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2장 1-5절: 사랑으로 묶인 공동체

해설:

헬라어 원문에서 1절은 “나는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뒤에 이어지는 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들이 알기 바라는 것은, 자신이 모든 믿는 사람들을 위해 전심으로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라오디게아는 골로새에 인접한 도시다. 사도는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편지를 썼다(4:1). 라오디게아에 보낸 편지는 보존되지 못했다. “그밖에 내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은 바울에게 직접 전도 받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1장 28절에서 사도는 “모든 사람”이라는 말을 세번이나 반복하면서 자신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힘쓰고 있다고 했다. 그가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에 방문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선교 전략 상 그는 주요 거점 도시들만을 방문했지만, 그의 관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었다.

사도가 이렇게 말한 까닭은 그들이 마음에 위로를 받고 사랑으로 하나가 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2절). 믿음의 식구들이 하나로 연합할 때,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충만한 확신에 이를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게 된다. 그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3절) 있다. 

“감추어져 있는”에 해당하는 형용사 ‘아프크리포스’는 “계시”라는 명사와 뿌리가 같다. 감추어져 있는 것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 드러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사도는 앞에서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를 빕니다”(1:9)라고 기도했다. 

이어서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이 “교묘한 말”(4절)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를 바란다고 전한다. 골로새 안에 수 많은 종교와 철학이 유통되고 있었고 골로새 교인들이 과거에 그런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경고한 것인지 모른다. 사도는 자신이 육체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는 그들과 함께 있음을 강조한다(5절). 그는 그들이 “질서 있게 살아가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의 믿음이 굳건한 것”을 보고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질서 있는 삶”은 당시 스토아 학파에서 강조하던 덕목이다. 복음은 모든 윤리와 철학을 아우르며 뛰어 넘는다. 

묵상:

바울 사도는 영적 성장 과정에 있어서 믿음의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거듭 강조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각개 전투”가 아닙니다. 온전한 믿음은 “사랑으로 결속되어”(2절) 한 몸을 이루게 하며, 한 몸을 이루어 살아가야만 그 믿음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는 너무도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평생토록 그분을 탐구해도 지극히 작은 부분만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 없이 홀로 믿고 사는 것을 비유하자면, 큰 그림의 퍼즐 조각 몇 장을 들고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믿음은 아주 쉽게 오도 될 수 있습니다. “자기만의 종교” 혹은 “내가복음”의 독선에 빠집니다. 공동체로 함께 모여 각자가 가지고 있는 퍼즐 조각들을 펼쳐 놓고 그리스도의 비밀을 찾아가야만 안전합니다. 그래야만 “지혜와 지식”에 있어서 성장하게 되고, 그럴 때 “교묘한 말”에 속아넘어가지 않습니다.

믿음의 식구들이 “사랑으로 결속되어” 살아가는 것은 때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결속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숨비바조‘는 “힘으로 묶다”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자발적인 결사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묶으신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기호에 따라 취사선택할 대상이 아닙니다. 묶으신 하나님께서 풀기까지는 그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것은 때로 일어날 수 있는 시험과 환난을 견뎌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 데 묶인 사람들의 성격과 취향이 다르고 믿음의 수준도 다르기 때문에 믿음의 공동체 안에는 언제나 갈등과 마찰과 분열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자신을 묶으신 분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갈등과 마찰과 분열을 품고 초월할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믿음의 식구들을 통해 깨어지고 빚어져서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믿음의 공동체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피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언제나 그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될 것입니다. 


