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5장 13-15절: 자유와 사랑

해설:

13절에서 사도는 1절에서 언급한 “자유”의 주제로 돌아간다. 새번역은 원문의 수동태 문장을 능동태로 바꾸어 놓았다.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은 노예 상태에 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우리를 부르셨다.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기 위함이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믿음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육체의 욕망”은 인간 본성에 배어 있는 죄성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신 이유는 더 많은 죄를 쌓게 하려는 뜻이 아니다. 사도는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라는 말로 자유하게 하신 이유를 밝힌다. “섬기다”는 “종이 되다”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인간의 본성은 주인이 되고 싶어한다. 그것이 자연인으로서의 모든 인간의 속성이다. 죄성 때문이다. 믿는 이들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께서는 죄성을 치유하셔서 죄가 이끄는 반대 방향으로 가게 한다. 억지로,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기꺼이, 기쁨으로 다른 사람에게 종이 되어 준다.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게 만든다. 

이어서 사도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모든 율법은 한 계명 즉 이웃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한다(14절). 예수님도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질문을 받으시고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여 답하셨다(마 22:34-40). 성경 안에 담긴 613개의 율법들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이며, 사랑한다면 율법의 모든 규정을 지켰다고 할 수 있다. 

15절에서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엄중히 경고한다. “물어뜯다”와 “잡아먹다”는 야수들의 행동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에 분쟁과 다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믿음을 잃었다는 의미이고, 그대로 계속한다면 모두가 망하고 말 것이다. 서로 싸우는 이유는 서로에게 주인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망하다”는 말은 공동체가 붕괴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구원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묵상:

현대인들에게 “자유”만큼 중요한 가치는 없습니다.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뜻대로 결정하고 살아가는 것이 자유입니다. 대다수의 선진국들은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합니다. 근대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지난한 투쟁 과정이었습니다. 그 투쟁의 열매를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본다면, 오늘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하지만 자유가 너무 많아서 자유를 당연시 하는 병폐도 있습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당연히 그런 것처럼 여깁니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를 쓸 당시, 사람들은 여러가지의 속박과 예속 아래 살았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였던 갈라디아 지방은 더욱 그랬습니다. 로마 황실은 “팍스 로마나”의 이념을 전파하면서 로마 제국의 보호 아래에 들어오면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선전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자유도 매우 제한적이었고, 경제적으로 그리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실제로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좀 더 많은 자유를 누리기를 갈망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유”로 설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유에 대한 열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으라고 말합니다. 정치적 속박이나 신분적인 제한보다 더 근원적인 매임을 보라는 뜻입니다. 외적인 면에서의 자유는 당장 쟁취할 수가 없습니다. 식민지 주민들로서 로마 제국에 대항해 투쟁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근원적인 매임에서 벗어나는 일은 지금 당장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자유는 사랑과 함께 옵니다. 죄의 본질은 자기중심성입니다.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은 자기중심성에서 풀려났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그 존재를 드러냅니다. 사랑은 자기 보호 본능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에게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이룹니다. 


Comments

5 responses to “갈라디아서 5장 13-15절: 자유와 사랑”

  1. Chris Yoo Avatar
    Chris Yoo

    더 많은 나에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남에 자유를 억압하는 인간에 죄된 본성을 내려 놓기 원합니다.

    주예수를 믿음으로, 선물로 받게된 자유로 섬기는 사랑에 밑거름이 되기를

    그래서 내가 속한 가정, 교회, 직장, 사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가 서로를 억압하며 다투는것이 아닌 서로를 섬기며 사랑하는 축복에 도구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Like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자유와 사랑이 공동으로 만드는 작품은 양보와 관용입니다. 자유라고 하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아이 눈에 어른은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자유’의 개념이 아직 없어도 아이는 자기도 빨리 어른이 되어 자기 원하는대로 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어른들에게 물어보면 어렸을 때가 그립다고 답하는 사람이 그립지 않다는 사람보다 많을 것입니다. 왜 그립냐고 물으면 그 땐 걱정이 없었으니까, 뭐든지 다 가능했으니까라는 답을 할 것입니다. 사랑은 좀 다르겠지요. 자유가 외적인 압력이나 상황적인 조건에 따라 느껴지는 파장이라면, 사랑은 더 근본적이고 섬세하여 분석이나 계량에 걸리지 않는 파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유는 의지의 토지에 뿌리를 내린 나무, 사랑은 신비의 세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고 할까요. 바울의 논리를 따르면 자유라는 나무는 사랑이라는 바람을 받고 자랍니다. 자유 나무에 사랑이 아닌 바람이 불면 가지가 꺾이거나 잎들이 말라 부서질 수 있겠습니다. 사랑의 바람은 자유 나무가 곧고 튼튼하게 자라도록 합니다. 생명을 나누는 나무로 자라게 합니다. 그런 나무와 바람에게서 보는 것이 양보와 관용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속에는 마음대로 하지 않는 자유도 들어 있습니다. 자기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쓸 수 있는 자유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양보를 가르치는 것은 자기에게 양보해 주기를 바라는 계산에서 나온게 아닙니다. 절제와 조절, 화목과 평화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관대한 어른 밑에서 자라는 아이는 사탕을 손에 쥐고 있을 때와 같이 나눠 먹을 때의 기쁨이 다른 것을 배웁니다.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 자유의 옵션을 배웁니다. 좋아하는 과자를 나 혼자 음미하는 것도 사랑이고, 친구와 나눠 먹는 것도 사랑인 것을 배웁니다. 사랑의 얼굴이하나 만이 아니라는 것을 배웁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종종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어떻게 이웃이 내 몸일 수 있을까…예수님이 주신 자유를 작동해 보기로 합니다…네 이웃을 네 자신 보듯이 봐라, 네 이웃도 네 몸도 너의 관심이 필요하다, 너가 하고 싶으면 네 이웃도 하고 싶은거다, 네 이웃에게 네 과자를 주고 같이 먹어라, 네 자유를 써서 네 이웃을 편하게 해줘라, 너에게 준 나의 사랑이 네 이웃의 자유가 되게 하라…양보와 관용의 삶을 묵상합니다. 나를 자유인으로 부르신 주님 (13절),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게 (13절) 하소서.

    Like

  3. 지난날의 모든 이기적인 잘못을 십자가에서 용서하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그토록 놀라운 사랑에 빛진자인것을 절감하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기를 원합니다만 자주 교활한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는 가련한 존재입니다. 앞으로는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고 사랑으로 섬기는 자유를 기리며 누리는 삶을 끝까지 살아 내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Like

  4. gachi049 Avatar
    gachi049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로버트처럼 만드시지 않고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만약 자유가 없다면 사랑할 수 없고 사랑이 없는 곳에 자유가 있을 수없을 것입니다. 613개의 율법을 지키려면 자유와 사랑은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율법 중에 한가지만 어겨도 모든 계명을 어긴것 된다고 했습니다.(약2:9~11) 이는 족쇠와 같아 인간을 얽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리석은 인간에게서 이족쇄를 풀어주시기 위해 사랑이신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그를 믿는 자에게 율법에서 해방 시켜 주셨습니다. 즉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롬 13:10). 주님! 사랑이신 예수님을 이웃에게 전하는 여정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Like

  5. mkkim2 Avatar

    아직도 제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죄인이, 하나님 사랑 (신명기 6장 5절)과 이웃 사랑(레위기 19장 18절)이 궁극적으로 주신 명령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주여, 항상 민감하게 반응할수 있도록, 깨어있을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Like

Leave a reply to billkim9707 Cancel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