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편: 회의와 의문이 들 때

해설:

학자들은 9편과 10편이 원래 하나였을 것으로 본다. 두 시편을 하나로 간주하면 ‘이합체 시편’(첫 문장을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시작하는 형식의 시)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10편에 표제가 없는지도 모른다. 9편에서는 다윗은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원수들의 폭행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다. 10편에서는 탄원의 목소리가 더욱 강해진다.

악한 자들의 계속된 폭행으로 인해 다윗은 주님께서 멀리 계신 것 같고 숨어 계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1절). 그는 하나님께, 악한 자가 스스로 파 놓은 올무에 빠지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2절). 

이어서 다윗은 악한 자들에 대해 고발한다. 그들은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악을 일삼으면서 의롭게 사는 사람들을 공격한다. 악행을 일삼는데도 하는 일마다 잘 되니 거침이 없다(3-6절). 그들은 “기만과 폭언과 욕설과 악담”을 입에 달고 살면서(7절) 만만해 보이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유린한다(8-10절).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다 해도 땅의 일에는 관심이 없다고 믿고 악행을 지속한다(11절).

다윗은 하나님께, 어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고난받는 사람들을 구원해 달라고 청한다(12절). 악한 자들이 악행을 일삼으면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을 다윗은 견딜 수가 없다(13절). 다윗은, 학대받는 사람으로서는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으니 그들을 실망시키지 마시고(14절) 악한 자들을 벌해 달라고 간구한다(15절). 

마지막으로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고백으로 기도를 끝난다. 주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는 그분께 대한 믿음을 회복시키는 법이다. 그는 “주님은 영원무궁토록 왕이십니다”(16절)라고 고백하면서 주님께서 결국 불쌍한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고 소망한다(17-18절).

묵상: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 혹은 사회적인 불의의 문제를 두고 기도하는 것은 때로 힘겨운 일입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간구해도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시간에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이 오래도록 지속되면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사랑과 정의에 대해 의문이 생깁니다. 

악한 자들이 악행을 일삼으면서 하는 말들 즉 “벌주는 이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4절), “하나님은 모든 것에 관심이 없으며, 얼굴도 돌렸으니, 영원히 보지 않으실 것이다”(11절) 혹은 “하나님은 벌을 주지 않는다”(13절)는 말들이 기도자의 마음까지 흔듭니다. 악한 이들이 승승장구 하고 거룩하고 선한 이들이 무고하게 고난 당하는 것을 보면, 아삽처럼 “그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시 73:13)라는 의문이 들게 마련입니다. 

그러한 의문과 회의를 이길 힘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악인들의 번영과 의인들의 고난으로 인해 한때 회의에 빠졌던 아삽은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시 73:17)라고 고백합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에 대한 믿음이 회복될 때 비로소 그분께서 그분의 시간에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실 것을 믿고 소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 없이 믿음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Comments

2 responses to “시편 10편: 회의와 의문이 들 때”

  1. 인류가 존재하는한 부조리가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죄이기때문입니다. 악함과 부조리가 팽배한 세상에서 정직하고 옳게 사는것이 어렵고 힘들기에 탄식을하며 살아갑니다만 악이 번창하기에 기도할수밖에 없습니다.주위의 부조리가 도리어 기도하도록하는 축복이라고 감사하는것이 쾌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것이 만사형통하면 주님을 잊고사는 비천한 존재이기때문입니다. 쉬지않고 기도 하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구유에 오신 아기예수와 함께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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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성경의 말씀과 소셜미디어의 소식이 나란히 가고 있습니다. 묵상하는 시편은 하늘의 뉴스이고 폰에 올라오는 글들은 땅의 뉴스입니다. 만화 (혹은 웹튠)를 영화로 만들었을 때 주인공 배우가 만화속 캐릭터를 너무나 잘 표현할 때 쓰던 ‘싱크로율 백퍼센트’라는 말이 지금 머리에 맴돕니다. 우울하기 그지 없는 시간 속에서 성탄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믿음이 전부라고 믿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구하고, 믿음이 자라고 성숙하기를 늘 기도하건만 믿음은 허상이요 신기루 같은 착각이고 다급한 마음이 빚어낸 희망일 뿐인가 싶은 회의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마음 한 켠에선 이래서 바로 오늘 예수님을 기다려야 하고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는 역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명리학(?)을 공부하던 자기 친구한테서 귀신이 한 일 -‘전설의 고향’ 같은-이라는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데 오싹할 정도로 실감이 났답니다. 이야기를 다 하고 그 친구가 “귀신은 작게 맞고 크게 틀리니까 믿을 게 못돼. 사주도 마찬가지고. 사주팔자고 귀신이든 믿으면 망해. 결국 판단은 자기가 하는 거”라고 했답니다. 작게 맞고 크게 틀린다…무릎을 칠만한 표현이지요. 귀신 이야기가 ‘용한 게’ 아니라 친구의 결론이 용합니다. 사람의 심리 속엔 뭐 하나가 맞으면 다 맞는 것으로 착각하는게 있습니다. 투자라고 생각한게 사기로 끝나는 경우 작게 맞은 하나를 보고 다 맞는걸로 봤기에 당한 일입니다. 오늘 시편에서 시인은 멀리 계신 하나님, 더디 오는 도움, 죄보다 가벼운 벌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이 안 계셔서, 도움이 오지 않아서, 징벌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는데요, 믿는데요, 지금이어야 한다니까요’라면서 우는겁니다. 사람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 사이에서 괴로운겁니다. 악은 성큼성큼 잘도 걷는데 선은 종종걸음이고 마냥 제자리 같고…시간의 한계 안에 갇힌 우리가 이것을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믿음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있다는 믿음을 잃지 않고 사는 길 밖에 없습니다. 크리스마스는 그 믿음을 회복하는 날입니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사람의 뉴스 안에 하나님의 소식이 들어 있는 날입니다. 믿음은 큰 그림을 보라고 합니다. 멀리 보고, 오래 보면서 마음에 큰 그림을 그리라고 합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염려하고 끌탕치며 애쓰던 기억이 납니다. 큰 그림을 그릴 줄 몰랐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갑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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