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편: 공감의 능력

해설:

8편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여 찬양했는데, 9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수들을 심판하신 것에 대해 찬양한다. 9편은 3편부터 7편까지 이어진 탄원시에 대한 응답의 기도라 할 수 있다. 이것도 “다윗의 노래”로 되어 있고, “뭇랍벤”이라는 가락에 맞추어 부르게 되어 있다.

먼저 다윗은 주님께 감사 드리며 그분의 놀라운 행적을 널리 전하겠다고 고백 한다(1-2절). “공정하신 재판장”께서 “공정하고 정직한 판결”(4절)을 내려 주셔서 원수들이 모두 도망 갔기 때문이다(3절, 5-6절). 

이 경험을 통해 다윗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는다. 그분은 영원한 심판자로서 정의와 공정으로 세상을 심판하신다(7-8절). 그분은 억울한 자들, 고난 받는 자들이 의지할 피난처다(9절). 그분은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10절). 다윗은 억울하게 고난 당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행사를 모두에게 알리라고 권한다(11절). 그분은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시기 때문이다(12절). 

그런 다음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 기도 올린다. 그에게는 아직도 원수들에게 받는 고통이 남아 있다. 그것마져 없애 주셔서 주님을 더욱 찬양하고 그분의 이름을 모든 민족에게 전하게 해 달리고 기도한다(13-14절). 주님께서 공정한 심판을 행하실 때 악을 꾀하던 나라들은 자신이 판 함정에 빠질 것임을 믿는다(15-16절). 그분의 다스림으로 인해 악인들은 멸망할 것이지만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은 구원 받을 것이다(17-18절). 이 믿음에 근거하여 다윗은 다시금 악인들과 이방 나라들을 심판해 주시기를 호소한다(19-20절).

묵상:

하나님은 머리로 알 분이 아닙니다. 체험으로만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여정이란 체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는 말은 “체험으로 하나님을 더 많이, 더 깊이 알게 하시고”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3편에서 7편에 이르는 여러 시편에서 토로한 바와 같이 원수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떄로는 아무 이유 없이 모욕과 비난을 받았고, 때로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고난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호소했고, 그분이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 때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늦어져서 “주님, 언제까지입니까?”라고 호소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 다윗은 하나님께서 공정과 정의로 다스리시는 분이며, 억울하고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교만하여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억울하고 고난 당하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3편부터 7편까지의 간구의 기도에서 다윗은 오직 원수들과 자신만을 생각했습니다. 9편에서 다윗은 처음으로 자신처럼 억울하게 고난 당하는 사람들 즉, “억울한 자들“(9절),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과 “고난 받는 사람”(12절), “가난한 사람”과 “억울한 자”(18절)을 생각합니다. 고난이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고난과 아픔을 공감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더 깊이 안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감의 능력이 커진다는 뜻입니다.  


Comments

2 responses to “시편 9편: 공감의 능력”

