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2장 6-15절: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신 그리스도

해설: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에 대한 권면을 이어간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였다(6절). 당시에 로마 제국에서 “주님”(‘퀴리오스‘)이라는 칭호로 불릴 사람은 황제 뿐이었다. 로마 황제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은 그의 질서를 따라 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은 그분의 질서를 따라 산다. 그래서 사도는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라고 부연한다. 앞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믿음은 마음의 문제인 동시에 행동의 문제다. 마음의 고백은 삶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사는 것에 대해 사도는 나무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서”(7절)라는 표현을 통해 사도는, 신앙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사귐의 관계 안에서 성장해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뿌리를 박는” 것은 “가르침을 받는” 것이고, “세우심을 입는” 것은 “믿음을 굳게 하는” 것이다. 믿음이 자라면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된다.

8절에서 사도는 4절에서 한 경고를 반복한다.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는 당시 골로새에 유행하고 있던 여러가지 철학과 종교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인데,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는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믿는 이들은 그런 것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는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9절) 머물고 계시기 때문이다. “몸이 되어 머물다”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일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골로새 교인들은 이미 그것을 경험해 왔다(10절).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할례”(11절)를 받음으로 인해 이 일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들이 받은 할례는 살점의 일부를 잘라내는 할례가 아니라 “육신의 몸” 전체를 잘라내는 할례다. 그 할례는 세례 중에 이루어졌다. 세례를 위해 물 속에 들어갈 때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는 것이며, 물에서 나올 때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것이다(12절). 세례를 받기 전에 그들은 영원히 죽은 사람들이었으나, 세례를 받은 후에는 죄 용서를 받고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13절).

믿는 이들이 받은 죄 용서를 설명하기 위해 사도는 빚문서를 비유로 사용한다(14절). 유대인들의 사고 방식에 따르면, 죄 짓는 것은 하나님께 빚을 지는 것이다.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마 18:21-35)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진 우리의 빚이 너무 많아서 우리로서는 갚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그 빚 문서를 십자가에 못박으셔서 없애 버리셨다.

사도는 또한 로마 군대의 개선 행렬을 비유로 사용하여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설명한다(15절). 로마 군대가 정복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면 맨 뒤에 무장 해제된 포로들을 결박하여 끌고 왔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해결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참되고 영원한 승리를 거두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구경거리가 되었지만, 실은 그 사건을 통해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이 구경거리가 되었다.

묵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난 구원 사건들(죄 용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 회복, 거듭 남, 성령의 내주와 감화, 거룩한 삶에 있어서의 성장)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고도 남습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사도가 “모든”이라는 단어와“충만”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이유는 예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철학이나 종교로써 보완해야 할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부족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교묘한 속임수”(4절) 혹은 “헛된 속임수”(8절)에 넘어가 악한 영의 “노획물”이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일상 생활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점쟁이나 무속인을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상 생활의 문제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죄 사함과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지만, 현실 생활의 문제들은 무속인들을 통해 해결 받고 싶어합니다.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십니다”(9절)라고 말합니다.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일상 생활에 구체적으로 관여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일상의 일들에 대해서도 그리스도 예수를 의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받는”(7절) 일에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꾸준히 받아서 믿음이 굳세어지면 그분의 인도하시는 손길을 늘 경험하게 됩니다. 일상 생활 가운데 그분이 인도하시는 구체적인 손길을 경험합니다. 그것을 경험할 때면 감사의 마음이 넘칩니다. 자신이 그분의 다스림 안에 살고 있으며, 그분의 섭리하시는 손길 아래에 있음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주술사와 무속인을 찾는 이유는 불안감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든든히 뿌리를 둔 사람은 그런 불안감과 두려움에 휘둘려 악한 영의 제단 앞에 찾아가 머리 숙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는 이들이 범할 수 있는 최악의 수치입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골로새서 2장 6-15절: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신 그리스도”

