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3장 19-29절: 율법은 무엇인가?

해설:

바울 사도는 자주 독자의 입장에서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방식(디아트리베)으로 논지를 이끌어 간다. 앞에서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고 말했으니, 독자들은 당연히 “그러면 율법의 용도는 무엇입니까?”(19절)라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율법은 “범죄들 때문에 덧붙여 주신 것”이라는 말은 인간이 죄에 물들었기 때문에 후에 생겨난 것이라는 뜻이다. “그 후손이 오실 때까지”라는 말은 율법이 한시적인 조치로서 주어졌다는 뜻이다. “그 후손”은 아브라함과 같이 약속을 받은 “그 씨앗”(16절) 즉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개자의 손으로”는 모세가 천사들을 통하여 율법을 받았다는 뜻이다. 중재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소통하도록 돕는다(20절).

사도는 또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반대되는 것입니까?”(21절). 율법이 인간의 죄성 때문에 나중에 더해진 것이라면, 믿음으로 의롭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과 상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율법은 “그 후손”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개인교사”(개역개정 “초등교사”, 24절) 역할을 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개인교사(파이다고고스)는 부유한 가정에서 어린 자녀를 위해 한시적으로 고용한 교사를 가리킨다. 주로 집안에 있는 노예들 가운데 나이 들고 지혜와 지식이 있는 사람을 개인교사로 사용한다.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개인교사의 역할은 끝나고 정식 교사에게 인계된다. 사도는 율법을 개인교사에, 예수 그리스도를 정식 교사에 비유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열렸으니 율법은 시효를 다한 것이다(22-25절).  

이렇게 말한 다음 바울은 다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말한다. 그들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26절).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 되었다(27절). 그 점에 있어서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28절). 갈라디아 교인들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으며, 주인도 있고 종도 있으며, 유대인도 있고 그리스 사람도 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다른 점들이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고 있다는 점에는 다름이 없다.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약속을 따라 정해진 상속자들”이다(29절).

묵상: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자는 징역에 처한다”는 법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도덕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다른 사람을 살해한 자는 징역에 처한다”는 법은 어느 나라에나 존재합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그 사람을 살해하는 데까지는 가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법은 죄 된 인간을 선도하고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성을 전제하고 만들어진 안전장치입니다. 법이 없으면 인간의 죄성은 제한 없이 표출될 것이고, 사회는 현실 지옥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는 말은 칭찬이 됩니다. “법은 죄 지은 사람을 벌 주기 위함이 아니라 선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웬만한 도덕성을 가진 사람은 법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매사에 법을 따져 가면서 법에 저촉되지 않는 길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법망을 피하여 죄를 행하려는 꼼수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요즈음에 ‘법 기술자’ 혹은 ‘법꾸라지’라고 부릅니다. “법 대로 하자”는 말은 죄 된 본성을 싸워 보자는 뜻입니다. 

율법도 속성에 있어서는 일반 법과 다르지 않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켜 더 나은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죄를 짓더라도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경계선을 그어 주신 것입니다. 한시적인 것이고 후에 더해진 것입니다(19절). 따라서 “율법대로 산다”는 말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지 않을 정도에서 죄를 즐기겠다는 뜻이 됩니다. 문제는 인간의 죄성이 너무나 집요하고 교묘하여 그 경계선을 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율법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율법 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심하기 전의 사울이 가졌던 오해이고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가졌던 오해였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안전장치 혹은 현상유지의 도구입니다. 율법을 행하여 죄된 본성을 바꿀 수도 없고 의롭게 살 수도 없습니다. 율법에 대한 철저한 준수를 목적으로 삼는다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고 저주를 쌓는 결과에 이를 뿐입니다. 율법 준수를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 결국 저주를 쌓는 결과에 이른다면,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것이 죄 아래에 갇혔다고 말합니다“(22절). 율법 없는 이방인이든 율법 있는 유대인이든, 죄 된 삶을 통해 저주를 쌓았다는 점에는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구원자로 보내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이 오셔서 모든 인류가 받을 저주를 모두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씨앗 한 톨의 죽음은 그 씨앗 안에 담긴 수 많은 생명의 죽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분 안에 담긴 온 인류의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의 저주로부터 벗어나고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를 옷으로 입습니다. 그 사람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그가 받은 약속에 참여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율법 없이, 율법을 초월하여, 율법을 이룹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고 살기 때문입니다. 


Comments

4 responses to “갈라디아서 3장 19-29절: 율법은 무엇인가?”