  1. 억울하게 당했던 사건만 기억하고 남들에게 마음 상하게한 잘못을 잊고살아온 초라한 존재입니다. 인간관계도 어렵지만 세상의 교활한 유혹과 쾌락을 이겨내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오직 평화의 왕으로 공의의 심판자로 오셨고 영으로 함께하시고 다시오시는 메시아를 찬양하며 감사하며 십자가의 은혜를 세상에 알리고 소외된자들과 함께하는 대림절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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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원수에게서 공격을 받아 쫓기는 처지에 놓인 다윗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과 지혜를 동원해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한편 찬양과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일도 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사람은 균형 감각을 잃지 않습니다. 한 쪽으로 심하게 기울거나 치우치는 사람은 균형을 잃고 쓰러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일은 중심을 잡는 일입니다. 센터링 프레이어 centering prayer는 말 그대로 마음을 모아 중심을 찾도록 돕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대개 나의 문제에만 몰두해 살지만 어떤 계기가 되면 타인이 처한 삶을 보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됩니다. 태어날 때부터 풍부한 공감력과 감성을 갖고 나오는 사람도 있지만 세상 경험의 폭이 늘면서 타인과 사회를 보는 시각과 이해력도 자라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은 일차적으로는 자기를 위해 하는 일이지만, 말씀으로 변화를 받는 자기는 자기 만을 위하고 염려하는 자리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최근에 내가 생각하던 어떤 것이 나의 생각일 뿐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는 것을 알게된 일이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 왜 내 생각에 갇혀 있었을까…생각해보니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두 가지 사건인데, 하나는 바로 며칠 전 일이고 또 하나는 몇 년 전의 일입니다. 엊그제 일은 크리스마스와 관계가 있습니다. 12월 첫번째 주말부터 가게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다가 언제부터인지 12월 중순으로 늦췄습니다. 옆의 가게들과 보조를 맞추느라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옆 가게 스타벅스는 크리스마스 절기 장식을 하지 않습니다. 겨울 상품 (빨간 컵, 겨울 드링크 메뉴) 광고는 예전처럼 하지만 ‘크리스마스’라는 워딩이 사라진건 이미 오래된 일이고, 전통적인 성탄장식은 전무합니다. 한국의 겨울과 성탄절 추억이 생생한 사람들은 가면 갈수록 ‘크리스마스 기분’이 안 난다고 말합니다. 미국이 (기독교 국가 미국이!) 크리스마스 맛이 안나는게 말이 되냐고도 합니다. 나 혼자 생각에 첫째는 PC (Political Correctness) 주의가 더욱 강해져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물의가 될 만한 일은 피하고자 하는 것과, 두번째론 다양한 종교와 문화 스펙트럼을 존중한다는 표시로 크리스마스 중심의 계절 장식을 하지 않는 사업장이 많아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와 해피 할러데이스! 라는 인사를 놓고 ‘크리스찬적인’ 입장이 무엇이냐는 논쟁을 처음 들은게 30년 전 일인데 지금도 여전합니다. 혼자 그렇게 생각하다 며칠 전에 스타벅스 매니저한테 물어봤습니다. 처음 가게를 할 때부터 지금까지 스타벅스 매니저가 여러명 바뀌었지만 늘 가깝게 지냈는데 이번 매니저는 유난히 친화력이 좋은 친구라 나와 이런저런 얘기를 잘하는 편입니다. 왜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돌아온 답은 한마디로 획일성 uniformity 이었습니다. 스타벅스 매장마다 ‘알아서’ 장식을 하게 두었더니 매출에 영향을 미치더랍니다. 손님들도 어느 매장은 장식이 예쁘다, 좋다, 과하다, 싱겁다…등등 반응이 제각각이면서 방문고객수에도 변동이 있더랍니다. 프랜차이즈의 개념에 따라 전국적으로 통일된 데코레이션으로 간다는게 방침으로 정해져서 이제는 계절이 바뀌면 전매장 장식이 같이 바뀌고, 성탄절기 장식은 중단했다는겁니다. 종업원이 개인적인 장식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을 하는 것도 막느냐고 물었더니 안전과 위생 규범을 지키는한 개인적인 선택은 가능하다고 답했습니다. 기업이 방향을 정할 땐 정치적 추세나 시대상황적 판단을 우선 고려하지만 상업의 본바탕은 이윤추구라는 것을 다시 또 깨달았습니다. 이 일이 내게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반성으로 이어진 것은, 내게도 여전히 기독교인의 기득권적 사고가 남아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고, 나는 하는데 남이 안하면 ‘왜’ 안 하는지는 묻지 않고 그저 안 한다는 것만 보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에 경험한 인식의 사각지대 (blindspot) 는 크리스마스 장식 이슈보다 개인적인 사건입니다. 오늘 아침 다윗의 시에서 보는 공감능력의 확장이 새로운 목표가 됩니다. 공감력은 행동 doing 으로 나타나지만 궁극적으로는 존재 being 의 영역이라는 것을 봅니다. 나를 위한 존재, 타자를 위한 존재 그 사이에서 매일 균형을 잡으며 고민하고 노력하게 하소서.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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