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29장: 마음과 입술과 손발

해설:

1절부터 8절까지는 예루살렘이 당할 재앙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예언이다. “아리엘”(1절)은 “하나님의 사자”라는 뜻인데 성전의 번제단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이 유다 백성에게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유일한 장소인 성전의 제단 때문이다. 이사야는, 앗시리아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할 것을 예언한다(2절). “너의 사면을 둘러 진을 치며, 너를 삥 둘러서 탑들을 세우고, 흙더미를 쌓아 올려 너의 성을 치겠다”(3절)는 표현은 앗시리아와 바빌론 그리고 로마가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킬 때 사용했던 공성전을 묘사한다. 그 때가 되면 예루살렘은 완전히 무력화 될 것이다(4절). 

하지만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영영 버리지 않으신다. 때가 되면 그분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민족을 흩으시고 회복시키실 것이다(5-6절). 어느 나라든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점령하려는 모든 시도는 허무하게 끝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지키실 것이기 때문이다(7-8절). 

9절부터 16절까지에서 이사야는 예루살렘과 유다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영적으로 둔감해진 것이다. “예언자”와 “선견자”(10절)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그들은 듣지 않으려 한다. 마음이 완악해져 있다는 점에서는 유식한 사람이든 무식한 사람이든 차이가 없다(11-12절).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고, 입술로는 나를 영화롭게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나를 멀리하고 있다”(13절)고 탄식하신다. 그들은 스스로 눈을 질끈 감고 심판을 불러 들이고 있다(14-16절).

17절부터 24절까지는 심판 후에 하나님께서 베푸실 은혜에 대한 예언이다. 레바논의 밀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는 것(17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전능자 하나님께는 아무 일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전능하신 분이기에 그분이 구원의 팔을 펴시는 날이 오면 유다 백성의 굳은 마음은 여려지고 멀었던 눈은 열릴 것이며 닫혔던 귀가 듣게 될 것이다.  

묵상:

유다 백성의 문제는 그들의 신앙 행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신앙 행위를 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같아 보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사에 쏟는 그들의 정성을 보아도 그렇고, 율법을 향한 그들의 열심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혹은 과시적으로 종교 행위에 열성을 다했고, 주워 들은 이야기로 자신의 경건성을 과시했습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리고 성전을 떠나자 마자 입에 거짓을 담고 손에 피를 묻힙니다. 그 영적 타락은 심판이 아니고는 고쳐지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예루살렘을 심판에 붙이겠다고 예언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는 더 엄한 기준으로 판단하시고 징계하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예루살렘을 영영 버리지는 않으십니다. 7절과 8절의 예언에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배후에 계셔서 끝내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전해 줍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 있는 예루살렘이 때로 징계도 받고 재앙도 겪겠지만 결국 회복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날이 오면 예루살렘은 다시금 마음과 행위가 일치된 온전한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23절) 할 것입니다.  

믿음은 마음에서 시작하여 입술로 고백되고 손과 발을 통해 표현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떠나 있는 종교 행위는 위선이요, 손과 발로 표현되지 않는 믿음은 가식입니다. 그런 종교 행위는 하나님에게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나의 반석이시요 구원자이신 주님,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생각이 언제나 주님 마음에 들기 바랍니다”(시 19:14)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이사야서 29장: 마음과 입술과 손발”

  1. 항상 깨어있어 몸과 마음과 언행과 삶이 주님을 향해 조율되기를 원합니다. 주님과 항상 동행하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되고 입술에서 주님의 이름과 사랑이 드러나고 주님이 뜻이 저희들을 통해 이뤄지기를 기도합니다. 언젠가 주님앞에서 샘을할때 잘했다고 칭찬받는 사귐의 소리 모두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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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ung mae kim