  1. 말씀이 육신이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땅끝까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항상 기억하고 살기를 원합니다. 성자 예수님을 나와 모든 믿음의 공동체 (가정과 교회) 의 주인이시고 구세주라고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을 하면서도 자주 너머지는 연약한 신세입니다,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를 지날갈때에도 내가 주님안에 주님이 내안에 함께 하신것을 꼭 붙잡고 감사하며 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보혈로 사신 믿음의 공동체가 흔들릴지라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만 의지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신실하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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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7절을 읽는데 마음이 평화의 빛으로 환해지는 것 같습니다. 쉬운성경은 7절이 이렇습니다. “그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 위에 여러분의 삶을 계획하시길 바랍니다.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늘 감사한 생활을 하십시오.” 바울 사도는 십자가의 법칙이 ‘가르침’이니 그것을 믿고 실천하며 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법칙은 용서와 새로와짐과 승리의 순환주기입니다. 의미 없는 반복이 아니라 깨달음과 실천이 넓이와 깊이 면에서 성장하여 전진하는 반복입니다. 성숙과 성화의 길입니다. 7절 바로 다음엔 ‘헛된 말과 거짓 철학에 속아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경고도 나옵니다. 사람의 생각에서 나왔기에 아무 가치도 없고,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므로 멀리하라는 주의도 줍니다. 나의 짧은 생각엔 이 구절이 ‘무식한’ 크리스찬을 만들어내는데 동원되는 것 같습니다. ‘무식’하다는 말은 상대방을 모욕하려는 의도로 쓸 때도 있지만 내가 ‘무식한 크리스찬’이라고 하는거는 학교를 어디까지 다녔냐, 공부를 얼마나 잘했냐 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거나, 알아보려 하지 않는 게으른 상태를 뜻합니다. ‘철학’ ‘시사’ ‘문화’ ‘역사’ 이런 단어를 멀리하는 크리스찬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온대로만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화론이라는 단어에도 경기를 일으킵니다. 세상의 이치를 따져보고 연구하는 일을 학자처럼 하지는 못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자기 이상의 권위자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이해하고 성찰하는 일이 헛되거나 무익한 일일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신문에서 어느 정신과의사가 동양철학인 ‘주역’을 따로 공부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점치는 사람들도 주역을 논한다니 주역을 학문으로 봐야할지 사이비 학문으로 치부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그 의사가 말한 것 중에 눈에 확 들어오는게 있었습니다. 주역에서 말하는 괘 (여기서 점괘가 연상되는걸 보면 주역의 쓰임새가 앞날을 점치는 데 사용되는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중에 ‘기제’와 ‘미제’가 있답니다. 기제는 모든 것이 해결됐다는 것이고, 미제는 정반대로 해결되지 않는다 (영구미제 사건 같은)는 괘입니다. 기제의 괘가 있고 그 다음 괘가 미제랍니다. 의사의 해석은 우리 인생은 해결 (기제)되면 그것은 새로운 시작 (미제)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예를 든게 출산과 양육입니다. 아기가 달이 차서 태어나면 해결이 되었지만 그 때부터 미제의 양육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생이 이런데 우리는 (현대인은) 자신의 인생은 기제이기를 바랍니다. 불안에서 벗어나려면 인생은 미제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요즘에 유튜브에서 어느 목사님의 상담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본인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나 능력, 반전, 기도의 응답’ 이런 것이 없었다는 걸 나누면서 현재 삶의 어려움과 싸우는 이들을 위로하는데, 목사님이 끝에 이런 말을 합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 신학자의 책에 나오는 말이랍니다. “답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 그것이 신자의 삶,” “답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보다 신자에게 더 영광스러운 삶은 없다.” 나는 내 삶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경험하고 내면화한 일들, 그 안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은혜 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주님의 십자가의 법칙은, 나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주십니다. 각자 필요한 곳에,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양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감을 할 수 있고 격려할 수 있고 같이 웃고 울 수 있습니다. 은혜의 풍성함입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하나로 만듭니다. 주님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감사하며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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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40916 골로새서 2:6-15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그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을 굳게 하여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골2:6-7)

