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4장 7-18절: 고난의 동역자

해설:

사도는 마지막으로 몇 가지 개인적인 사안들에 대해 당부한다. 두기고(7절)는 바울의 편지를 골로새 교회에 전해 준 사람이다. 사도는 그에 대해 세 가지 표현(“사랑하는 형제”, “신실한 일꾼”, “함께 종된 사람”)을 사용한다. 그것에 “주님 안에서”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사도는 둘 사이의 우정과 연대가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한다. 사도는 그에게, 골로새 교인들에게 자신의 사정을 직접 전해 주어 그들을 안심시켜 줄 소임을 맡겼다(8절). 

사도는 오네시모를 두기고에 딸려 보낸다(9절). 오네시모는 골로새 출신의 노예로서 감옥에서 바울 사도를 만나 회심한 사람이다. 사도는 오네시모에 대한 편지를 따로 써서 보냈는데, 그것이 빌레몬서다.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사촌 마가 그리고 유스도라 불리는 예수는 바울과 같이 가택 연금 상태에 있다(10-11절). 이 세 사람이 사도에게는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를 시작한 사람인데(1:7), 지금은 감옥을 드나들며 바울을 돕고 있다. 그는 골로새 교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으며,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 교회를 위해서도 수고를 많이 하고 있다(12-13절). 그의 곁에는 의사 누가와 데마도 있었다(14절).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사람이다. 데마는 나중에 사도 곁을 떠났다(딤후 4:10). 

사도는 라오디게아의 교우들에게도 안부를 전한다(15절). 눔바는 자신의 집을 열어 교회 모임 장소로 제공해 준 여성 신도다. 사도는 이 편지를 읽은 다음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어 읽게 하고,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도 가져다가 읽으라고 권한다.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낸 편지는 보존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사도는 아킵보에게, “주님 안에서 받은 직분을 유의하여 완수하라”(17절)는 메시지를 전한다. 빌레몬서에서 사도는 “우리의 사랑하는 동역자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의 전우인 아킵보와 그대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라고 했다. 따라서 빌레몬서에서 아킵보에게 부탁한 일 즉 그의 종 오네시모를 자유인으로 방면하여 다시 자신에게 보내어 동역자로 일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들어 달라는 뜻일 수 있다.

다른 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도는 친필로 문안 인사를 적는 것으로 편지를 마무리 한다(18절). 그는 자신이 갇혀 있음을 기억하라고 권한다. 복음의 사람으로 사는 데에는 필연적으로 고난이 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묵상:

사도는 편지를 마치면서 “내가 갇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18절)라고 씁니다. 앞에서도 그는 자신이 “매인 몸”이라는 사실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3절). 

사도는 여러가지 면에서 자신을 “결박된 몸”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휘어잡혔다고 고백합니다(고후 5:14).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그는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르기에 주저함이 없습니다(롬 1:1). 그는 또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로잡혔다고 말합니다. 그는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고전 9:16)라고 말합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따라 살려다 보니, 그는 “모든 사람의 종”(고전 9:19)이 되었습니다. 그는 한 사람이라도 구원 받는 일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했습니다.

복음 전하는 일에 매인 까닭에 그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사도는 육신 상의 안전을 위해 복음 전하는 일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육신 상의 위험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도가 헌금 전하는 일로 예루살렘으로 가려 할 때, 아가보라는 예언자가 와서, 사도가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해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신도들이 그의 예루살렘 행을 만류하자, 사도는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것뿐만 아니라,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행 21:13)라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일신 상의 안전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했습니다.

