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장 12-18절: 구원을 써 먹으라

해설:

12절에서 사도는 다시 권면으로 돌아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으니, 믿는 이들도 순종해야 한다. 사도는, 자신이 빌립보 교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던 것처럼 자신이 없는 동안에 더욱 깨어 순종하라고 권한다. 

그러기 위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12절)라고 권면한다. “이루어 나가십시오”라는 번역은, 우리의 구원은 완전한 것이 아니어서 우리가 노력하여 완성해야 하는 것이라는 오해를 낳는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카테르가조마이’는 “행동으로 옮기다” 혹은 “사용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구원을 매일의 삶에서 사용하라”는 뜻이다. 구원 받은 사람답게 일상을 살아가라는 뜻이다. 현재 명령형을 사용한 이유는 매일 그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라고 덧붙인 이유는 이미 받은 구원이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이요, 깨어있지 않으면 구원의 은혜를 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13절은 헬라어 ‘가르’로 12절과 연결되는데, 우리말 번역에서는 사라졌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매일 구원을 실행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라는 말은 성령의 역사를 가리킨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염원하게 하실 뿐 아니라 실천하게도 하신다. 매일의 삶에서 성령께 민감하게 깨어 있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이 바로 구원을 실천하는 일이다. 

“무슨 일이든지, 불평과 시비를 하지 말고 하십시오”(14절)라는 명령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연상시킨다. 사십 년 광야 유랑 기간 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과 시비로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켰다(민 11:1; 14:27, 29). “흠이 없고 순결해져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15절)라는 말씀은 신명기 32장 5절(“그러나 너희가 하나님께 맞서 악한 짓을 하니, 수치스럽게도 너희는 이미 그의 자녀가 아니요, 비뚤어지고 뒤틀린 세대이다”)을 생각나게 한다. 사도는 분열과 갈등 중에 있던 빌립보 교회를 광야 유랑 중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면 이 세상에서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15절)라는 말씀은 다니엘서 12장 3절(“지혜 있는 사람은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을 생각나게 한다.  다니엘은 마지막 날에 대해 예언하는 중에 이렇게 말했는데, 사도는 마지막 날에 일어날 변화가 지금 이곳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 사도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으십시오”(16절)라고 말한다.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킨다. “굳게 잡으십시오”는 현재 명령형이다. 매일, 계속하여 그렇게 하라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울이 감당해야 했던 모든 고난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날”(17절)은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을 가리킨다.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 내어 놓을 유일한 자랑거리는 자신의 고난을 통해 구원 받은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순교의 피를 흘린다 해도 기뻐할 것이라고, 사도는 고백한다. “믿음의 제사와 예배”(17절)는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롬 12:1)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다.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일상의 모든 언행이 제사요 예배다. 사도가 순교한다면, 그가 쏟는 피는 제물 위에 포도주를 쏟아 부어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순교한다 해도 빌립보 교인들은 그 일로 기뻐해야 한다. 사도 자신이 기뻐하고 있기 때문이다(18절).

묵상:

믿음의 대상은 “보이지 않는 것”이며 “아직 오지 않은 것”(히 11:1)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도 그렇습니다. 죄 용서 받았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새 사람으로 지어졌다는 것,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린다는 것, 죽고 나서 그리스도와 하나 된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다는 것, 모든 믿는 자들이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입는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영원한 통치에 참여한다는 것–이 모두가 “보이지 않는 것”이며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듯이 사는 것이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이미 온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라고 권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받은 구원은 완성되지 않았으니 여러분의 노력으로 완성하십시오”라는 뜻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구원의 현실이 보이도록 실행하라는 뜻이고, 미래에 실현될 구원의 현실을 미리 앞당겨 살라는 뜻입니다. 쉬운 말로 하자면, “자기의 구원을 써 먹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내가 정말 거듭났나?’ 하고 의문하지 말고, 거듭난 사람으로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정말 자신이 거듭난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내 안에 성령이 계신가?’ 하고 질문하지 말고, 그런 줄로 믿고 성령과 함께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아, 진실로 내 안에 성령이 계시다!’고 확인하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말씀”(16절)을 굳게 잡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제사와 예배”(17절)입니다. 매일, 지속적으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불평과 시비 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이며, 그 결과로 “흠이 없고 순결해져서 이 세상에서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15절).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당장 죽는다 해도 기뻐할 것입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빌립보서 2장 12-18절: 구원을 써 먹으라”

