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장 15-23절: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소서

해설:

사도는 편지를 쓸 때 몸말을 시작하기 전에 수신자들에 대한 감사와 기도의 말을 쓴다. 에베소서에서는 감사와 기도의 말을 쓰기 전에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올렸다(3-14절). 한 문장으로 되어 있는 15절부터 23절은 수신자들에 대한 감사와 기도의 글이다. 

15절과 16절은 감사의 말이다. 사도는 수신자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는데, 그 이유는 “주 예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15절) 때문이다. 사도는 “끊임없이”라는 말과 현재형 동사(16절, “감사를 드리고 있으며”, “기억합니다”)를 사용하여 그들에 대한 감사와 기도가 늘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17절부터 23절까지는 수신자들을 위한 기도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며 “영광의 아버지”(17절)께 기도 올린다. 원문을 기준으로 보면, 이 기도의 요점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에 있다. 여기서의 “영”은 성령을 의미한다. 14절에서 사도는, 하나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성령을 “담보”(선금)로 주셨다고 했다. 따라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라는 말은 이미 그들 가운데 계시는 성령께서 더욱 충만하게 역사하기를 기도한다는 뜻이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3절)은 성령께서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실 때에만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논리와 지식과 이성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다. 그 신비를 깨닫는 문은 인간 편에서 열 수 없다. 하나님 편에서 열어 주셔야만 한다.

성령께서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면 세 가지의 결과가 생긴다. 첫째, 하나님을 안다(17절).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지극히 적은 일부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한다. 하나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이요, 피조물로서는 다 알 수 없는 신비이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18절) 알게 된다. 셋째,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19절) 알게 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손길로 지금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신다. 그것을 알아 보아야 한다.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려내신 그 능력이다(20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자기의 오른쪽”(20절) 즉 가장 친밀한 관계 안으로 옮기셔서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일컬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21절) 하셨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세우셨다. 그분은 인류의 구원자일 뿐 아니라 온 우주와 모든 생명의 통치자이시다. 

마지막으로 사도는,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22절)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교회”는 지역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든 교회(“우주적 교회”)를 가리킨다. 믿는 이들이 교회로 모일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 안에 역사하신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23절)이라고 말한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23절)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분 안에 모든 것이 있기에 그분 안에 머무는 사람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다(시 23:1).

묵상:  

물질과 육신만을 아는 우리에게 영이신 하나님은 신비입니다. 다 알 수 없는 대상입니다. 알면 알 수록 더 모를 신비입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그 신비에 눈 감고 물질과 육신에 붙들려 살아갑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사는 집을 자신이 살아가야 할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집안에 유폐시키고 살아가는 사람과 같습니다. 너무도 신비롭고 황홀한 하나님의 세계에 자신을 차단하고 물질과 육신에 파묻혀 살아가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요 또한 불행한 일입니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활동하시는 능력도 역시 신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내신 그분의 능력이 지금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 능력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 전까지는 눈에 보이거나 손에 만져지는 방식으로 활동하지 않습니다. 비상의 경우에는 부인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 능력의 존재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일상의 경우에는 보이지 않게, 드러나지 않고, 따스한 햇살처럼, 부드러운 미풍처럼, 안개비처럼 일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그 능력을 알아 볼 수 없습니다. 

앞에서 사도는, 하나님께서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킬”(10절)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로 인해 깨어지고 흩어진 피조 세계를 온전하게 회복시킬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완성될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지금 교회를 통해 불완전 하지만 미리 이루어졌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룸으로 장차 온 피조세계에 일어날 일을 미리 경험하고 보여주는 곳입니다.  

앞에서 사도는 지금 우리가 믿음 안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담보”(선금)에 비유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할 때 우리 존재 전체를 다스리실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 가운데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 평안, 기쁨도 역시 선금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이를 때 하나님께서 잔금을 주실 터인데, 그 때가 되면 완전한 사랑, 완전한 평안, 완전한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한 교회도 선금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믿음의 식구들이 한 몸을 이루어 살아가면서 우리는 장차 온 피조세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될 것을 기대합니다.  


