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4장 1-6절: 사랑으로 용납하는 공동체

해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에베소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장부터 3장까지는 복음의 원리를 다루고, 4장부터 6장까지는 복음을 따라 사는 삶(그리스도인의 윤리)을 다룬다. 사도는 자신을 “주님 안에서 갇힌 몸”(1절)이라고 부른다. 3장 1절에서도 그는 자신을 “주님의 포로”라고 불렀다. 그를 가두고 있는 것은 감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드렸다. 그런 사람이 권하는 말이기에 그의 말은 무겁다. 

사도는 앞으로 이어질 모든 권면의 근본 정신을 천명한다. 그것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다. “부르심”은 미래의 영광스러운 상속자로서의 부르심이다. 부르신 분이 어떤 분이고 그 부르심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안다면,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나의 부르심에 합당한 행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답은 나오게 되어 있다. 

사도는 먼저 믿음의 공동체에서의 삶에 대해 가르침을 준다.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2절)에서 “용납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네코’는 “견뎌주다”, “참아주다”, “품어주다”라는 뜻이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견뎌주고 품어주기 위해서는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참음”의 미덕이 필요하다. 이것은 모두 성령의 열매다(갈 5:22-23). 

2절에서 권한 것은 수동적인 대응(참고 견디는 것)인데, 그것만 가지고는 공동체가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믿음의 공동체에는 이미 성령께서 활동하셔서 하나 되게 하셨다. 그래서 사도는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3절)라고 권한다. “힘써”로 번역된 헬라어 ‘스푸다조’는 긴 여행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에 사용된 표현이다.  

4절부터 6절까지에서는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됨을 이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 구절에서 사도는 “하나” 혹은 “한”이라는 단어를 일곱 번 반복한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4절)는 오역이다. 원문에는 그냥 “몸도 하나요”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의미한다. 성령도 한 분이고, 믿는 이들의 소망도 하나이며(4절), 주님 즉 예수 그리스도도 한 분이며,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이고, 하나님도 한 분이시다(5절). 그러니 하나가 되기를 힘써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말한 다음, 사도는 하나님에 대한 간단한 신앙 고백을 적는다. 그 하나님은 “모든 것의 아버지시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6절)이다. 그는 세 개의 전치사 구(“위에”, “통하여”, “안에”)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표현한다.  

묵상: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교회로 모이는 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모여서 한 몸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통해 이 땅에서 성육신의 사역을 지속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사역을 통해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교회로 모여서 그분의 성육신 사역을 이어가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모여 한 몸을 이룰 때 성령께서는 그 안에서 활동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대체 불가이며 영원한 가치를 가집니다.

본질만을 생각한다면 교회는 너무도 높고 귀하고 영광스럽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현실은 자주 지리멸렬 합니다. 바울 사도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2절)라는 권면에는 교회 현실에 대한 그의 인식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는 교인들로부터 많은 상처와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가 세운 교회들은 자주 갈등과 분열에 시달렸습니다. 당시 교회들의 형편이,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나 초라하고 형편 없습니다. 교회로 모일 때 견디기 힘든 사람, 대면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때로 그것은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여러가지 표현을 더하여 하나됨을 포기하지 말도록 강조합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를 이룬다는 것은 공동체 구성원의 개성과 의견의 다양성을 제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서로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과 의견과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로 어울려 몸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사도가 말한 대로, 모두가 눈일 수 없고, 모두가 입일 수 없습니다. 다양한 지체들이 모여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에 몸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믿음의 공동체로 모여 서로의 다름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것을 연습해야 합니다. 때로 그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진가를 드러내는 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것은 서로를 품고 하나됨을 이루게 해 줍니다. 그럴 때 성령의 열매는 더욱 무르익습니다. 


Comments

4 responses to “에베소서 4장 1-6절: 사랑으로 용납하는 공동체”

