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31장: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해설:

31장의 예언은 30장의 예언처럼 이집트의 도움에 집착하는 히스기야 왕의 태도에 대한 비판이다. 그들은 “군마를 의지하고, 많은 병거를 믿고 기마병의 막강한 힘을 믿으면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바라보지도 않고, 주님께 구하지도 않는다”(1절). 하나님은 이미 정하신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2절).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실 때면 군마도, 병거도, 기마병도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3절). 

주님께서는 당신을 “먹이를 잡고 으르렁 거리는”(4절) 사자에 비유하신다. 사자가 먹이감을 지키듯이 혹은 새가 둥지의 새끼를 보호하듯이 주님은 시온을 지켜 주실 것이다(5절). 6절의 “이스라엘 자손”은 유다 백성을 의미한다. 주님은 유다 백성에게 주님께로 돌아서라고 부르신다. 그 날이 오면 그들은 모든 우상들을 내던지게 될 것이다(7절). 

8절과 9절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 시키고 유다를 유린했던 앗시리아에 대한 심판 예언이다. 영원할 것 같던 앗시리아 제국은 주전 612년에 바빌론 제국에 의해 궤멸되었다. 그것은 마치 소련의 붕괴처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이사야는 앗시리아의 갑작스러운 멸망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것이라고 예언한다. “시온에 불을 가지고 계시며 예루살렘 화덕을 가지고 계신 주님”(9절)이라는 말은 예루살렘에 대한 도발이 앗시리아의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묵상:

“시온에 불을 가지고 계시며 예루살렘에 화덕을 가지고 계신 주님”(9절)이라는 표현에서 잠시 멈추어 묵상합니다. 앗시리아는 물리적인 차원만을 보고 유다를 침략했습니다. 그 전쟁으로 인해 유다는 초토화 되다시피 크게 해를 입었지만, 그 전쟁으로 인해 치명상을 입은 것은 앗시리아였습니다. 그들은 물리적인 차원만 생각했지 영적 차원은 보지 못했습니다. 유다를 침범한 것은 곧 빨갛게 달아오른 화덕을 건드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어떻게 여기고 계신지, 앗시리아도 알지 못했고, 히스기야 왕과 유다 백성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히스기야 왕은 이집트에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청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앗시리아의 산헤립 왕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것처럼 유다도 쉽게 공략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앗시리아가 칼에 쓰러지겠으나, 사람의 칼에 쓰러지는 것이 아니고, 칼에 멸망하겠으나, 인간의 칼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다”(8절)라는 말씀은 그들의 패착이 물리적인 차원에 대한 오판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 대한 무지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유다 백성도, 앗시리아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 예언은 오늘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차원에만 붙들리지 말고 영적 차원을 보라는 깨우침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하시고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결정하게 하셨습니다. 인류는 각자의 자유 의지를 사용하여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까지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통제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각 사람과 인류 전체를 다스리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마 10:29).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 살도록 자유 의지를 사용해야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고 그분의 주권에 맡겨야 합니다. 한 개인으로서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맡기고, 한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행해야 합니다. 한 개인으로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이사야서 31장: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1.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어제에 이어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에 대해 묵상합니다. 아침을 맞이하면서 전 날과 완전히 다른 날을 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날이 어제의 연장 선상에서 시작됩니다. 특별한 스케쥴이 있는 날이 있습니다. 기대되는 일이, 혹은 정말 마주하기 싫은 일이 잡혀 있는 날은 아침의 마음가짐이 평소와 다를 것입니다. 우리 기도의 대부분도 늘 올리는 기도지만 특별하게 마음을 실어 아뢰는 때도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랄 때, 내 마음의 소원을 아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내가 원하는 것의 나열이고, 내 염원을 담은 것에 불과한 것처럼 들려도 기도자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단순한 기도를 올리고, 어떤 이는 긴 시간 많은 말로 된 기도를 올립니다. 평소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 기도의 밑바탕이 되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는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가 그의 기도를 이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기적 같은 일, 놀라운 일을 일으키시는 분이라고 믿으면 기적과 이적을 구하는 기도가 나옵니다. 밤새 아팠던 사람이 올리는 아침 기도는 고통이 물러 가는 기도일 것입니다. 취직 인터뷰에 가는 사람의 기도는 지혜와 형통을 구하는 기도일 것입니다.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가 좀 더 무거운 이들이 있습니다. 남보다 더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향력의 범위가 사람마다, 시기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보는 인물은 대부분이 지도자들입니다. 자기 한 사람으로 그치는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입니다. 지도자의 기도는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그의 결정이 공동체를 바꿉니다. 평소에 하나님의 뜻을 찾고 분별하며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은 기도도 그렇게 합니다. 이사야서를 읽는 내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은 이미 정해졌다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왜 하느냐고, 제사(예배)는 무슨 소용이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물음에 나는 답 대신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받아 들이고 싶은지 묻고 싶습니다. 예스라면, 하나님을 알고 싶다는 뜻입니다. 알고 싶다면 기도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자유의지’가 카드라면 하나님을 아는 일에 쓰는게 가장 크게 쓰는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건 그분을 알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분의 뜻에 맞추려는 노력은 함께 걷는 이와 보폭을 맞추는 일과 같을 것입니다. 그분의 뜻을 받아 들이려고 애쓸 때 따라오는 갈등과 고민은 거름 역할을 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주의 사랑으로 어두움을 걷어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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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세상에 모든 적은 일부터 크나큰 사건까지 주님께서 주관하시는것을 믿고 의지하면서도 모르는사이에 보이는 권력과 재력과 back ground에 의존하는 비천한 존재입니다. 천지개벽이 일어나고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도 모든것이 주님의 섭리안에 속한것을 깨닫고 오직 새나라와 새땅을 기리며 소망의 삶을 살아내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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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41102 이사야 30장

