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63장: 이제는 어디에 계시는가?

해설:

1절부터 6절까지는 민족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다. 그분은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의 권능을 가진 자”(1절)다. 그분은 붉게 물든 옷을 입고 에돔에서부터 오신다. 주님은, 포도주 틀을 밟는 사람의 옷처럼 자신의 옷에 유혈이 낭자한 이유는 무엇이냐고 물으신다(2절).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에돔과 여러 민족들을 그들의 죄값대로 심판한 까닭이라고, 그분은 답하신다(3-6절). 

7절에서 화자는 예언자로 바뀐다. 그는 유다 백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전하겠다고 고백한다. 주님은 유다 백성을 당신의 자녀로 여기시고(8절),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 함께 고난 당하며 직접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9절).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에게 등지고 그분의 영을 근심하게 했고, 그로 인해 그분은 그들을 잠시 심판에 붙이셨다(10절). 

하나님에게 잠시 버림 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 그들은, 그분이 과거에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면서, 왜 지금은 잠잠하신지, 왜 모른체 하시는지, 왜 멀리서 지켜보고만 계신지 묻는다(11-14절). 여기서 “그분이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이 세 번 반복된다(11절, 12절, 13절).

15절부터 마지막까지 화자는 “나”와 “우리”라는 인칭 대명사를 섞어 하나님께 기도 올린다.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께 호소할 유일한 근거는 “주님의 열성과 권능”이며 “주님의 자비와 긍휼”(15절)이다.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심판은 정당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의 속량자”(16절)이시며, 그들은 “주님의 종들”이며 “주님의 유산”(17절)이다. 그런 그들이 “오래 전부터 주님의 다스림을 전혀 받지 못하는 자같이 되었으니”(19절) 이제는 구원의 손을 펼쳐 달라고 간구한다.  

묵상: 

“그분이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때로 이런 질문에 사로잡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이 우주적인 원리이거나 힘이라면, 우리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날 때 불가항력으로 여기고 체념하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대상은 “변함없는 사랑”을 가지신 분이고 “은혜와 긍휼과 풍성한 자비”(7절)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여기시고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을 믿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고 그 일이 오래 지속될 때면 “그분이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고 질문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에서 칠 십년이 넘는 기간 동안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포로로 살던 유대인들이 유다 땅과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기쁨과 감격은 참담한 현실 속에서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칠 십여 년 동안 방치되었던 땅을 다시 일구는 것도, 성벽을 다시 쌓고 성전을 재건하는 일도, 삶의 터전을 일구는 일도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면서 “그분이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고 탄식했습니다.

그 환난의 깊은 수렁 속에서 이사야는 고난의 신비를 발견합니다. 믿는 이들의 고난은 하나님의 부재나 침묵 때문이 아닙니다. 고난은 여러가지 이유로 일어나지만, 하나님은 고난 중에 믿는 이들에게 더 가까이 오십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조상들의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주님께서는,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께서 친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9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심판하실 때 멀리서 지켜 보며 즐기는 것이 아니라 같이 아파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사랑과 긍휼로 그들을 구하여 주시고, 옛적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치켜들고 안아 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고난 당할 때 더 가까이 오셔서 동행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정 관념을 깨뜨리는 혁명적인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냉담하신 아버지 같은 분이 아니라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분입니다. 고통받는 자녀 곁에서 같이 아파하며 치켜들고 안아 주시는 분입니다. 그 마음이 결국 십자가 사건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난이 다가올 때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날 기회로구나” 생각해야 합니다. 고난은 모두가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믿는 이에게 고난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놀라운 선물을 안겨 줍니다.    


Comments

2 responses to “이사야서 63장: 이제는 어디에 계시는가?”

  1. 부패와 타락과 탐욕이 팽배한 세상에서 살고있습니다, 성도와 교회를 무시하고 질시하는 경향이 점점 더 심해져 가고있습니다. 심지어 성도들과 성도들이 교회들과 교회들이 서로 갈라지고있는 형편입니다 . 오직살길은 신실하신 주님의 약속 땅끝까지 함께하시겠다는 임마누엘 하나님 나의 자녀 나의 배성이라시는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꼭 붙잡고 생명이 다할때까지 성령의 인도하심따라 사는 삶을 살아내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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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한국의 현 시국을 보고 우려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다양한 의견을 내고 나름의 처방도 제시합니다. 교육이 문제라는 한 독일인 학자의 글을 읽었습니다. 철학으로서의 유교의 가치와 한문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동의하는 부분도 있지만 유교의 철학적 가치가 현 시대정신을 일으켜 세울만한지, 유교의 세계관 속에 자유 평등 박애의 코스모폴리탄 (세계시민) 의식이 들어갈 자리가 있는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편협하고 무섭고 독단적이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습니다. 구약을 읽는 중에 형성된 하나님의 이미지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자애로운 산타 클로스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하는 것도 문제지만, 늘 화가 나 있고 잘못한 것을 찾아내 벌 주는 존재로 보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용서와 회복이 그저 ‘하나님 마음’이요, 하나님 혼자 당신 마음대로 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과 나는 점점 더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알 수도 없고, 알아야 할 필요도 없는 추상적인 말로 남을 뿐입니다. 오늘 63장을 읽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개인을 향해서가 아니라 공동체, 백성, 사회, 나라를 향해 내려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개개인의 죄에 무심하셔서 혹은 그 죄들이 별로 심각한 것이 아니어서 ‘당장 벼락을 맞아 죽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를 역사라는 큰 그림 속에서 보시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죄는 죄지만 죄의 조건을 감안하신다고 할까요. 배고파서 빵을 훔친 ‘죄’를 도둑질이라는 잣대로 재기 전에 배불리 먹을 수 없는 처지 -일을 해도 임금이 부족해서, 일을 할 수 없어서 등등-를 헤아리신다고 할까요. 하나님의 성신을, 영을, 마음을 거역하고 괴롭히고 근심하게 (10절) 하는 것은 우리 개개인의 죄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죄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한국을 품고 기도하며 회개하는 것은 양쪽 다 문제가 있다, 다 잘못한다, 다시 뭉쳐 ‘대한민국’을 외치자…가 아닙니다. 사고하는 능력을 키우지 않은 교육, 문제와 답을 달달 외우게 한 교육, 정답은 하나라고 가르친 교육을 고쳐야 합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고 가르칠 뿐 무엇이 죄인지는 가르치지 않는 교회, 고난을 피하는 기도만 드릴 뿐 고난 속에 계신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는 교회 또한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우리의 권력과 결코 같지 않습니다.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사자나 천사가 아니라 그분의 (메시야의, 예수의, 십자가의) 얼굴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9절). 하나님의 뜻은 이웃과 자연, 나의 안과 밖을 다 품는 모든 것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나의 개인적인 소망과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축소 시키지 않기를 원합니다. 나의 배고픔을 이웃의 배고픔과 연결 시키는 데까지 가게 하소서. 구약의 하나님은 편협하신게 아니었습니다. 내가 덜 자라서 고만큼 아는걸 다 아는 걸로 생각했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주님의 권능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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