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1절부터 5절까지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대한 구원을 완성 하시기까지 “잠잠하지 않겠고” “쉬지 않겠다”(1절)고 다짐하십니다. 여기서의 “나”는 하나님을 가리키고, “너”는 예루살렘(유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온전히 회복되기까지 쉬지 않으신다. 그 때가 되면 이방 나라들이 시온의 영광을 볼 것이며, 유다는 주님께서 주신 “새 이름”(2절)으로 불릴 것이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주님 손에 들려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이요 “하나님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3절)으로 만드실 것이다. “버림받은 아내”와 같은 신세였던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내로 회복될 것이다(4-5절).
6절부터 9절까지에서 이사야는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 하기를 쉬지 말라고 권한다. 성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밤이나 낮이나 쉬지 말고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잊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6절). “상기시켜 드려야 한다”는 말은 수사적 표현이다.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신다. 늘 기억할 것은 유다 백성이다. 또한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세상에서 높임 받을 때까지 “쉬시지 못하게 해야 한다”(7절)고 강조한다. “쉬시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말은 수사적 표현이다. 1-5절에서 주님은 그들을 구원하기까지 쉬지 않겠다고 하셨다. 따라서 쉬지 못하게 할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끝까지 믿고 의지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다시는 이방 사람들에게 침량 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8-9절).
10절부터 12절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행하실 것을 믿고 그 일을 위해 구체적으로 준비하라는 명령이다. 포로로 잡혀 갔던 사람들이 돌아올 때를 대비하여 길을 닦고 뭇 민족이 보도록 깃발을 올리라고 한다(10절). 주님께서 포로들을 데리고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11절).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은 그들을 “거룩한 분의 백성”이요 “주님께서 속량하신 백성”이라고 부를 것이고,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사랑한 도성”이라고 부를 것이다(12절).
묵상:
이사야는 유다 백성에게, 주님께서 하신 약속을 늘 주님께 상기시켜 드리라고 말합니다(6절).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실 때까지 쉬시지 못하게 해야 한다”(7절)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해석하여 “하나님으로 일하시게 하라”고 말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지치도록 몰아부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도의 능력자”는 목청이 쉬도록 하나님을 들볶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로써 하나님의 뜻을 꺽은 “기도의 무용담”이 은혜로운 간증으로 유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쉬지 못하게 하라”는 말도, “하나님으로 잊지 말도록 상기시켜 드리리”는 말도 수사적 표현입니다. 그것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약속을 잊으실 리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위해 항상 일하십니다. 두 가지의 수사적 표현은 기도하기를 쉬지 말라는 뜻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기 쉽습니다. 기도는 보이지 않게 일하시는 하나님에게 눈 뜨고 그분께 의지하려는 노력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몰아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그분의 임재에 눈 뜨고 그분의 섭리를 따라 사는 일을 멈추지 않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눅 18:1-8)를 통해 동일한 교훈을 전하십니다. 이 비유를, 하나님이 항복할 때까지 기도로 들볶으라고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재판관은 의롭지 못하여 과부의 억울한 사정을 알면서도 모른체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의로우셔서 우리의 딱한 사정을 보고 모른체 하지 않으십니다. 억울한 상황에 처하여 기도 하기를 쉬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결국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신다는 믿음을 붙들려는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강짜에 지쳐서 손 드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께 대한 우리의 신실한 믿음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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