    시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하고 시작하는 노래가 있어 오늘은 왠지 더 특별한 날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미국에 사는 사람들에겐 할로윈데이라서 명절 분위기가 나는 날입니다. 아이들은 할로윈 복장을 하고 동네를 걸어 다니며 사탕을 받아 모으는 재미에 벌써 몇 주 전부터 기대감에 들뜨기도 하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안전 의식이 강화 되면서 할로윈데이 풍경도 달라졌습니다. 가게를 하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라티노 문화 중에 죽은 이들을 기리는 날 (망자의 날 – the day of the dead, dia de los muertos)이 있습니다. 중남미권에서는 대개 11월 1일과 2일에 지킨다는데 그 해에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날입니다. 태투 문양 중에서 라티노들이 특히 좋아하는 것이 해골 skull 디자인인데 망자를 기리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옷이나 가방, 모자, 신발, 장신구 등에 해골이 그려져 있는데 섬뜩한 느낌을 주는 경우는 드물고 화려한 색과 디자인을 써서 나름 예쁘고 독특하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디자인이 예뻐서일 수도 있고 하도 많이 봐서 내 눈이 적응이 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죽은 이를 기리는 예식과 전통은 보편적인 일입니다. 생명에 시작과 끝이 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죽은 이를 애도하고 기념하는 일을 통해 살아 있음을 확인합니다. ‘죽음과 함께,’ 죽음 옆에서 나란히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는 뜻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외면하거나 부인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죽음에서 건지셨다, 죽음을 이기셨다, 영원히 산다, 죽으면 천당에 간다…등의 고백들이 죽음을 애써 부인하는 걸로 생각했었습니다. 죽음을 생각할 시간이 있으면 사는 일을 한 번 더 생각하라, 더 잘 살 생각을 해야지 죽는 일은 뭐하러 생각하냐, 이런 말을 듣기도 했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죽음과 삶이 서로를 보여주는 거울, 쌍동이, 친구 같은 관계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권리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맞이할 지 미리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삶에 대해서는 여러 길과 선택지가 있습니다. 나의 삶을 주님께 드린다는 결단은 죽음에 대해 무력한 것처럼 삶 앞에서도 자진해서 무력해지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열심히 성실히 사는 것을 포기하고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조건으로 (음식으로 치면 식재료?)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되 ‘최선’이라는 기준을 내가 정하지 않는다는 결심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왜냐면 내가 정하는 최선은 너무나 자주 세상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13절에서 주님은 우리가 입으로는 주를 존경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은 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날이 오면 무자비한 사람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악한 일을 즐겨하는 사람도 사라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최고의 자리, 최선의 중심에 놓고 살다가 이게 아니구나, 나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하는 지각이 생기는 것을 ‘그 날’이라고 이해해도 되겠지요. 배고픈 사람이 꿈 속에서 무엇을 먹어도 깨어나면 여전히 배가 고프다는 8절이나, 깊은 잠에 빠지고 눈이 감기어 주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안타까와하는 10-12절의 모습은 이 시대의 우리 모습입니다. 먹기는 많이 먹는데, 공부며 일이며 하기는 많이 하는데 내적인 충만감이 없습니다. 꿈일까요, 지금 여기는. 누가 보겠는가, 누가 알겠는가 (15절)하며 제 멋대로 사는 이 세상은 죽음의 세계일까요. 10월의 마지막 날 오늘, 주님 앞에서는 매일이 마지막 날이요 깨어있지 않으면 나도 망자인 것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새 힘과 새 지식을 얻어 주의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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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41031 이사야29장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고, 입술로는 나를 영화롭게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나를 멀리하고 있다. 그들이 나를 경외한다는 말은, 다만 들은 말을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사29:13)

    “야곱이 자기의 자손 곧 그들 가운데서 내가 친히 만들어 준 그 자손을 볼 때, 그들은 내 이름을 거룩하게 할 것이다.
    ‘야곱의 거룩한 분’을 거룩하게 뱓들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혼미하던 사람이 총명해지고, 거스르던 사람이 교휸을 받을 것이다.”(사29:23-24)

    입술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영화롭게 하지만 마음으로는 멀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을 경외함을 태도와 삶이 아닌 말로만 흉내내는 그들을 하나님은 책망하신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사역자들, 교회에서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들,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들 조차도 입술로만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건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한다.
    이는 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매일 묵상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보며 하나님 경외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어려움을 직면하거나 컨트롤 되지 않는 자녀들을 영육할 때면 어김없이 나의 본성이 드러난다. 화냄과 분냄, 판단과 정죄의 말들이 여전히 내 마음에 들어앉아 하나님 없는 자처럼 살고 있는건 아닌가 돌아본다.

    나의 가장 큰 연약함 중 하나는 아이들을 대할 때이다. 나의 기준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거나 부모말을 듣지 않았을 때, 아이의 인격이 나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고치려고 정죄하는 말들을 하루에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르겠다. 매번 반성하고,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이 문제는 나를 가장 어렵게 한다. 그리고 그 깊은 곳을 들여보면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본다.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은 반드시 삶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일서 3:14-18)

    요한일서 에서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근거가 ‘예수님’께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니, 그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 행함과 진실함의 태도는 오직 예수님을 아는 것. 그리고 그분을 경외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이사야서 29:23-24에서는 야곱의 자손이신 분. 야곱의 계보에 계신 예수그리스도를 간접적으로 언급하며, 그분을 경외할 때, 혼미하던 사람들이 총명해지고, 거스르던 사람이 교훈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나의 생각과 마음이 기준이 되면 불안전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하나님 경외할 때, 비로서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고, 혼미했던 것들이 하나님의 지혜로 분명해진다. 문제의 해답이 보이지 않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해결되지 않은 일을 만났을 때. 반드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이 어둔눈을 밝히시고, 총명함으로 분명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 경외하는 살길 기도한다.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만 바라보며 말과 혀가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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