Comments

4 responses to “에베소서 1장 15-23절: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소서”

  1. 매일 아침 말씀을 통해 주님을 조금 더 알게하시는 성령께 감사를 드립니다, 온세상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깨닫고 전능의 주님을 알게하신 주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상속자들이 되게하는 소망을 주시는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주님의 몸된 공동체에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귐의 소리 가족 모두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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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chi049 Avatar
    gachi049

    십자가의 선금으로 지불하시고 하나님 자녀로 삼아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은혜를 생각하면 가슴이 설랩니다. 기쁨만이 마음 안에 가득합니다. 이 작은 인간이 무엇이관데 자녀로 삼아 주셨는지 그 신비스러움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 은총을 찬양 할 따름이니다. 주님! 호흡이 멈추는 날까지 기억하고 잊지 않게 성령께서 늘 동해하시고 인도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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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흔히 에베소서는 교회에 대한 말씀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장기 계획을 세우는 회의 때 에베소서를 읽고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왜 교회를 주셨는지,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등등의 답이 에베소서에 있지 않을까 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회의를 하던 그 당시에도 또 지금도, 교회가 받는 도전은 시대와의 충돌인 것 같습니다. 시대라는 배경을 걷어내고 교회를 생각하기는 불가능합니다.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신자들이 모여 예배하고 교제하는 교회가 시대를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에 대해 초연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동의합니다. 시대를 거스를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강조하는 목사님도 계십니다. 동의합니다. 시대의 흐름에 적극 대응하고 또 주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호소하는 말씀도 들어 봤습니다. 동의합니다. 공통점은 시대를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는 시대 앞에서 어떻게 서야 하는가 하는 고민입니다. 기독교를 스펙트럼처럼 펴 놓았다고 상상할 때, 요즘 사회에서 자주 쓰는 보수와 진보의 표지 말고, 개인 영성과 공공성이라는 두 가지 축 사이에서 우리 (교회)는 어디쯤에 있는지를 살펴 보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교우들과 이야기 하다 보면 교회에 대한 기대, 목사님에 대한 기대가 드러납니다. 다 비슷비슷 합니다. 교회에 오면 마음이 편하기를 바라고, 내가 지금 맞게 살고 있다는 확인을 받기를 원합니다. 설교는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는 말씀이기를 원하고, 뭐든 해 낼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의 메세지이기를 원합니다. 교인들 사이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정치적인 언급, 언론의 헤드라인은 피했으면 합니다. 웃자고 하는 말이나 ‘요즘 세상이 이렇습니다’를 보여주는 사례로 잠깐 하는건 괜찮지만 교회에 와서도 골치 아픈 세상사를 듣고 싶지 않다는 것이 대부분의 교인들 심정일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은 바울의 에베소 편지와 닮았나요, 비슷한 데가 있나요, 전혀 다른 이야기인가요. 교회에 관한 구절 중에는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로마서 12:15)는 말씀과 비슷한 구절들이 많이 나옵니다. 같이 울고, 같이 웃는다는 행위의 일치 만을 뜻하는 말씀이 아닐겁니다. 이웃의 마음을 안다, 이웃과 삶을 나눈다는 뜻이 들어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너무 소중한 사생활 보호는 이런 구절 앞에선 어찌 되는 걸까요. 분별과 지혜, 상식과 존중을 동원하여 ‘이웃을 내 몸처럼’ 여기는 노력을 한다는게 피곤하고 귀찮으니까, 교회에선 ‘좋은 일 만’ 나누자, 잘 끝난 사건이나 해결이 된 갈등 만 간증으로 나누자…정도로 타협하는 것은 아닌지요. 부끄럽지만 나도 그러는 편입니다. 언제부터인지 속마음을 나누지 않습니다. 좋은 일 조차도 꺼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자랑이나 하는 것처럼 들릴까봐, 혹은, 듣는 이는 지금 어려운데 나는 잘 지내는 것 같이 보이면 이것도 상처가 될까봐 조심해서 말을 가리기도 합니다. 풍성한 사귐이 아니라 쪼그라진 사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이 얼마나 풍성하고 놀라운지 깨닫는 (18절) 사람들이 모인 교회라면 교제와 나눔에도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인의 영성에 올인한 교회가 시대도 변화 시킬 수 있다는 가설이 이젠 안 믿어집니다. 기독교인이 많아질수록 사회가 좋아진다는 말도 공허하게 들립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제 필요 없는걸까요. 교회 공동체 안에서 경험하는 일들 – 선금 받은 것으로 누리는 일들 -이 장차 도래할 주님의 세계에서 맛볼 일들의 예고편이라면, 리허설이라면, 이렇게 맥빠져 있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교회의 미래는 내 미래이기도 합니다. 교회를 튼튼히 세우기 위해 에베소서를 읽었듯이 교인으로 잘 서기 위해 에베소 편지를 읽겠습니다. 우리 개인사에 개입하는 성령께서 시대와 역사에 눈감지 말라고 깨우시는 것 같습니다. 성령님, 나를 도와주세요. 교회를 도와주세요. 그리스도 안에서, 시대 안에서, 하나님을 더 잘 알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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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kkim2 Avatar

    어제와 더불어 “먼저 찾아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묵상해 봅니다. 이제 제가 해야할 것은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데로 해야할 것과 하지말아야 할 것을 분별할수 있도록, 그 신앙적인 감수성을 가질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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