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53장: 십자가의 비밀

해설:

52장 13절부터 시작된 ‘네번째 종의 노래’가 계속 이어진다. 52장 13-15절에서 주님은 당신의 종이 고난 당한 후에 영광을 받을 것을 예언하신다. 53장 1절부터는 6절에서는 주어가 일인칭 복수(“우리”)로 바뀐다. 종이 당한 고난과 그에게 행하신 주님의 일은 너무도 놀라워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1절). 

그 종은 인간적인 기준에서 볼 때 주목을 끌만한 장점이 하나도 없다(2절). 그가 사람들에게 멸시와 버림을 받는 것을 보고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다(3절). 하지만 알고 보니 그가 받은 멸시와 버림과 고난은 “우리”를 대신하여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종이 자신의 죄로 인해 고난 당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우리”를 위해 대신 고난 당하여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얻었는데도,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4-5절). 고집 센 양과 같이 죄악을 탐하는 우리의 죄를 주님께서 그 종에게 지우셨던 것이다(6절). 

7절부터는 주어가 삼인칭 단수(“그”)로 바뀐다. 그 종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에게 지워진 고난을 감당한다(7절). 그는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지만 모두가 그 자신의 죄 때문에 그런 줄로만 안다(8절). 아무 죄 없이 고난을 짊어진 그 종은 악한 사람과 함께 묻힌다(9절). 주님께서 그렇게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속건제물”로 드려진 것이고, 그 희생으로 인해 그는 주님의 뜻을 이룬다(10절). 

11절과 12절은 죽기까지 복종한 그 종에게 주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예언이다. 주님께서는 고난 당한 후에 그 종을 높여 주실 것이며, 그 종은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할 것이다.  

묵상:

‘네번째 종의 노래’는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도들과 초대 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그분이 메시아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자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분이 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는가?”라는 질문을 풀어야 했습니다. 

만일 네번째 종의 노래가 없었다면 그들은 그분의 십자가 희생의 의미를 풀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한 속건제물로서 당신 자신을 드림으로써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속건제물은 죄로 인해 발생한 손해에 대해 값을 치루는 것입니다. 메시아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당신의 생명을 드려 온 인류의 죄로 인해 발생한 손해에 대해 값을 치루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당신의 구원 계획을 완성하신 그 종을 높여 주셨습니다.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 주시고 사십 일 후에 하나님의 자리로 들어 올리셨습니다. 그분은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때까지 성령을 통해 믿는 이들과 함께 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어 가십니다. 

그분이 인간적으로 얼마나 볼품 없었고 얼마나 많은 멸시와 거부와 모욕과 박해를 받았는지를 생각하면, 부활 이후에 일어난 일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일어날 일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듣지도 못한 일”이며 “아무도 말하여 주지 않은 일”(52:15)입니다. 십자가의 비밀은 너무나 놀라워서 믿기 어렵고 너무나 좋아서 믿기 어렵습니다. 합리성을 따지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너무나 황당한 이야기로 들립니다.  

‘네번째 종의 노래’의 중간에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 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신의 한수’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노래를 읽는 사람들에게 자신도 그 “우리” 중 하나라는 사실을 느끼게 하려는 문학적 장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대속 사건이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합리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그 신비와 비밀을 품을 수 있습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이사야서 53장: 십자가의 비밀”

