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편: 시편으로 기도하기

해설:

앞에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간구했던 다윗은 이제 눈을 돌려 불신의 세상을 묘사한다. “어리석은”(1절)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발’은 지능이 낮거나 지식이 부족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판단과 고집대로 살아가는 완고한 상태를 말한다. 반면 “지혜로운 사람”(2절)은 열린 마음으로 진실을 구하는 사람이다. 어리석음의 절정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고,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부정은 죄악으로 흐르고, 그분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바르고 의로운 길로 향한다. 

불행하게도,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신의 판단과 고집을 따라 살기를 선택한다(3절). 그들은 죄악을 일삼으면서도 하나님 두려운 줄을 모른다(4절).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의인의 편이라는 사실을 마침내 알게 될 것이다(5절). 그들이 괴롭힌 가난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6절).  

7절은 전승 과정에서 후대에 첨가되었을 것이다. 바빌로니아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은 다윗의 기도를 자신들의 상황에 적용했던 것이다. “하나님, 시온에서 나오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십시오”(7절)라는 기도에서 “시온”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거하신다고 믿었다. 바빌로니아에서 포로로 살고 있는 그들에게 잡혀온 시온은 너무 멀었다. 바빌론에서 시온까지의 거리는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거리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다윗이 드린 기도를 읽으면서 속히 구원해 달라고 간구한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그들은 장차 조국으로 돌아갈 날을 상상한다. 그 상상만으로도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들어찼다. 진실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 11:1)이다. 

묵상:

우리가 매일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시편을 읽고 묵상하는 이유도 그 기도를 지금 나의 상황에서 드리는 기도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 14편은 바빌로니아에서 포로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시편을 그들의 상황에 적용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1절부터 6절까지는 그들에게 전해진 다윗의 시편입니다. 유대인 포로들은 이 시편을 읽고 나서 그들의 상황에 적용하여 기도 올립니다. 그들은 지금 행악자들에게 압제 당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주님께서 행악자들에게서 자신을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전합니다. 다윗의 확신이 옳다면, 하나님께서 유대인 포로들을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 주실 것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의 시편 마지막에 자신들의 기도를 첨가해 넣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다윗이 전해 준 확신 그리고 유대인 포로들이 붙들었던 그 확신을 붙들어야 합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불신을 선택하고 죄악으로 기울어져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롭게 살기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 선택으로 인해 악한 이들에게 무시 당하거나 조롱 당할 수 있습니다. 손해를 볼 수도 있고 박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죄악에 손을 담그고 싶은 유혹도 받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의인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확신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편이 보존되어 우리에게 전했졌다는 사실은 다윗의 확신도, 포로로 살던 유대인들의 확신도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Comments

2 responses to “시편 14편: 시편으로 기도하기”

  1. 인류의 문명과 지식이 발달하는 동시에 창조주 사랑의 하나님을 점점더 부정하는 추세입니다. 세상의 과학이 답이 아니고 더큰 문제입니다. 인간들의 어리석움이 점점 심해저가는 세대에 살고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되신 그리스도를 매일 아침 듣는시간을 허락하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귀로 듣지만 말고 말씀을 읊조리며 손과 발로 실천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옮기는 성막(교회)와 고난에 시달리는 모국을 위해 기도하는 아침입니다만 마음속 깊이 신실하신 주님의 계획과 뜻이 교회와 모국을 통해 이루어 지는 믿음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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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제주 항공 참사로 인해 슬픔을 당한 유가족과 그들과 함께 슬퍼하는 우리의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침입니다. 개인의 비극이 사회의 아픔으로 직결되는 대형사고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작고 미미하며 힘 없는 존재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애도하고 기도하는 일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 무력감 속에 가라 앉아도 유가족이나 사고 관계자가 아닌 사람들은 한 두 주간이 지나면 일상의 리듬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나쁜 소식의 충격은 시간과 함께 옅어지고 다른 일, 다른 사건들이 파도처럼 우리 일상의 해안에 밀려 올 것입니다. 다윗의 기도시를 들으며 울었던 바빌론의 포로들도 지금 우리의 마음과 같았을 겁니다. 주님께서 바로 잡아 주실 것을 믿고 소망했던 다윗의 기도가 타국에서 부자유한 삶을 이어가는 자신들의 기도가 되며,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의로움을 펼치실 날이 곧 오리라 믿었을 겁니다. 우리도 오늘 그들의 기도를 이어갑니다. 지혜로운 사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시는 (2절) 하나님의 눈과 마주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우리의 행실도 지혜롭기를, 우리의 기도도 정직하기를 구하고 또 구합니다. 내가 읽는 성경책에는 14편의 소제목이 ‘실질적 무신론자들’입니다. 무신론자라는 뜻은 알겠는데 ‘실질적’을 붙인 이유가 궁금합니다. 실질적이 아니면 상징적이거나 형식적인 무신론자도 있다는 뜻일까요. ‘하나님은 없다’고 할 뿐 아니라 사는 모양도 그런 사람이 실질적인 무신론자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더럽고 썩었으며 선한 일을 행하지 않는 사람 (1절, 3절)은 실제로 하나님은 없다, 신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교회에 열심이고 세상이 잘못 돌아가는 것은 누구누구 (자기들을 반대하는 이들) 때문이라고 소리치는 무리 -뉴스 단골 출연자들-가 실질적인 무신론자 아닐까 싶어집니다. 증오와 단죄로 가득한 언어를 쏟아내며 권력과 금력을 숭상하고 과시하는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 신앙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겠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신자라면 차라리 무신론자가 낫겠습니다. 교회와 담을 쌓고 살아도 욕심 내지 않고 약한 이웃에 관심을 기울이고 사는 무신론자 무교회론자 젊은이들이 이들보다 낫겠습니다.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어두운 세상에 홀로 두지 마소서.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하시고, 서로를 돌보게 하소서. 감사합니다 주님. 우는 이들과 함께 하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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