  1. 법에 저촉이 되지않고 모든 법을 교묘하게 피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어떻게든지 많이 챙기는 사람들을 종종볼수있습니다. 대부분 그런 사람들은 법을 잘아는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율법주의자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세상의 지혜로 살고있는 겉모양새는 좋지만 내용이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감사하며 허락하신 십자가를지고 주님뒤를 우직하게 따르는것이 힘들어보이지만 진정한 축복인것을 세상에 알리는 사귐의 소리 가족들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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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chi049 Avatar
    gachi049

    인간의 죄가 더욱 악랄해지고 교모해져가는 시대에 살고 있는 삶에 율법을 적용한다면 살아 남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끝없으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율법에서 벗어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전하는 남은 여정이 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여주시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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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며칠새 에이미 질 르빈 Amy-Jill Levine 교수의 강의를 찾아서 듣고 있습니다. 그는 밴더빌트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유대인 여성 박사로서 그의 설명과 해석은 비유대인인 나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점을 보여줄 때가 많습니다. 르빈 교수는 예수님이 하신 비유들과 바리새인의 허물을 지적하는 말씀을 유대인의 귀로 듣고 유대인의 눈으로 그 시대를 살핌으로써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 담처럼 세워져있는 오해와 편견을 허무는데 관심이 있는 학자입니다. 요즘에 듣고 있는 강의는 ‘예수와 바울의 이해와 유대주의’로 카톨릭과 유대교 대화 강의 시리즈의 일부입니다. 복음서는 바리새인 Pharisees 에 대해 안 좋게 그립니다. 르빈은 복음서의 바리새인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은 예외적으로 훌륭한 인물이었음을 환기시킵니다. 가말리엘, 니코데무스, 바울이 그 예입니다. 그는 또 누가복음서 18:11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든 두 사람의 기도를 말합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바리새파인이고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자기가 사기꾼, 죄인, 간음을 행하는 자와 같지 않다는 점에 감사하고 또 자기는 정기적으로 금식하고 십일조를 한다고 기도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늘을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리가 저 바리새파 사람보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비유에서 르빈은 개인적인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까닭 (비유의 목적) 에 관한 해석을 하기 전에 바리새인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먼저 지적합니다. 르빈은 테네시의 중범자 수용 감옥시설에 있는 종신형이나 사형대기 죄수 등을 상대로 성경공부와 신학 강의를 하러 다니는데 강의를 마치고 교도소에서 집으로 운전해 올 때는 언제나 백미러로 교도소의 높은 담을 보면서 ‘주님 감사합니다. 어릴 때 부모한테 학대 받거나, 정신질환의 유전자가 있거나, 말할 수 없는 가난 속에서 살지 않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기도한다고 고백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그의 고백이 내게 ‘편견과 오해’의 가능성을 보게 했습니다. 율법은 은혜를 깨닫게 하는 도구라는 생각을 합니다. 은혜를 은혜로, 주님을 주님으로 처음부터 바로 깨닫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시간이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때 율법은 방향을 잡아줍니다. 자기확신이 필요할 때, 잘 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격려해야 할 때 율법은 유익합니다. 르빈 박사가 ‘바리새인’ 바울을 설명하는데서 율법이냐 은혜냐를 좀 더 잘 깨닫게 하는 부분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자신의 배경 (할례받음, 베냐민 지파, 모세의 율법 준행)을 열거합니다. 그는 이런 자신의 배경 (스펙)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사실이 없어지거나 바뀌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소명은 이방인의 전도자,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 제사 음식을 먹으면 안된다 등의 정결의식 관련 논쟁은 이방인을 유대인의 전통과 예식에 참여시켜 유대인으로 바꾸자는 일을 하자는 것이 되니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적인 사고를 체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은혜로 받은 것 (혹독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자라지 않은 ‘행운’)을 율법으로 (부모 말씀을 잘 들어서, 내가 착해서, 똑똑해서) 해석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타인을 차별하고 나보다 못한 존재로 만드는 아더링 othering 의 우를 범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율법적인 판단을 앞세우는 습관이 죄로 넘어가지 않도록, 법이 도덕의 마지노선이라면 율법은 은혜의 창문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활짝 열어주신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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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kkim2 Avatar

    최후의 보루, 더 이상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어느덧 우리의 삶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버린 것만 같습니다. 저부터도 “이것만 하면돼” 혹은 “그것만 하지 않으면돼”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기도 합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분명 믿는다는 것은 지금 현재 천국을 살아가는것인데, 과연 천국에서 이렇게 살까싶어 회개로 시작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삶의 기준을 율법에 맞추는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그 촛점을 맞추도록 하여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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