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12장: 예배가 필요할 때

해설:

12장의 찬송시는 11장의 메시아 예언에 대한 응답이다. “그 날”(1절)은”이새의 줄기에서 난 싹”(11:1)이 자라서 메시아로 통치할 때를 가리킨다. “너”(1절) 혹은 “나”(2절)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한 후에 낯선 땅으로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하다가 시온으로 돌아온 사람을 가리킨다. 이사야는 상상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남은 자들 중 하나가 되어 그 날의 기쁨을 노래한다.  

“주님, 전에는 주님께서 나에게 진노하셨으나”(1절)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심판하신 것을 의미한다. “진노를 거두시고 나를 위로하여 주시니”라는 말은 메시아를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 시키시고 포로 된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신 것을 말한다. 풀무불 같은 심판에서 살아 남은 것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다. 이제 그는 하나님에게만 구원이 있음을 알고 주님만을 의지하겠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경험한 사람은 두려움에서 해방된다. 그래서 그는 “주 하나님은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이시다”(2절)라고 말한다.   

메시아가 다스리는 날이 오면 광야에서 우물을 찾은 것처럼 기쁨에 사고잡힌다(3절). “구원의 우물”이라는 말은 중의적이다. 육신의 갈증은 샘물로 채우지만 인간의 영적 갈증은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으로 채움을 얻는다.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에 눈 뜨는 것은 마치 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얻는 것과 같다. 하나님 안에서 생명수를 맛본 사람은 주님께 찬양을 올리고 그분의 이름을 만민에게 알리고 싶어 한다(4-5절). 

6절에서 이사야는 상상의 세계에서 나와 절망과 두려움 가운데 있던 사람들에게 권고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절망적인 현실 중에도 예배하고 찬양해야 한다. 아니, 그럴 때일수록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소리를 높여서”라는 번역은 강세가 약하다. “부르짖고 외쳐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께서 장차 메시아를 통해 행하실 일들을 상상하면 전심으로 기뻐하고 찬양하게 된다는 뜻이다. ”너희 가운데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참으로 위대하시”기 때문이다.      

묵상:

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이 현실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혹은 이미 패망하여 모든 희망이 사라진 상황에서 장차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을 상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에 근거한 상상입니다. 상상 속에서 그는 포로 생활로부터 회복된 남은 자들 중 하나가 되어 그 날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영원한 왕이 되어 정의와 성실로 다스릴 때, 그는 마치 광야 유랑 중에 우물을 찾은 사람처럼 구원의 생수를 마시며 기뻐할 것입니다. 그는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속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기쁨으로 하나님께 감사 드릴 것이며, 만나는 이들에게 자기의 하나님을 알릴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 찬송시를 통해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구원이 지금 이루어진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소리를 높여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합니다. 지금 그들은 절망적인 현실 가운데 살면서 두려움에 짓눌려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없다”고 탄식하고 있고, 회의감 속에서 “하나님이 계신들 무슨 소용인가?”라고 질문합니다. 이사야는 그들에게, “너희 가운데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참으로 위대하시다”(6절)고 말합니다. 그러니 떨쳐 일어나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 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할 때 마침내 그분이 행하시는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며 그분은 참으로 위대하신 분입니다. 예배와 찬송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을 때 드리는 예배와 찬송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반면, 절망적인 상황에서 드리는 찬송과 예배는 그 현실이 하나님의 부재나 무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행위입니다. 그 예배와 찬송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어둠 속에서 빛을 보게 합니다. 쳐지고 낮아졌던 영혼을 들어 올려 줍니다. 인간이 만든 암울한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밝은 미래를 보게 합니다. 

따라서 낙심되고 절망적인 상황일수록 더욱 예배와 찬송의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메마른 광야에서 구원의 우물을 얻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을 때 혹은 그분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 같을 때, 그 떄가 예배의 때요 찬송의 때입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이사야서 12장: 예배가 필요할 때”