    에베소서도 그렇지만, 골로새서에서도 사도바울은 성도들을 향해 ‘굳건한 믿음’을 지키는 것을 자주 언급한다. 이방종교와 혼합주의로 물든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굳건한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교회에 나가지만 생각과 사고는 여전히 세상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보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하나님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믿지 않는자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는 말로 비하할 때면, 마음 아프다. 하지만 이를 뼈 아프게 받아들이고, 나에게 그런 모습을 없었는지 점검하며 회개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이것이 그리스도안에서 굳건한 믿음을 지키는 새로운 전환점이 되게 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아들였으면, 그분 안에서 ‘살아가’라고 권면한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가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교회 모임을 하거나 묵상을 할 때, 예배를 하거나 구제를 할 때 등등 뭔가 영적인 활동이나 선한 행동을 할 때만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에서 살아가는 것. 삶 자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삶이다.
    모든 삶에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나도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결정적인 터닝포인트가 인생에서 두번 있었지만, 삶에서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는데까지는 꽤 오랜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YWAM이나 교회에서 사역을 했을 때, 나는 내가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매일 말씀을 준비하고, 찬양인도를 준비하며, 예배하고 학생들을 만나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보냈으니 그 모습이 나인 줄 알았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 셋을 낳아 육아를 하며 철저하게 엄마로 살아간 나의 30대는 그저 내 몸이 힘들면 불평이 나오고, 남편에게 원망하며, 아이들에게 온갖 짜증을 퍼붓는 본능으로 반응하는 한 인간에 불과했다. 사역으로 인해 하나님을 만나왔지만, 내 개인적은 신앙은 사역이 없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는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었고, 힘들면 그럴 수 있다고 스스로 합리화 시키며 살았던 시간들. 그렇게 나의 교만과 잘못된 자기 방어는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들었다.

    30대를 그렇게 하나님과의 소통없이 지나고, 40대에 한 공동체를 만나면서 나의 견고했던 마음은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고 난 후 부터였다.
    예수님을 믿었고, 그렇게 예수님과 사는 줄 알았던 나는 30대의 곤고한 시간을 지나면서 하나님 은혜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영적인 무감각과 침체, 그리고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는 여전히 내가 살아서 예수님이 오시지 못하게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 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2:20)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는 것이 유일하게 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제 옛 것을 버리고, 새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에 내가 죽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나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사는 것이고, 그래서 이전의 나는 죽은 것이다. 여전히 내 자아가 살아 움직이고, 왕노릇 한다면 그것은 십자가에서 내가 온전히 죽지 않은 까닭이다.
    나는 매일 갈라디아서 2:20말씀을 묵상한다. 하루에도 수십번 되뇌이고, 읖조린다. 내 안에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가 사시도록 나의 마음을 깨뜨리며 나아간다. 그리고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바로 이 순간 나의 생각과 마음, 언행을 사로잡아 주시도록 은혜를 구한다. 기도를 할 수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어디에서든 성령님께 나아가 은혜를 구하면, 그분은 내 마음의 어둠의 한복판에서 빛을 비춰주신다.
    매일매일 연습해야 한다. 매순간 그렇게 성령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도록 하는 과정이 계속되면, 내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일, 기도하는 것, 또 예배하는 삶을 쉬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그분 안에 깊게 뿌리를 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소리로 부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한걸음 한걸음 발의 등불이 되시는 하나님을 쫒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생명되신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도록 나의 보좌를 주님께 내어드릴 때 비로소 그 분 안에 깊게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서, 가르침을 받은대로 믿음을 굳건히 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된다.
    비록 여러 갈등과 어려움으로 넘어질 때가 있지만, 절망하지 않을 이유는 하나님이 이미 이 일을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삶에 여정을 도우실 뿐만 아니라 함께 살기 원하시는 나의 구주되신 예수님. 오늘도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고, 내 안에 나즈막히 사랑한다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살 수 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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