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6장: 예언자로 부름 받다

해설:

1절부터 7절까지는 이사야가 예언자로 부름 받는 이야기다. “웃시아 왕이 죽던 해”(1절)는 주전 742년이다. 웃시아 왕은 52년간 유다를 통치 하면서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그런 왕이 죽는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위기에 직면 했다는 뜻이다. 제사장 이사야는 위기에 직면한 나라를 위해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었던 것 같다. 

깊은 기도 중에 그는 환상을 본다. 성전 안에 하나님의 옷자락이 가득 차고 하나님의 보좌 위로는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이 서 있었다(2절). “스랍”은 “태우다”라는 동사에서 나왔다. 천사들이 불에 타는 것 같이 눈부신 모양이어서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 그들은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3절)고 노래한다. 같은 말을 세 번 반복하는 것은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 노랫소리로 인해 성전터가 흔들리고 성전 안에는 연기가 가득 찼다(4절).

이 환상을 보고 이사야는 두려움에 질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5절)라고 탄식한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첫 번째 반응은 자신의 죄성에 대한 자각이다.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전인격적인 부정을 의미한다. 그 때 스랍들 중 하나가 제단에서 타고 있던 숯을 가지고 날아와(6절) 이사야의 입에 대며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7절)라고 선언한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라고 물으신다(8절). 창세기 1장 26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여기서도 일인칭 단수 대명사(“내가”)와 함께 일인칭 복수 대명사(“우리”)를 사용하신다. 그 말을 들은 이사야는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하고 답한다. 

그러자 하나님은 유다 백성에게 전할 말씀을 이사야에게 알려 주신다. 그가 전할 예언은 유다 백성을 깨우쳐 회개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타락은 너무도 심하고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너희가 듣기는 늘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못한다. 너희가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못한다”(9절)고 선포하라는 말은 유다 백성이 그의 예언을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10절)는 말은 이사야가 예언하더라도 유다 백성은 회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라고 하시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진심이 엿보인다. 유다 백성의 죄는 너무도 깊고 심판은 이미 정해져 있지만,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유다 백성이 혹시나 회개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이 말씀에 배어 있다. “걱정이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소망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심판의 예언에 당황한 이사야는 하나님께 “주님! 언제까지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11절)라고 여쭌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유다가 완전히 패망하고 모든 주민이 먼 나라로 끌려갈 때까지 심판을 계속 하겠다고 하신다(11-12절). 하지만 그 심판 후에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그루터기는 남겨 두겠다고 하신다(13절).

묵상:

예언자로 부름 받는 것은 한편으로는 영예로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이사야처럼 민족적인 위기의 시기에 부름 받고 멸망을 향해 가는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의 사명은 더욱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예언자로 부르시면서 유대 백성은 십중팔구 그가 전하는 예언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혹시나 그들이 깨닫고 회개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요, 심판이 임하더라도 그루터기가 될 남은 자들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킬 가능성이 없어 보여도 말씀은 여전히 선포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시면서 이사야서 6장 9절과 10절을 인용하셨습니다(마 13:10-17). 우리 말에서의 ‘비유’는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사용하는 것인데, 히브리어에서 ‘비유’는 ‘수수께끼’라는 뜻입니다. 수수께끼는 단서를 잡으면 너무도 쉬운데,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생각할 수록 더욱 깜깜해집니다. 

“우리 위에 있고 우리 가운데 있고 우리 안에 있는“(엡 4:6) 하나님 나라가 그렇습니다. 마음이 열려 그 나라를 보면 그 신비가 열리고 그 신비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마음이 닫히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든 말들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실 때 항상 비유를 사용하시면서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듣고 볼 눈이 있는 사람은 보아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를 알아 본 제자들에게, “너희의 눈은 지금 보고 있으니 복이 있으며, 너희의 귀는 지금 듣고 있으니 복이 있다”(마 13:16)고 칭찬 하셨습니다. 

이사야 시대나 예수님 시대나 오늘 우리의 시대나 인간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절대 다수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혼자만 살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입술이 부정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말씀하기를 그치지 않으십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 말씀을 알아 듣고 돌이키는 사람들은 절대 소수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말씀의 사람을 일으키시고, 거룩한 사람들을 불러 내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시대의 고통을 짊어지는 거룩한 존재들입니다. 


