 더 영적으로 결박되었고, 더 깊은 영적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 죄로 인해 자신이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만남으로 인해 그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그분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 그분을 믿으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그분께 자신을 맡겼을 때 그는 평생토록 추구해 왔던 영적 해방감을 맛보았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짓누르던 저주로부터 해방되고 죄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시고 자녀로 회복시켜 주셨음을 알았습니다. 과거에는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율법을 연구하고 실천했습니다. 주인의 눈에 들려고 애쓰는 종의 심정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랑받는 자녀가 되어 아버지의 뜻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유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하게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사랑 안에서의 자유”를 버리고 “사랑 밖에서의 방탕”을 택했습니다. 그로 인해 인간은 죄의 힘에 사로잡혔고, 악한 영의 힘에 예속되었으며, 저주 아래에 있게 되었습니다. “노예됨”이 인간의 실존 상태가 된 이유입니다. 이 상태로부터 우리가 해방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만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만든 비참한 운명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Comments

4 responses to “갈라디아서 4장 21-5장 1절: 자유하게 하시는 분”

  1. 십자가의 은혜를 믿고 동시에 율법을 지키는것이 더 거룩한것 처럼 보이나 불가능인것을 바울도 깨달았고 루터도 깨달았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율법을 도저히 지키지 못하는 가련한 존재를 사랑으로 받이주시는 그엄청나고 놀라운 은혜에 영광을 드립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주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시오. 이 엄청난 기쁜소식을 온세상이 알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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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chi049 Avatar
    gachi049

    율법은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너무 듣지 않아 임시방편으로 만들어 놓은 법으로써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법인 동시에 이것으로 인해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도구가 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삼으시고 그를 믿는 자에게는 죽음에서 영생의 길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곧 사랑이십니다. 우리 믿음의 공동체도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하는 여정이 되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인도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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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율법의 수호자요 실행자였던 바울이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깊은 안식과 자유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묶음으로써 죄를 짓지 않도록 할 수는 있지만 죄에서 자유한 사람으로 변화 시키는 능력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자유를 줍니다. 죄에 붙들려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을 풀어주는 힘은 주님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어제는 예배를 드리고 가게에서
    일을 하는데 문득 “안식일은 저항이다”는 책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월터 부르그먼 교수가 쓴 책인데 제목 만 알 뿐, 읽은 책은
    아닙니다. 안식일을 ‘저항’으로 보는 시각 속에는 깊은 뜻이 들어있을 것 같고, 얼마 전에 묵상했던 창세기의 창조 부분에 “일곱째 되는
    날에 하나님께서 일을 마치시고 쉬셨습니다 (창 2:2)”라는 구절도 같이 기억이 났습니다. 단순하게는 ‘주일에도 일을 하는 처지’가
    내심 한심스럽고 불만스러워서 떠오른 생각일 수 있겠지만 안식일, 안식, 쉼, 다름, 저항, 용기…이런 데로 생각이 펼쳐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주일성수’는 율법적인 사고가 지은 집의 한 예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행동이 판단의 조건이라면
    말과 행동을 보고 옳다/그르다 혹은 합격/불합격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주일에 시간 맞춰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고 예배 마친 뒤에
    교제를 하고, 적당한 시간에 교회에서 나오면 교회 사람들이 보는 바로는 주일성수를 한겁니다. 이게 안식일을 거룩히 지낸 것인지
    외연으로는 그래 보이지만 내면도 일치하는지는 주님께 여쭤봐야 알 일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신학자들의 연구와 묵상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죠슈아 헤셸 같은 유대교 랍비의 안식일 묵상은 종교의 차이를 넘어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가
    장소가 아니라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코로나 때 교회에서 드리지 않는 예배, 온라인으로 하는 예배도 예배냐 아니냐를 놓고 많은 말들이
    오고 갔던 것을 기억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장소와 연결하면 성전 -본문에 나오는 시내산/예루살렘- 중심의 예배 만 예배라고
    주장하게 되지만, “시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영”이신 주님께 “자유를 위해 떼어놓은 한 날”에 드리는 예배에 대해 묵상하면 안식과 쉼은
    시간의 영역이 됩니다. 제물로 올리는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예배가 ‘주일성수’의 본뜻이라는 거지요. 주님과 교제하는 날,
    그분 앞에서 쉬는 날, 안식일은 그러므로 세상에 대해 -스스로 하나님인 척 하는 세상의 모든 세력에 대해- 저항하는 날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철학과 시스템에 저항하는 날 즉 성과를 내야 하는 ‘피로사회’의 쳇바퀴를 굴리지 않는 날입니다. 나를 지으신 분,
    아시는 분, 사랑하시는 분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분을 내가 알고 사랑하기 때문에 충분하다는 만족감이 있는 날, 세상이 필요 없어지는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입니다. 율법으로는 이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혹시 율법은 경주마가 앞만 보고 달리도록
    씌우는 블라인더의 기능인지도 모릅니다. 율법에 목적이 있고 가치가 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눈을 가리지 않아도
    그리스도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억압에서 놓아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자유가 방종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분별하며
    마음을 잘 지키도록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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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kkim2 Avatar

    자유하게 만들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100% 자유할 수 없었던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율법을 떠나,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이, 제 삶의 기본이 될 수 있도록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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