  1. 성도들과 교회를 무시하고 비웃는 세상의 풍조가 점점더 심해저가는 형편입니다, 탐욕과 음란과 거짖과 위선이 new normal이 되어갑니다. 자연재해 전쟁 질병으로 경고하시는 주님을 배척하는 세대입니다, 주님의 심판이 시작되었든지 아니면 곧 심판이 닥칠것같은 느낌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않으니 십자가밑에서 모두 무릎을 꿇기를 간구합니다. 신자로서의 삶이 힘들지라도 새나라와 새땅의 소망을 꼭 붙잡고 감사하며 모든 생각과 언행과 삶이 주님께드리는 예배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오직 살길은 십자가의 길인것을 세상에 알리는 사귐의 소리 가족 모두가 되기를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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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어제는 아침 묵상을 마친 뒤에 들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 덕분에 하루 내내 기쁘고 좋았습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땄다는 뉴스도 예전만큼 감동적이지 않아 나한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노벨상의 위력은 줄어들지 않았는지 문학부분에서 한국 작가가 선정되었다니 얼마나 대단하고 멋진지요. 한강의 소설들을 많이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채식주의자’는 한국에 다녀온 남편이 사다 주어서 읽어 보았습니다. 채식주의가 테마도 아니고, 채식을 하는 주인공이 무슨 주장을 펼치거나 독자를 설득하는 내용을 담은 것도 아니지만 ‘채식주의자’가 드러내는 인생의 양면성 -채식과 육식이 있듯-에 공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용하고 연약해 보이는 주인공의 내면에는 깊고 단단한 상처의 뿌리가 있고, 앙상하게 말라가는 주인공을 염려하고 가족들은 사랑을 폭력으로 표현하는 모순을 드러냅니다. 채식, 수동성, 저항 등을 다루지만 소설에선 피냄새가 납니다. 평화로운 공존을 기대하지만 가해와 응징의 기억이 만든 불화의 사슬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새벽에 이사야서 12장을 읽으니 ‘채식주의자’의 주인공이 찬양한다면 어떤 찬양일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선택하거나 원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는데 그 일을 ‘해결’하는 방법은 더 깊은 아픔과 상처를 남겼습니다. 멸망의 폐허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 찬양의 이유가 되는 것일까요. 붙들려간 땅에서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세상은 여전히 막막하고 불의는 중단되지 않은 현실에서 여호와께서 위대한 일을 행하셨다고 찬양할 수 있을까요. 12장의 찬양은 우리가 영으로 그리고 보는 세상에서 부르는 찬양일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이 찬양을 감당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찬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합니다. 거룩하신 분의 위대한 일은 우리가 염원하는 나라, 도달할 나라, 미래의 새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한강 작가가 인터뷰를 거절하고 있답니다. 축하하는 잔치들을 거절한답니다. 전쟁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상을 받는다고 잔치를 벌이는게 싫은가 봅니다. 우리의 찬양이 진정한 찬양이 되려면 겸손, 절제, 소박함의 가치를 담아 사는 것부터 해야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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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41011 이사야 12장

    <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날 >

    “그 날이 오면, 너는 이렇게 찬송할 것이다.
    “주님, 전에는 주님께서 나에게 진노하셨으나, 이제는 주님의 진노를 거두시고, 나를 위로하여 주시니,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다. 나는 주님을 의지한다. 나에게 두려움 없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이시다.”(사12:1-2)

    “시온의 주민아! 소리를 높여서 노래 하여라. 너희 가운데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참으로 위대하시다,”(사12:6)

    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의 약속을 따라 소망을 노래한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실 때, 절망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그래서 그는 12장 첫 절에서 그 날이 오면,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 고백은 소리를 높여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비록 앞이 보이지 않은 절망의 한복판에 서있더라도, 하나님을 믿으며 의지하는 사람은 소망을 본다. 보는 것이 나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선조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된 것이 아닙니다.(히11:1-3)

    히브리서에 나온 말씀처럼 성경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으로 살았다.
    아브라함은 갈바를 알지 못하나 믿음으로 가야했고, 약속으로 주신 이삭을 바치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았다. 말하지 못한다고 말했던 모세도 믿음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갔다. 수많은 제자들은 고난과 박해를 당했지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며 믿음의 삶을 살았다.
    믿음의 선진들을 통해 믿음의 선택은 상황이 아닌 “예수님”으로 부터 온다는 것을 배운다.

    이사야의 때에 마주하던 상황은 심판과 멸망이었지만, 그는 소망되신 하나님 자체로 인해 감사할 수 있었다. 만족할만한 상황이 있을 때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을 기반으로 바라는 것들이 지금 내 눈 앞에 증거로 있다는 것을 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날’ 은 더 나아질 미래의 ‘그 날’이 아닌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고, 다스리시는 ‘그 날’임을 믿어야 한다. 지금 내 안에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지금 내 안에 ‘그 날’이 이미 왔음을 믿는가? 그러면 바로 지금이 주님을 찬송하고, 감사할 때이다.

    진노중에라도 긍휼을 잃지 않으시는 하나님.
    인자와 자비가 무궁하신 하나님.
    신실하시고 선하신 하나님.
    늘 한결같은 사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바로 지금 이 순간 높이자. 찬양하자. 그리고 찬양의 날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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