사도는 가택 연금 상태에 있는 그의 고난에 함께 참여한 사람들을 하나 하나 이름을 불러 소개합니다.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 예수는 그와 함께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되었습니다. 두기고와 오네시모, 에바브라와 누가와 데마는 감옥을 드나들며 그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1:24)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사도는 “내가 갇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라는 말로써 골로새 교인들에게 자신과 동역자들이 겪고 있는 고난을 기억하고 참여하도록 권면합니다. 복음을 위해 고난을 자초하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골로새서 4장 7-18절: 고난의 동역자”

  1. 애간장을 태우는 사도의 편지입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과 목회자들을 생각하며 간절히 기도하게하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하늘나라를 위해 쓰임받는 일꾼이 되지못하는 비굴한 기회주의자 입니다.다시한번 십자가 밑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영혼구원 사역을 위해 쉬지않고 기도하는 믿음의 용사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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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책을 통해 알게 된 목사님이 계십니다. 엘에이에서 목회 하시는데 책을 여러권 쓰셨습니다. 몇 주 전부터 바울 신학에 관한 클래스를 시작했지만 참가할 형편이 안되어 유튜브에 올라오면 시간 맞을 때 찾아서 듣고 있습니다. 그 목사님의 책이나 강의를 좋아하는 이유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지 않아서 입니다. 성서를 읽으면서 질문들이 생기면 ‘그냥 믿으면’ 된다든가, 너무 알려고 들면 피곤하다는 식으로 치부하지 않고 공부해서 교인들과 같이 나누는 모습이 좋습니다. 나는 할 수 없는 공부를 대신 열심히 해서 알려주니 감사하지요. 그 목사님에 따르면 1970년쯤부터 바울에 대한 신학적 연구가 달라졌다고 합니다. 미국과 독일 중심의 학계를 말하는 것이겠습니다. 16세기에 마틴 루터는 당시 교회의 잘못된 관행이나 성직의 부패 등을 비판했을 뿐 아니라 성경을 번역해 일반인들도 읽을 수 있게 함으로써 교회의 안과 밖을 변화 시키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일으킨 종교개혁은 당시의 과학 연구와 철학적 사상의 변화와 맞물려 계몽주의라는 굵직한 시대 물결을 만들어냈습니다. 기독교의 신학적인 뼈대는 루터가 맞춘 것이라고 해도 될만큼 그의 사상과 신념이 오늘 우리가 받아 들이는 기독교리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바울 신학도 루터가 이해한 것을 기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이후 기독교와 유대 신학자들 사이에서 바울을 연구하는 일이 새롭게 일어나기 시작해 지금은 루터가 연구한 바울 신학과 조금 다른 시각의 바울 해석도 상당 부분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갖는 일반적인 태도는 나의 생각과 감정을 성경의 인물과 사건에 투영하는, 나의 색깔을 그에게 입히는 일이기 쉽습니다. 그의 시대를 상상할 때도 지금의 내가 그의 시대에 들어갔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눈으로 그의 도시를 보고, 나의 언어로 그의 세계를 이해합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아는 것이 그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살았던 시대는 로마 제국의 세계이고 시대였습니다. 당시 ‘사람’은 내가 지금 생각하는 ‘사람’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걸 자주 잊어버립니다. 우리의 할아버지와 증조 할아버지 시대의 세상이나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릅니다. 바울의 신앙과 사상은 우리가 그동안 이해해 왔던 것과 어떤 면에서는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정확한 것이었든 아니었든 나의 믿음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믿음이 지식 만이지 않고, 신학이 신앙과 늘 같이 가는 것 아닌데… 루터의 종교개혁 만큼 대대적인 개혁은 아닐지라도 우리 시대도 회심과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밥 한끼 먹는 일도 이제는 식구들이 같이 모여 먹는 일보다 혼자 일하면서, 혹은 폰을 보면서 먹는 일이 더 많아진 세상입니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없던 세상에 살던 사람을 모든 것이 개인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사는 사람이 이해하려면 에너지를 크게 써야 합니다. 그렇게 에너지를 쓰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일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크고 깊다’는 말이 관용구적인 표현에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상황과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이 나라는 개인의 삶을 인도하실 뿐 아니라 내가 사는 시대도 사랑하시고 이끄시기에 그런 주님을 알아가고 사랑하는 일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자기 옆에 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편지에 적음으로써 자기의 시대를 마킹 marking 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아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지만 메시지를 담은 그의 편지는 이름이 있는 어떤 사람이, 어디에 있는 공동체에 전함으로써 보이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지어지고 있음을 말하는 듯 합니다. 그의 편지가 얼마나 큰 기쁨을 가져왔을까요. 그의 안부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을까요. 바울을 쓰시고 루터를 쓰신 주님께서 이 시대에도 일하신다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주님을 묵상하는 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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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40927 골로새서4:7-9

