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54장: 새 예루살렘

해설:

1절부터 10절은 유다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다. “임신하지 못하고 아기를 낳지 못한 너”(1절)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상징이다. 바빌로니아에게 멸망 당한 후, 유다와 예루살렘은 자녀가 없는 여인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중상류층 유대인들은 모두 포로로 잡혀가고 하층민만 남겨졌기 때문이다. “많은 자녀를 볼 것이다”라는 말은 포로로 잡혀 갔던 사람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뜻이다. 그 때가 되면 유다는 이방 나라까지 세력을 뻗칠 것이다(2-3절). 유다 백성은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다시는 부끄러움을 당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4절). “온 세상의 하나님”이 유다 백성의 남편이 되어 줄 것이다(5절). 

유다는 마치 젊은 나이에 남편에게 버림 받은 여인과 같다. 아내의 간음(유다의 우상 숭배)으로 인해 그 남편은 잠시 아내를 버렸으나, 그의 “영원한 사랑”으로 그 여인을 다시 부르실 것이다(6-8절). 홍수로 심판하신 후에 노아에게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것처럼, 주님은 유다를 또 다시 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9-10절).

11절부터 17절은 유다를 회복시키신 후에 행하실 일에 대한 예언이다. 예루살렘이 “고난을 당하고 광풍에 시달려도 위로를 받지 못한”(11절) 이유는 그들의 우상숭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하나님은 유다를 주변 열강들에게 내어 주셨다. 예루살렘을 회복시킬 때 주님은 무너진 성벽을 온갖 진귀한 보석으로 재건하실 것이다(11-12절). 그 때가 되면 모든 백성이 주님의 제자가 될 것이고 공의 위에서 번영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13-14절). 그들을 공격하는 자들이 있겠지만, 더 이상 주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다(15절). 어떤 무기도 그들을 해하지 못할 것이고, 어떤 말로도 그들을 모욕하지 못할 것이다(16-17절). 

묵상:

54장의 예언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 중에 가장 강력하고 화려합니다. 근본주의적인 유대교인들은 11절부터 17절에 묘사된 모습 그대로 이루어질 날이 올 것이라고 믿고 기대합니다.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지금의 예루살렘을 보면 통곡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 시는 여러 민족과 종교로 찢겨져 있고, 성전터에는 이슬람 모스크가 버티고 있으며, 솔로몬의 성전은 서쪽 벽의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근본주의적인 유대교인들은 기회만 있으면 성전터를 탈환하려 합니다. 성취되지 못한 예언을 미사일과 폭격기로 이루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온 세계를 공멸의 위기로 몰아넣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내가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 예언은 종교적 열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힘을 합하여 무기를 들고 일어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예언을 주신 분이 “너를 지으신 분”이요 “너를 구속하신 분”(5절)임을 믿는다면 그분께 돌아가 그분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13절)가 되어 “공의의 터 위에 굳게 서서”(14절) “번영과 평화”가 모두에게 임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예언을 믿고 바라는 사람들이 지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일에는 불성실 하면서 무기를 개발하고 테러 훈련만 하고 있으니, 이 예언의 성취는 자꾸만 미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이 예언을 읽으며 사도 요한이 보았던 “새 하늘과 새 땅”을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대한 환상 속에서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면서 사도 요한은 “그 도성은 하나님의 영광에 싸였고, 그 빛은 지극히 귀한 보석과 같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과 같았습니다”(계 21:11)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그 영광스러운 미래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보게 될 미래의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욱 열심을 내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제자로 살아가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이 공의의 터 위에서 번영과 평화를 누리도록 우리가 할 일을 찾아 행해야 하겠습니다. 


Comments

2 responses to “이사야서 54장: 새 예루살렘”

  1. 포로로 잡혀서 멀리떠났던 유다와 예루살렘이 돌아온다는 희망의 맣씀이 저에게는 교회를 떠났던 자녀들이 돌아온다는 말씀으로 드립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주님의 자녀들이 된다는 예언으로 들립니다. 감사합니다. 저희들의 모든 생각과 언행과 삶이 그들이게 구원의 통로가 되는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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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사람은 질문하도록 지어졌는지 모릅니다. 창세기의 이야기에서 아담은 동산 한 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명령을 듣습니다.
    질문이 불가피해지는 순간입니다. 아담도, 아담의 독자도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안되나요, 왜 이 나무인가요, 무엇이
    다르지요…먹으면 죽을 것이라고요, 죽음이 뭐지요…사람은 질문을 해도 되게끔 지어졌다는, 한 발 더 나아가, 질문하면서 살도록
    지어졌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이 공통적으로 하는 질문이 몇 가지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을까, 나는 왜
    태어났을까, 어떻게 살게 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자신에 대한 질문은 창조주-나의 근원-세상의 근원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세상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아닌 모든 대상에 대한
    질문은 관계에 대한 질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엄마에게, 강아지에게, 장난감에게, 밥에게, 이웃에게, 동생에게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이 그렇게 생각했고, 개인이 모인 가족이,
    부족이, 나라가 그런 선민의식을 갖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54장을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읽는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봅니다. 예루살렘 같은 처지에 놓인 나라가 예루살렘 뿐이 아닐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죄를 저질러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나라라는 레이블은 이스라엘에게 붙여졌지만 우상숭배는 유일신의 관점에서는 죄이지만 다신주의
    사회에선 죄가 아닙니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신세도 이스라엘 만 경험한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스토리의 어떤 점이 세상 만민이 귀기울일 이야기가 된걸까요. 이사야서를 읽는 동안 이스라엘에 대한 질문이
    자꾸 생겨 났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의 어디에서 자신을 보았을까, 이사야의 어떤 예언과 고백이 예수님의 삶을 관통했을까. 이사야서 뿐
    아니라 선지서의 메세지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이스라엘은 특정지역의, 특정 나라의, 특정 백성입니다. 고유한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우리는 이스라엘이 곧 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읽어야 진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나라고 여겨질 때 성경의 이야기가 살아납니다. 오늘도 질문과 답의 릴레이는 계속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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