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편: 묵상의 삶

해설:

이 시편은 일종의 ‘도입 시편’이다. 이 책에 수록된 150편의 시편들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 일인지를 전해준다.

먼저 시인은 “복 있는 사람”이 “하지 않는 것” 세 가지와 “하는 것”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지 않는 것”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 것,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것 그리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이다(1절). 이 세 가지는 각기 다른 행동이 아니라 죄의 성향이 굳어져가는 과정을 서술한다. 문학적으로 “점층적 병행구”라고 부른다. 죄악의 습관은 “듣는 것”에서 “따르는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 “자리 잡는 것”으로 악화된다. 

복 있는 사람은 그 과정을 알기에 악인의 꾀에 귀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 대신, 주님의 율법에 귀를 기우리고 묵상한다(2절). 시편에서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즐거워 하고 그 뜻을 깨닫고 마음에 새기기 위해 끊임없이 묵상한다.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과정 자체가 기쁨이요 복이다.    

이어서 시인은 복 있는 사람의 삶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3절)에 비유한다. 나무의 뿌리가 물가에 연결되어 있기에 언제나 생명력이 충만하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존재의 뿌리가 연결되어 있는 사람의 삶이 그렇다.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라는 말은 “아무 일이든 잘 된다”는 뜻이 아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아무 일이나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를 힘쓴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어 주신다.

4절에서 시인은 반대 상황에 대해 설명한다. “악인”은 하나님을 등지고 자신의 욕망대로 사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렇지 않으니”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지 않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존재의 뿌리가 깊어서 흔들림이 없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상황에 따라 쉽게 흔들린다는 뜻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에서 정죄 받을 것이다(5절). 

6절은 결론이다. 이 결론은 독자에게 말씀 묵상을 통해 의인의 길, 복 있는 길을 걸어가라고 격려한다.

묵상: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묵상하는 삶에 대해 아주 적절한 비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그분의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하는 것은 우리 존재의 뿌리를 그분에게 뻗고 수분과 양분을 빨아 들이는 과정입니다. “밤낮으로”(2절), 쉬지 말고, 늘 묵상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가 우리 안에 계속 흘러 들어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 깊이 뿌리 내린 사람은 부는 바람에 흔들릴 수는 있지만 뿌리까지 뽑히는 일은 없습니다. 바람을 심하게 맞을수록 뿌리는 더 깊어집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가뭄이 들어도 잎이 시들지 않는 것처럼, 묵상하는 사람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씀 안에 머물러 살 때 우리는 열매를 맺어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줍니다.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도 역시 하나님에게 등지고 자기 욕망대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정확한 비유입니다. 쭉정이는 겉으로는 볍씨 모양을 하고 있지만 속이 텅 비어 있습니다. 겉 모양은 그럴 듯하지만 생명령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채워질 수 있고, 그 사랑은 생명의 힘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고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합니다. 그것이 죄악으로 기우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늘 마음이 찢겨 있습니다. 환경에 조금만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사정없이 흔들립니다.

말씀 묵상은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또한 나를 변화시켜 다른 사람을 돕는 길입니다. 그래서 하루의 첫 시간을 말씀 묵상의 시간으로 성별하는 것입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시편 1편: 묵상의 삶”