  1. gachi049 Avatar

    교회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게신 그안에서 성격과 마음과 정서가 모두 다릅니다. 그러나 한분이신 하나님 만을 바라보고 믿음의 공동체 모두가 사랑안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사랑할 때 하나가 됨을 믿습니다. 성령님께서 동행하시고 인도하심으로 서로 사랑하고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아버지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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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비록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드리고 믿는 성도들이지만 서로의 믿는 색갈이 달라서 갈등이 생기는것 같습니다, 주님도 하나 교회도 하나 인류를위한 주님의 사랑과 영혼구원 계획도 하나인것을 절감하게하시고 여러가지 다른 색깔을 잘조합하고 자르고 다듬어서 하나의 걸작품을 만드시는 은혜의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걸작품을 만드시는 토기장이 주님을 생각하며 아품과 멸시를 견디고 참고 견디는 믿음을 간절히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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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Chris Yoo Avatar
    Chris Yoo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성격, 개성,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교회 공동체를 이룹니다. 어찌 갈등이 없을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교회 구성원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부터 겸손히 낮아져서 섬기는 자로 살아가기를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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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어제 주일예배의 설교도 교회가 하나로 살아가는 일에 대한 권면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본질적인 것에서 하나가 되도록 애쓰자는 권면이었습니다. 분리를 경험한 많은 교회들에게 특별히 다가가는 메시지입니다. 이별 (관계이든 직장 이동이든)을 고려하고 있는 사람은 오늘 본문을 어떻게 읽을까요. 이별을 결정한 뒤에는 본문의 메시지가 달라질까요. 교회 공동체에 보낸 편지니까 각 개인이 겪는 관계의 괴로움과 뉘앙스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조금 다를 수 있을 겁니다. 초기 독자와 우리 사이에 있는 세월의 간격도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만 다룬 편지라고, 일반 사회 생활을 하면서 마주치는 고민에 대해서는 해당이 안된다고 넘어가는 것도 좀 아닌 것 같습니다. 교회에 앉아 있는 나와 직장에 앉아 있는 내가 같은 사람이니 교회 안에서 겸손하고 온유하며 서로를 사랑으로 받아주려는 노력은 직장에 가서도 계속되는 일일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님이 친히 거하시는 곳으로 아름답게 지어져 갈 것을 꿈꾸게 하는 바울의 권면은 교회는 내게 세상이요, 세상은 예배가 드려지는 시공이라는 인식의 전환으로 이어집니다. 어제 예배 마치고 친교실로 걸어 가는데 지난 몇 주 못 뵈었던 내외분이 우리한테 오셨습니다. 못 본 지 좀 되어서 오늘은 꼭 봤으면 했다면서 테이블에 같이 앉았습니다. 우리보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인데 건강이 조금씩 약해져서 교회 출석도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국밥을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마음이 참 좋았습니다. (국이 참 맛있었다는 것도 한 몫을 했지요) 덕담만 나눈 것도 아니요, 명랑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오고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되려, 아픈데가 점점 늘어난다, 예배 드리고 집에 가 쉬려고 나가기 바쁘다, 모처럼 친구들과 가을에 여행 갈 계획을 세우고 그때까지 다들 알아서 건강 관리 잘하고 만나자는 ‘부담’을 수시로 주고 받는다…이런 얘기가 다였습니다. 그야말로 스몰토크지요. 그런데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같이 앉아 밥을 먹고 있다는게 유난히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일어날 때 쯤에 그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퍼서 혹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교회에 못 나가다 보면 ‘교회도 안 나가면 끝’이구나 싶더랍니다. 나는 곧바로 ‘아니예요, 끝 아니예요. 안 보이면 궁금하고 보고 싶고 그래요.’ 그분 말씀에 동의가 되는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봄에 갑자기 발등이 아파 걸을 수가 없던 때 어느 주일에 교회를 빠졌었습니다. 다음 주일에 절뚝이며 갔는데 교우들은 안부를 묻는데 교역자들은 무소식이었습니다.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속으로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누가 알아주면 아프던게 덜 아파지냐고. 한 사람이라도 좀 어떠냐고 물었으면 됐지 너무 많이 물어도 피곤한 일 아니냐고. 교우들이 하는 안부와 교역자들의 안부가 급이 다르냐고. 뭘 굳이 기대하느냐고…그때를 떠올리면 교회도 안 나가면 끝이라는 말이 틀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랑이 없는건지, 사랑을 표현 안해서 그런건지 잘 모르겠는 상태가 교회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교회도, 직장도, 사람들도, 하물며 가족 간에도 사랑으로 용납하며 성령 안에서 한 소망을 품고 산다는 결심이 무너지는 때가 있습니다. ‘끝’이라고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바울의 권면에 유효기간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언제까지’ 서로를 사랑으로 받으라는건지, 서로를 사랑으로 용납하라는건지요. 하나님의 시간은 언제나 퍼펙트 타이밍입니다. ‘끝’이 없다고 여기는 것보다 끝이 분명이 있다고, 그러니 그때가 올 때까지 잘 하자고 생각하는 것이 현명하고 현실적인 결심인지 모릅니다. 교단 분리, 이직, 이혼, 결별…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의 특별한 시간이 있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압니다. 고맨고 이즈맨이즈 go man go, is man is. 문법에는 맞지 않는데 마음의 문법으로는 퍼펙트 텐입니다. 다시 사랑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날까지 사랑하고,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고, 늘 겸손하게 온유하게, 관대하게 용납하며 삽니다. 끝까지. 끝이 올 때가지. 우리가 끝내는게 아니라 끝이 우리에게 옵니다. 성령께서 그 때까지 우리를 지키실 줄로 믿습니다. 끝까지 지키실 줄로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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