  1.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상기 시킵니다. 이집트나 앗시리아, 바빌론은 영원한 통치자가 아니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땅과 하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물의 주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는가에 따라 삶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우리 사는 세상은 때론 아름답고 때론 흉합니다. 때를 따라 달라져서가 아니라 나의 경험이 그렇게 인식하게 만듭니다. 내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나 자신의 무능과 무지로 인해 불행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종교적 틀 밖에서 ‘믿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는 내립니다. 나는 다만 내가 경험하고 배우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게 몰 주차장을 보면 십자가를 걸어둔 차들이 많이 있습니다. 히스패닉 타운이라 카톨릭 인구가 많습니다. 십자가 목걸이를 걸어 놓았거나 대쉬보드에 작은 성모상을 붙여둔 차들이 많습니다. 우리 가게 옆은 네일살롱인데 가게 문 뒤로 정가운데에 불상이 있고 과일과 작은 화분 (머니트리?)이 옆에 있습니다. 그 가게 앞에 주차한 차인데 조그마한 부처상을 여러개 붙여 놓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가지 모양의 불상이 아니라 다른 포즈의 불상들이어서 조금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십자가, 성모상, 불상 다 믿음의 심볼입니다. 밖으로 하는 내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십자가=예수’입니다. 예수의 의미는 하나 만이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떠올려도 누구는 희생을, 누구는 용서를, 부당함을, 불의를, 폭력을 떠올립니다. 구원을, 희망을, 부활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참 이상한 것은, 예수님을 생각하면 상당한 재력, 건강미 넘치는 몸, 바디가드가 보호하는 유명인사 등의 이미지는 단 한 번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목자, 농부, 목수, 의사, 선생이라고 예수님의 ‘직업’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런 직업으로는 유명인사 반열에 오르기가 어려워서 그럴까요. 아니면 부와 명성, 권력, 인기 등에 연결할 수 없는 예수님의 이미지가 우리 마음 안에 확실하게 있기 때문일까요. 성경을 알든 모르든 예수는 힘 없는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의 친구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예수는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구세주라고 이해하지 권력자나 부자의 편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도 예수를 권력과 부의 수단으로 볼 수 없습니다.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부자가 되어 걱정 없이 살게 된다는 선전을 하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 53장이 보여주는 종의 모습은 너무나 맞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보는 주의 종은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사랑과 희생의 예수입니다. 십자가가 상징에 그치지 않고 내 삶의 곳곳에서 나타날 때 예수님은 부활하신겁니다. 예수님의 가난과 약함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야 나는 부활을 믿는겁니다. 십자가의 역설을 품지 못하면 나는 여전히 바빌론과 로마 제국의 종으로 사는겁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면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를 수 있습니다. 형제를 지키는 자 예수를 사랑하며 닮으며 따르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한 모든 것 다 주님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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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내죄뿐만이아니라 온세상의 죄를지시고 온갖수모와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만왕의 왕으로 다시오시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하며 허락하신 십자가를 지고 우직하게 주님뒤를 따르도록 도와주십시오. 이곳 뉴함프샤에는 첯눈이 오고있습니다, 온세상이 하였고 깨끗합니다. 저녁에 감사절 식사를 친족들과 할 작정입니다, 창조주하나님은 믿지만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돈부부와 십자가의 은혜를 반신반의하는 딸 부부와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안에서 사는 손녀부부와 함께 식사합니다, 그들의 영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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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fully39f6bbe2e9 Avatar
    fully39f6bbe2e9

    241128 이사야53장

    “주님께서 그를 상하게 하고자 하셨다. 주님께서 그를 병들게 하셨다.” (사53:10)

    이사야 53장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잘 알려진 말씀이다.
    오늘은 이 말씀 가운데 10절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다.

    예수님은 왜 오셨을까? 왜 십자가에서 묵묵히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는가?

    -> 나의 죄 때문에…

    보통 이 질문앞에서 나는 ‘나의 죄’,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생각할 때 마다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함께 공존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이 구절을 읽는데-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상하게 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라는것을 새롭게 깨달았다.

    하나님이 보내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다.
    죄악이 만연한 세상을 보시고, 한탄하시며 쓸어버리지 않으셨다. 그대신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육신의 몸으로 상하기
    위해, 벙들이 위해 오신 것이다. 나의 죄를 담당하시
    위하여…

    예수님이 오신 것. 그리고 예수님이 주신 구원이 나의 어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 깨닫는다.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상하게 하고 병들게 하는 그 자리에 보낸 하나님. 나의 구원이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터 왔음을 본다.

    예수님이 왜 오셨는가?
    하나님이 보내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보내셨는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가치를 그 어떤것과도 바꾸지 않으리…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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