  1. gachi049 Avatar

    눈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을 믿는 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마음속에 임재 할 때만 가능합니다. 또한 말씀을 묵상하므로 그 성령님께서 깨닫게하시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을 주심을 믿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자녀 답게 살아감을 통해 서 있는 곳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아감으로 살아 있는 동안 아직 도래 되지 않는 천국 생활을 경험하는 훈련의 삶이 필요합니다. 주님! 내마음에 성령께서 임재하셔서 어떤 사탄의 꼬임에도 넘어가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를 기도 합니다.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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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내 자신뿐만아니라 인류의 주님이시고 구세주라고 고백합니다, 내안과 믿음의 공동체 교회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안에 저 자신 뿐만아니라 교회가 있는것을 믿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오해하여 마음이 흔들리고있는 형편입니다. 마땅히 돌로 죽어야할 간음한 여인과 5번 이혼하고 다른남자와 살고있는 사마리아 여자를 용서하신 예수님을 항상 기억하고 정죄하고 심판하지않는 삶을 살아내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모든 생각과 언행이 주님께드리는 거룩한 산제물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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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2장 12절 후반 부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는 삶이 끝나기 전까지 우리가 부단히 노력해야 할 일, 달리기의 최종 목표 지점을 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원의 ‘완성’이 비록 미완성으로 끝날지라도 하나님께서 수고했다고 말씀해 주시기를 바라고 믿으며 애쓰고 노력하라고, 끝까지 잘 달리라고 하는 격려라고 생각했습니다. 믿음의 장성한 분량을 ‘채우도록’ 꾸준히 앞으로 가는 일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영어 성경도 거의 한결같이 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원이 나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더 나아가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하라고 하니 이 일은 결코 기쁘거나 즐거운 일이 아니라는 인상까지 줍니다. 심각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힘을 들여서 해야 하는 일이구나 싶습니다. 음악이라면 엄숙하고 무겁고 깊고 낮은 톤입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14세기 수도원에서 일어나는 연쇄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주인공 수도사의 곁에서 같이 다니며 기록한 젊은 수도사가 회상한 내용입니다. 장미에 관한 언급은 끝에 살짝 나오기 때문에 제목으로는 내용을 짐작할 수 없고, 페이지에 촘촘히 박힌 성경과 교회와 역사의 지식이 질리도록 넓고 깊어서 ‘다 읽었다!’는 것 만으로도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이 느껴지는 책입니다. 그 책에서 당시 수도원에는 웃음을 금지하는 법이 있었다고 말한 것이 기억이 납니다. ‘공허한 말, 웃음을 유발하는 언사를 입에 올리지 말라’고 한 노인 수도사가 호통을 치기도 합니다.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태도는 공허한 말이나 웃음이 나오게 하는 언사와는 거리가 먼, 멀어도 아주 먼 것이라는 인상을 확인 시키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인상’도, 그래서 믿음과 교회, 거룩함, 구원, 싸움, 순종, 희생, 예배…모든 것이 ‘두렵고 떨리는’ 태도로부터 출발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시니 다른 모든 것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한다는 마음이 처음부터 자리잡은 것 같습니다. 몇 년 동안 ‘사귐의 소리’ 묵상을 하면서 달라진 것 중 하나는 하나님이 그렇게 무섭기만한 분은 아니구나 하는 발견입니다. 놀랍도록 다정하고 부드럽고 애처롭기까지 한 분이라는 묵상을 한 적도 있고, 부서질 것 같이 연약한 사람을 보며 한숨을 쉬는 분이라고 상상하기도 합니다. 아버지보다 어머니 같은, 어머니의 눈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하며 엄마의 얼굴을 회상해 보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웃는 하나님, 우리의 모자라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며 웃는 하나님도 상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웃음을 금지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웃으시는 하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구원과 웃음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요. 웃자고 결심한다고 웃어지는 세상도 아닌데…13절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돕고 계신다고, 그렇게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신다고 말합니다. 예스! 아멘! 기쁨을 금지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보기에 좋았더라’의 하나님, 기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도 기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16, 17, 18절에 기쁨이라는 단어가 내내 나옵니다. 구원과 기쁨은 관계가 있습니다. 기쁨은 구원의 마커입니다. 내 안에 기쁨이 많아지기를 원합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기쁨 속에서 묵상하고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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