    “이집트 사람은 사람일 뿐이요, 하나님이 아니며, 그들의 군마 또한 고기덩이일 뿐이요, 영이 아니다. 주님께서 손을 들고 치시면, 돕던 자가 넘어지고, 도움을 받던 자도 쓰러져서, 모두 함께 멸망하고 말 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자가 으르렁거릴 때에, 힘센 사자가 먹이를 잡고 으르렁거릴 때에, 목동들이 떼지어 몰려와서 소리친다고 그 사자가 놀라느냐? 목동들이 몰려와서 고함 친다고 그 사자가 먹이를 버리고 도망가느냐? 그렇듯, 만군의 주님께서도 그렇게 시온산과 언덕들을 보호하신다.
    새가 날개를 펴고 둥지의 새끼를 보호하듯이, 만군의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하신다. 감싸주고 건져주며, 다치지 않게 뛰어넘어서, 그 도성을 살리신다.” (사30:3-5)

    이스라엘은 바로 옆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에게 도움을 줄만한 나라들을 물색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이 되어줄거라 생각한 이집트나 앗시리아 조차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서 심판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을 떠나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반응은 ‘두려움과 불안’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벗을 몸을 보고, 부끄러워 숨듯이 피할 곳을 찾는다. 그리고 “아담아 어디있느냐?”라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두려움으로 반응하며 더 깊은 곳으로 숨으려 한다.
    하나님을 떠나면 죄를 짓게 되고, 그 죄로인해 두려움과 불안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가려줄만한 옷을 찾는다. 급하게 나뭇잎을 떼어내서 두르고 두른다. 그러나 나의 모습이 고작 나뭇잎들로 가려지겠는가? 얼추 겉모습은 숨길 수 있을지 모르나 나의 내면 깊숙이 머물러 있는 수치와 두려움은 그 어떤 것도 감춰줄 수 없다. 그 때 하나님은 짐승을 죽여 그의 가죽으로 가죽옷을 아담과 하와에게 입히셨다. 죄로 인한 나의 두려움과 수치는 누군가가 희생될 때, 비로소 가리워지는 것이다. 창세기에서는 짐승을 죽여 그의 가죽으로 아담과 하와를 입히셨는데, 이 장면을 보면서 직접 자신이 제물이 되어 우리에게 생명의 옷을 입히신 예수님이 생각났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희생시키셔서 그 피로인해 진정한 구원의 옷을 우리에게 입히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의지했던 이집트를 사람들을 보고 그들은 그저 사람일 뿐이요 하나님은 아니며, 그들의 군마또한 고기일 뿐이요, 영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즉, 내가 의지할 유일한 길로 보여지는 그것들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우리의 도움이 되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시다. 아무리 강성해보이고 뛰어나 보여도 그저 유한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완전한 가치라 여겨지는 세상의 재물, 사람, 명예, 건강 조차도 그저 고기일 뿐이다. 영이 아닌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인간의 삼라만상은 결국 유한한 인간에 의해 한계가 있음을 보게 되었다. 내가 의지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아니면 결국 썩어없어질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 어떤 위협이 와도 힘센 사자가 먹이를 지키기 위해 으르렁 거리듯이 우리를 강한팔로 지키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새가 날개를 펴고 둥지의 새끼를 보호하듯이, 감싸주고 건져주며, 다치지 않게 뛰어넘어서 살리시는 분이시다.

    내 안에 순간순간 찾아오는 불안감과 두려움들을 해결하기 위해 현실적인 방법들을 찾기 전에, 가장 현실적이시며,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 주님은 강하신 분이시다. 주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주님은 나의 필요를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시며, 나의 환난의 때에 도움이 되신다. 그리고 가장 완전하고, 가장 완벽한 손길로 나를 이끄시는 분이시다.

    미국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땅의 불안함들과 두려움을 본다. 무언가 강한 팔이 이 땅을 이끌고 지켜주기를 고대하는 사람들의 간절함들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이 이 땅의 소망이며, 유일한 생명이심을 기억하자. 그리고 미국인들이 유한한 것을 의지하며, 자신의 수치와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만을 의지하도록 기도하자.

    예수 열방의 소망 예수 우리의 위로자
    주는 온 땅의 영원한 소망
    예수 어둠 속의 빛 예수 변함없는 진리
    주는 온 땅에 빛이 되시네
    우리 위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생명의 주
    주님만이 소망이요 변함없는 반석이라
    주님만이 온 세상을 비추시네
    또 죽음에서 부활하신 우리 구주 평강의 왕
    주를 믿는 모든 자의 소망되신 주를 믿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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