    <동역자가 된다는 것은…>

    “내가 그를 여러분에게 보내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의 사정을 알고 마음에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골4:8)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바울은 교회들에게 서신으로 권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신 뿐만 아니라 손발이 되어 그의 뜻을 전달하는 동역자들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골로새서 4장에 언급된다.
    두기고와 오네시모.
    이 둘은 ‘사랑하는 형제’, ‘신실한 일꾼’, ‘함께 종된 사람’으로 소개된다. 어떤 사람에게 이런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는 것은 보통의 신뢰관계를 넘어선 깊은 충성과 위탁의 관계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울은 비록 감옥에 갇혀있지만, 글로 대신할 수 없는 실질적인 위로와 권면을 두기고와 오네시모를 통해 전한다.

    지난번부터 쭉 묵상해 온 에베소서나 골로새서를 보면 교회에 전하는 편지이기 때문에 ‘신앙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그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 안에서 동역하며 몸을 세워나가는 것이 공동체임을 배웠다.
    교회는 머리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분을 구주로 영접한 구원받은 백성들이 모인 곳이다. 그러나 여러가지 사정들로 인해 때론 의견충돌이 생기기도 하고, 다투기도 한다. 이 과정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교회가 서로를 이간질하고, 상처주며, 세상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반응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결국 공동체는 와해되고, 어떤 이들은 씻을 수 없는 상처로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교회는 세상과 다를바 없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다 결국 무너지게 된다.
    바울이 감옥에서도 초대교회 교인들에 대해 잊지 않고, 기도하며 권면을 이어간 이유는 어떤 공동체이든 어려움이 올 때 홀로 서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 아니였을까?
    더불어 바울 역시 매일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았디면 감옥에 갇힌 처한 상황에 매몰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교회들에게 권면할 뿐만 아니라 그의 사정을 알리고, 서로 위로가 되어주고 기도하는 동역자의 관계로 깊이 들어갈 것을 소망했다. 두기고와 오네시모는 그런 바울과 골로새교인들을 연결하는 동역자이지, 형제였다.

    한국에서 낯선 미국에 온 것이 쉬운 일은 아니였다. 와서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지금도 그 과정을 지나는 중이다. 미국에 와서 몸도 마음도 가장 힘들었던 그 시기에 나를 버틸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은 바로 한국에서 함께 예배한 엄마들의 모임 공동체였다. 비록 몸은 멀리 있지만, 줌을 통해 매일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보고, 서로를 위로하고 기도하며 세워가는 공동체. 물리적 거리는 있지만 이 공동체와 미국에서도 계속 소통 하며 힘을 내게 되었다.
    나를 살펴봐주고, 진심으로 기도해주는 동역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인지…그것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생명의 줄이라는 것을 타국에 와서야 나는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사정을 알고, 마음의 위로를 받게 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알리고 연결해주는 사람.
    비록 육신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하나님은 이 모든것을 선하게 사용하셔서 영적인 교통과 연합으로 교회를 이루어가신다.

    공동체에게 나의 사정을 알릴 때 깊은 위로가 있었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의 사정을 듣고, 깊이 위로하는 사람으로 있어주는 진실되고 충성된 동역자가 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속한 교회에도 이런 동역자들이 세워지길 기도한다.

    #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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