Comments

2 responses to “골로새서 2장 1-5절: 사랑으로 묶인 공동체”

  1. 허락하신 믿음의 공동체인 가정과 교회의 식구들의 생각과 믿음의 색갈이 조금씩 다르더라도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며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비록 꺼꾸러운 일이 있어도 지적하고 심판하지않고 서로 사랑하고 품어주고 인내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가정과 교회를 허락하신 구원의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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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ung mae kim

    바울 사도는 에베소 공동체에 보낸 편지에서도 풍성한 은혜 (은혜의 풍성함) 안에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려고 ‘계획’하시고, 그 뜻의 ‘비밀’을 알리시고,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라고 했고, 골로새 공동체에게도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달아 알기를 원한다고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이요 신비이신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감추어져 있다는 뜻은 아무 수고 없이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그리스도를 품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리스도라는 나무의 열매가 내 입안에 거저 툭 떨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내려 주셨지만 배고픈 사람이 나가서 주워야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일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의 편지는 공동체가 모여서 같이 듣고 마음에 새겼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공동체로 모여서 살았습니다. 해설에서 읽듯 기독교 신앙은 각개 전투, 각자도생의 모양새가 아닌겁니다. 싫으나 좋으나, 미우나 고우나 옆사람이 있는 생활입니다. 오늘 아침에 교회에서 회의가 있어서 새벽기도에 나갔습니다. 토요일 새벽이니 길에 차가 별로 없었습니다. 사는 동네가 도심이라 프리웨이 (캘리포니아에선 고속도로를 프리웨이라고 부릅니다) 접근이 쉽고, 주요 프리웨이와 연결해주는 간선도로들도 많습니다. 오늘 새벽엔 로컬 길을 운전할 때와 프리웨이 운전할 때가 전혀 다르다는걸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로컬 길을 운전할 때는 간판, 포스터, 가로수, 남의 집 정원 등등 눈에 들어오는게 많습니다. 특히 새벽처럼 앞뒤로 다른 차량이 없을 땐 운전 속도를 조절할 수 있으니 보려고 하면 다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전방주시를 하면서 조심해야 하는건 기본이지만, 로컬 길과 프리웨이는 전혀 달라서 나의 운전 스타일도 달라집니다. 프리웨이를 타면 ‘단체’에 들어간 것 처럼 운전을 하게 됩니다. 개인 운전이 아니라 단체 운전입니다. 운전 속도부터 로컬 운전보다 훨씬 빠릅니다. 다른 차량들과 속도를 맞춰야 합니다. 전방주시 외엔 볼 것이 없습니다. 도로 표지판 외에는 빌보드나 고속도로 주변의 빌딩들 밖에 볼 게 없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두 가지 뿐입니다. 차선을 바꾸는 것과 어느 출구 exit 로 나가는가 두 가지 뿐입니다. 초보 운전일 때는 고속도로를 타기가 무서웠습니다. 운전이 서툴러서 버벅이는데 로컬이라면 가다가 어디에 차를 세우고 숨을 돌릴 수라도 있지만, 프리웨이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단체’와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실력이 안되면 완전 민폐가 됩니다. 미국 여선교회 모임에서 어떤 이가 자기는 웬만하면 로컬 길로 다닌다고, 로컬로 다니면 시간은 엄청 쓰지만 동네 neighborhood 를 알게 되는게 소득이라는말을 했습니다. 로컬로 다녀야 동네 어느 코너에 홈리스가 있는지도 알고, 커뮤니티에서 일어나는 일을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어느 길로 가는지가 선호의 문제 만은 아니겠지만, 로컬 길 운전할 땐 주변을 조금 더 ‘보게’ 되었습니다. 공동체와 개인은 삶의 여러 부분이 그러하듯 작용과 반작용 법칙을 따릅니다. 밀고 당기고, 올라 갔다 내려 오고, 잘 되었다 또 막히고, 미웠다 화해하고, 전진하다 후퇴하고…공동체가 작용을 하면 개인이 반작용을 하고, 개인이 작용을 하면 공동체가 반작용을 하면서 긴장과 조화를 만들어 갑니다. 개인으로, 공동체의 한사람으로 성숙해 지는 노력을 계속하기를 기도합니다. 허락하신 지혜와 총명을 ‘보려고’ 애쓰는 정도는 해야할 것 같습니다. 만나를 ‘줍는’ 노력, 나무의 열매를 ‘따는’ 부지런함은 나의 몫인 것 같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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