  1. 죄와 탐욕과 오만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루를 제대로 살기위해 매일아침에 말씀으로 무장하기를 원합니다. 달콤하고 교활한 유혹에 너머지지 않기위해 말씀을 읊조리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뒤를 따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모든 생각과 언행과 삶이 주님께 영광돌리는 승리의 삶이 되는 오늘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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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어제는 이사야서 묵상이 끝난 날이었습니다. 두 달 이상 이사야 선지자의 세계에 함께 살았더랬습니다. 어제는 한국의 탄핵 투표가 있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두번째인 만큼 절실함의 무게가 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도 결과에 주목하고 있었는지 탄핵 가결을 탑뉴스로 올린 통신사들이 여럿입니다. 전쟁 (6.25) 이후 세대인 내가 ‘계엄령’을 경험한 것은 대학생 때였습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도 달달 외워서 언제라도 술술 나오고, 국기 하강식을 하는 6시에는 하던 일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대며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그 때는 멈추는 영화 장면은 실제였다지요- ‘애국’과 ‘반공’ ‘개발’ 이런 단어들로 채워진 세상을 살았습니다. 지난 주 3일에 나온 계엄 선포는 미국에 살면서 들었으니 계엄령을 또 경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국에 있는 우리 세대에겐 미숙하고 혼란스러운 청춘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았을 겁니다. 지난 4, 50년 동안 고생해서 물려준 나라 모습이 이것이었던가 부끄럽기도 하고 참담하기도 했을 겁니다. 그래도, 무시무시한 계엄 선포를 두 시간 만에 해제시키고 온나라가 마음을 모으는 모습을 세계가 보았습니다. 계엄령 선포와 해제의 드라마가 한반도를 휩쓸고 있을 때 지구 다른 편에서 한 한국인은 ‘문학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라고 세상을 향해 선포했습니다. 정의와 사랑이 문학의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이 새벽에 묵상의 자리에 앉아 시편을 펴 읽습니다. 성서문학의 정수, 영혼의 시어를 모아 놓았다는 시편으로 다시 인간을 배웁니다.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의 반대편에 서 있는 하나님을 배웁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옵니다. 시편 첫 장을 읽으니, 인간 앞에 두 길이 있는 것을 봅니다. 인생이 무엇이든 – 광야든, 바다든, 꽃밭이든, 정글이든 – 주님과 함께 가는 길과 혼자 가는 길 두 길이 있습니다. 주님 손을 잡고 함께 가는 길을 선택합니다. 주님의 시간표에 맞추는 여행길을 선택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생명의 주인, 어머니, 보호자, 주님을 찬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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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fully39f6bbe2e9 Avatar
    fully39f6bbe2e9

    241214 시편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시편‬ ‭1‬:‭1‬-‭2‬ )

    이사야 대장정을 마치고, 교회 묵상 본문을 따라 시편 묵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시편은 저자의 묵상의 내용이 들어간 말씀이라 그런가 다른 것들에 비해 더 자주 읽고 묵상하게 되고, 나의 고백으로 수시로 읖조리게 되는 것 같다.

    시편1편의 첫 시작에 언급된 ‘묵상’ 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게 된다.
    <악인과 의인>을 대조하면서, 악인은 어떠한지 의인은 어떠한지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나는 1절과 2절의 순서를 바꿔 묵상해 보았다.

    *
    오로지 주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묵상하는 사람.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죄에 속해 종노릇하지 않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 가리지 않고,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묵상하는 사람은 죄에 속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내 삶 속에서 마르지 않고 열매맺기 때문이다.

    2주 정도 조국의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 마음이 힘들었다. 하나님 앞에 나라의 상황을 올려드리며 기도하지만, 가슴을 졸여야 했고.. 그 뿐만 아니라 갑작스런 시리아의 쿠테타, 그리고 이스라엘의 멈추지 않는 전쟁과 세상의 많은 소식들에 나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물론 이러한 소식들이 중보기도하는데에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듣고 기도하는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다.

    당장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없지만, 빠르게 소식을 듣고 기도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도 여겼다.
    그러나 세상의 소식의 비중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 보다 커지기 시작할 때, 나의 기도는 근심과 두려움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마음이 내 안에 부어져서 그것으로 인해 아파하고 탄식하는 기도가 아니라 권력자들에 대한 비난과 인간에 대한 연민, 그리고 어찌할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며 불안해하는 감정이 기도와 뒤섞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기도인가? 이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 어떤 정당한 것이라도 하나님보다 앞서 있다면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라도 하나님 중심이 아닌 ‘내 중심’이 된다. 그것은 주술적행위나 주문이다 다름이 없다.
    기도와 간구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품으로 출발하지 않는다면 불완전한 나의 내면을 꺼내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은 그런 나의 고백도 들으시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의 영으로 하는 기도는 아니다.

    낮이나 밤이나,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늘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며 묵상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삶의 방식과 행위가(그것이 영적인 행위인 예배나 기도일지라도…) 하나님 말씀으로 부터 시작되고 채워져야 악한 길에서 멀어지고, 열매맺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임을 깨닫는다.

    나의 우선순위가 어떠한지 되돌아보고, 주님보다 높은 자리에 있었던 모든 것을 다시한번 내려놓는다. 그리고 매일 말씀 묵상을 통해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셔서 영광받으시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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