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도리를 설명한 후 바울은, 1장 6절부터 10절에서 제기한 문제로 다시 돌아가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어리석은”이라는 형용사를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두 번(1절, 3절)이나 사용한 것은 이례적이다. 최악의 경우에 결별할 각오를 했다는 뜻이다. “홀리다”(1절)라는 단어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모욕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바스카이노’라는 단어는 주술사가 어리석은 사람을 속이는 행동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 앞에 선하다”(1절)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그만큼 분명하다는 뜻이다.
2절의 질문은 사도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성령이 임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성령이 그들 가운데 임한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소식을 들어서”라는 번역보다 “들어 믿음으로”라는 개역개정 번역이 더 좋다. 성령을 받을 때 그들 가운데 율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이제 와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3절). 사도는 이것을,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 와서는 육체로 끝마치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육체로 끝마치다”라는 말은 율법에 의지하려는 태도를 가리킨다.
새번역성경은 4절의 질문을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은, 다 허사가 되었다는 말입니까?”라고 번역했는데, 개역개정성경은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라고 번역한다. 헬라어 ‘파스코’는 “고난당하다”는 뜻도 있고 “경험한다”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번역이 옳은지는 문맥에 따라 결정하는 수밖에 없다. 5절의 질문이 성령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새번역이 옳아 보인다. 갈라디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 여러가지의 이적을 베풀어 주셨다. 그때까지도 그들은 율법을 몰랐다. 그럼에도 그들은 지금에 와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묵상: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의 뜻에 신실하게 순종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없었다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구원이 누구에게나 유효한 것은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기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죄의 힘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듣고 믿는다”(1절, 3절)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진실로 그렇다!”고 인정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구원자로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여 살아 계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먹고, 그분은 우리와 함께 먹습니다. 믿음은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지속적인 과정입니다.
“들은” 복음을 “믿는” 것은 성령이 우리 마음에 임하실 때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연 법칙에도 맞지 않고 논리적으로도 통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해력을 과신하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믿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인정하고 겸손히 복음에 마음 문을 열 때(“듣고”) 성령께서 그 마음을 만지셔서 믿어지지 않는 것이 믿어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믿음으로”).
우리는 치유나 축사 같은 사건만을 기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은 복음이 믿어지는 기적입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님에게 “주님”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고전 12:3).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이 성령을 이미 받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복음을 듣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때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다른 기적들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알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않았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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