Comments

2 responses to “이사야서 6장: 예언자로 부름 받다”

  1.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부터 점점 더 멀어저가는 풍조의 세상에서 살고있는 형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매일 매일 더알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토록 엄청난 은혜와 속죄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며 섬기며 살기를 원합니다만 실천이 없고 열매가 없는 가련한 존재입니다. 저희들의 입술을 성령께서 주관하셔서 주님의 이름과 사랑과 은혜와 구원과 부활과 새땅과 새하늘을 친족들과 이웃에 알리는 사귐의 소리 가족 모두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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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이사야서 6장은 13절 밖에 되지 않아도 많이 인용되기 때문인지 친숙하게 읽혀집니다. 우선, 이사야가 성전에서 보는 보좌의 그림들이 친숙합니다. 스랍이라는 천사들과 그들이 날개로 얼굴을 가린 모습 (2절)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회화 작품들로 형상화되어 우리 앞에 펼쳐지고, ‘거룩하시다’를 세 번 부르는 3절에선 우리의 언어로 찬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게 됩니다.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라고 이사야가 스스로를 칭하는 5절도 친숙합니다. 죄와 허물로 가득한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뵙게 되었으니 이제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그의 두려움은 그 구절을 읽는 나의 두려움으로 변합니다. 이어서 스랍이 부집게로 숯을 꺼내 입에 대어 정결케 하는 모습은 상상 속에서 여러번 일어나 실제로 본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만큼 익숙한 그림입니다. 그리고서 이어지는 8절은 음악 소리로 내 마음을 두드립니다. 영어 찬송으로 처음 들었을 때의 감동과 전율이 고스란히 되살아납니다. “I, the lord of sea and sky, I have heard my people cry”라고 시작해 “whom shall I send?” 주님이 물으시고, 우리는 크게 답합니다. “Here I am, Lord. Is it I, Lord? I have heard You calling in the nigh
    I will go, Lord. If You lead me, I will hold Your people in my heart” 사실 이 찬송을 부를 때는 가슴 가득 차오르는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나를 부르신 주님께 내 온 맘을 다해 응답하며 손을 높이 들고 답을 하는겁니다. 주여, 나를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가겠습니다. 나를 쓰소서…오늘 아침에 묵상의 본문으로 이사야서 6장을 읽으면서는 ‘저를 보내십시오(8절)’라는 이사야의 답을 내 입술에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어지는 주의 말씀을 나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사야에게 하시는 말씀은 ‘고집 센 백성’을 그냥 두고 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눈과 귀를 닫고, 마음에 깨달음이 없게 하시겠답니다. 깨닫고 돌아올까봐, 고침을 받을까 도리어 걱정하신답니다. 매정한 말씀이지요. 무서운 계획이지요. 언제까지 그러실거냐고 이사야가 묻습니다. ‘집마다 살아남은 사람이 없고, 땅이 멸망하여 황폐해질 때까지 (11절)’ 라고 답하십니다. 13절에서 그루터기는 남는 것같이 거룩한 자손들이 남아 다시 싹이 틀 것이라고 하시지만 내 마음은 이미 공포에 제압 당했습니다. 도저히 저를 보내소서, here I am Lord 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새벽에 6장을 읽고 랍비 조너던 색스의 사이트에 들어가 글 몇 편을 읽어보았습니다. 마침 오늘은 유대교의 명절인 로쉬하사나가 끝나는 날입니다. 유대 달력으로 새해가 수요일 저녁에 시작했습니다. 랍비 색스가 로쉬하사나 메세지로 쓴 글 중에 ‘부르심’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레위기 1장 1절에서 주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And He called, 또는 God called Moses and spoke to him 으로 레위기는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사람들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책이 레위기입니다. 부르셨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모세에게 말씀하셨다고 해도 충분할텐데 굳이 불러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이사야서 6장에서도 천사들이 서로를 부르며 말한다고 3절에 써있습니다. God called him (me), calling…주님은 나를 왜 부르실까요. 무엇을 하라고 부르실까요. 나는 응답할 수 있을까요. 하겠다고 나설 수 있을까요. 우리의 응답이 과연 선택이고 결정일까요. 이사야는 입술의 더러움이 씻겨졌습니다. 숯으로 허물과 죄가 용서를 받았습니다 (7절). 그 때 주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누구를 보낼까? 저를 보내소서. 구절들이 막힘이 없습니다. 이사야는 부르심에 예스라고 응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언자적인’ 의식, 소명, 삶, 신앙 등은 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사야처럼 특별하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의미 있는 말씀이라면 우리에게까지 전해져야 할 필요가 없을겁니다. 선지자 가문 안에서 읽고 마음에 새기면 될 것입니다. 21세기 미국에서 아침에 성경을 펼쳐 읽고 묵상하는 나에게 이 말씀이 도대체 왜 필요할까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도, 이스라엘과 하마스, 이제는 이란까지… ‘땅이 다 멸망할 때 까지’ 전쟁이 계속될 것 같은 오늘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왜 부르실까요. 무엇을 하라고 부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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