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장 5-8절: 비우고 낮추는 마음

해설:

5절은 1-4절과 6-11절을 잇는 문장이다. 앞에서 사도는 서로를 낫게 여기고 섬겨 하나가 되라고 권면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다. 사도는 2절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으십시오”에서 사용된 동사 ‘프로네오’를 5절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에서도 사용한다. 2절을 달리 번역하면 “여러분은 같은 것을 생각하십시오”가 되는데, 그들이 품어야 할 “같은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6-11절에 나오는 “그리스도 찬가”의 기원에 대해서 학자들은 오래도록 논쟁을 벌여 왔다. 바울 당시 교회에서 불려진 찬송가 가사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바울 자신이 쓴 시편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기원이 어떠했든, 바울의 신앙 고백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시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6-8절까지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 말하고, 9-11절까지는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행하신 일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6절)라는 번역보다는 개역개정의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라는 번역이 더 낫다. 당시에 “삼위일체” 교리와 신학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사도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과 신성을 공유한다고 믿었다.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우크 하그파르몬 헤게싸토 토 에이나이 이싸 데오)는 여러가지로 번역될 수 있는 난해한 표현이다. 개역개정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라고 번역했다. 본문의 맥락을 감안하면 “하나님과의 동등한 지위를 누릴 것(즐길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라고 번역할 수 있다. 신성의 자리를 누릴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그 자리를 떠나실 수 있었다.

자기를 비웠다는 말(7절)은 신성의 자리를 떠나셨다는 뜻이다. 이 시편을 ‘케노시스 기독론’이라고 부르는데, “비우다”에 해당하는 ‘케노오‘에서 나온 표현이다. 이것은 신성을 비웠다는 뜻이 아니라 신성의 위치를 떠났다는 뜻이다. “종의 모습”(종의 모르페)은 앞에 나오는 “하나님의 본체”(하나님의 모르페)에 대응하는 표현이다. 헬라어 ‘모르페’는 주로 “형상” 혹은 “모습”으로 번역되지만, “본성” 혹은 “지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지위를 스스로 떠나신 예수님은 종의 지위로 낮아지셨다. 성육신 사건을 통해 인간이 됨으로 그분은 종의 지위로 낮아지셨다.  

예수님이 시작한 신성의 자리로부터의 하향성은 바닥에 이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분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는데, 그 죽음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었다(8절).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죽음이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저주 받은 죽음으로 여겼다(신 21:23).  

묵상:

2절에서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같은 것“을 생각하라고 권면한 다음, 5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생각하라고 부연합니다. 그 마음을 품고 살 때 믿음의 공동체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감동적인 시편으로 설명합니다. 그분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신에게 주어진 신성의 자리를 누릴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을 비우고 낮추시는 마음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모르페”를 버리고 “종의 모르페”를 택하셨습니다.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유대인들이 저주로 여겼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인류를 죄와 영원한 저주의 운명으로부터 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시편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의 종의 노래”(52:13-53:12)를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예언자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의 종이 바로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셨습니다. 또한 이 시편은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세족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를 마치신 후,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으시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신 후 제자들의 발을 씼어 주십니다. 당시에 손님의 발을 씻는 것은 종들이 하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종의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모두를 씻기신 다음, 예수님은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요 13:14)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이며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입니다. 그 마음과 자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 은혜를 기억할 때 생겨납니다. 그 마음과 자세가 우리 안에서 생겨날 때, 우리는 자신을 낮추고 비워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고는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됨을 이룰 수 없습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빌립보서 2장 5-8절: 비우고 낮추는 마음”

  1. gachi049 Avatar

    믿음의 공동체는 생각과 인격과 모습이 서로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없습니다. 따라서 서로 감정적으로 상대를 미워하기도 하고, 심지어 예배 중임도 불구하고 예배 분위기를 고려하지 않는 경우를 봅니다. 주님! 성령께서 믿음의 공동체 각자에게 임하셔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라는 말씀처럼 서로 종의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서로를 대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 합니다.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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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항상 십자가의 은혜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기억하고 피부로 느끼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토록 귀한 보좌를 포기하시고 너무나 더럽고 냄새나고 악한 인생을 용서하시려고 대속물이 되신 사랑 그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걷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숨쉴때까지 몸과 영혼이 흠이없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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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합시다 (5절).” 쉬운성경 번역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는 새변역 성경구절입니다. 메시지 성경은 이 구절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해석합니다. “Think of yourselves the way Christ Jesus thought of himself.-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생각한 것처럼 여러분 자신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살펴보고 우리도 자신을 거기에 비추어 보고 맞추면서 고쳐 가라는 조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나 하나님의 ‘자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즉 자기의 영광에도 집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즉 자기의 힘과 능력도 스스로 제한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이 땅을 위해서 기꺼이 하셨습니다. 신분 상승이 아니라 신분 하락입니다. 우리의 삶에 들어 오시되 신의 모습 만으로 오시지 않고 우리와 같은 인간의 상태로 함께 하시기 위해 새로운 신분으로 오셨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카톨릭 사제이자 신학교수로 널리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는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정신 지체 장애인 공동체 데이브레이크 Day Break 에서 1986년부터 1996년에 사망하기 까지 예배를 인도하고 상담하고 책을 쓰면서 지냈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책들을 썼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자는 바울 사도의 권면을 읽는데 헨리 나우엔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불편하고 어려운 환경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어떤 기자가 나우엔을 취재한 글을 보면 나우엔이 학교에서 가르칠 때 늘 바빴다고 합니다. 사제로서 교회 일도 많았고, 교수로서 강의도 많았고 작가로서 인터뷰에 응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기자의 말이 몇 시간 같이 있는데 질문은 몇 개 밖에 못했는데 나우엔 본인의 말이 많아서였답니다. “Sorry I talk so long”이라는 말까지 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좋아한 사람이 일반인보다 정신과 신체가 불편한 이들과 함께 생활한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봐도 데이브레이크 공동체 안에서 나눈 사랑과 은혜가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함을 취하지 (누리지) 않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가 생각해 봅니다. 나는 자격은 안되면서도 나보다 ‘높은’ 사람, ‘우아한’ 사람, 똑똑하고 능력있고 멋진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합니다. 어떤 면에서든 나보다 못한 사람보다 나은 사람과 있으려고 합니다. 낫다, 못하다의 정의가 잘못 되었구나 싶습니다. 메시지 성경에 비추어 보면, 나는 나 자신을 엄청 크고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하고 산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거울은 당신의 모습을 작게 비춰주는 거울인데 나의 거울은 크게 멋있게 흠은 가려주는 포토샵 거울인겁니다. 부끄러운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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