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장 15-21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해설:

15절과 16절은 바울이 갈라디아 신도들에게 하는 말 같지만, 문맥 상 바울이 베드로에게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과 게바 그리고 다른 유대인 신도들을 가리킨다. 15절에서 바울은 “게바여,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이방인 출신의 죄인은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나서, 16절에서 유대인 신도들이  공유하고 있던 믿음에 대해 설명한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율법을 지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두 가지의 중요한 개념이 나온다. 하나는 “의롭다고 하다”(16절)라는 표현이다. 이것은 헬라어 ‘디카이오오’의 번역으로서 재판장이 피고에게 무죄를 선언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죄가 있는데도 죄 없다고 선언하는 재판장은 의롭다 할 수 없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음에도 의롭다고 인정하는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값을 담당하고 죽으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분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

다른 하나는 “믿는다”라는 표현이다. 헬라어 ‘피스티스’는 “믿음”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신실함”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새번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번역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의 뜻에 끝까지 신실하심으로 십자가를 지셨고 그로 인해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과 그분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 의뢰가 합해져서 완성된다.  

17절은 게바의 행동을 두고 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이 율법을 지키려 한다면 스스로를 죄인으로 인정하는 셈이다.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율법을 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무효로 만드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허물어졌다. 게바의 위선적인 행위는 허물어진 율법을 다시 세우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18절). 

사도는 자신이 “율법과의 관계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어버렸습니다”(19절)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원리에 따라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도 율법의 정죄에 따라 죽음을 당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살아난다.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분과 함께 새 사람으로 부활하기 때문이다.  

20절의 첫 문장 즉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는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덧붙인 것이다. 여기서의 “나”는 십자가에 달려 죽고 장사 지낸 옛 사람을 말한다. 육신적인 면에서 전과 달라진 것이 없지만 인생의 주체가 바뀌었다. 따라서 더 이상 율법에 매일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율법에 사로잡히는 것은 그분의 희생을 무효화 시키는 것이 된다(21절). 

묵상:

절대 거룩의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는다면 우리 중에 무죄 선고를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무죄 선고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믿음에 따라 전력투구를 했지만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십자가에서 흘린 그분의 보혈로 자신의 죄값이 치뤄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행위로써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줄 알았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존재 상태를 변화시켜 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충분합니다. 만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다른 무엇을 더하려 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넘치도록 충분합니다. 그분이 행하신 일에 우리가 더할 것은 없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이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율법 준수를 요구할 때 바울이 그토록 강하게 반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할례를 행하는 것은 민족의 전통으로서 무해합니다. 하지만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에게서 무엇인가를 더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신실하셨기에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마음의 조화에 따라 휘둘립니다. 마음의 조화에 따라 우리의 구원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의 확신”이란 “내 믿음이 약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확신입니다. 그렇기에 그분 안에 머물러 사는 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신분은 취소되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은 탈취될 수 없습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갈라디아서 2장 15-21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1. gachi049 Avatar
    gachi049

    원죄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값으로 사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할례를 받게하시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열어주시니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에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어느 사탄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여정이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인도 하옵소서. 또한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여정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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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구원의 조건도아닌 율법도 지키지 못하는 마땅이 저주 받아야하는 가련한 존재를 십자가를 통해 자녀로 삼아주신 사랑의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지금까지 살아온것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딴길로 나아가도 지팡이와 막대기로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시는 신실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세상에 알리는 사귐의소리 가족 모두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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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율법’이라고 하면 본래 유대 백성에게 주신 여호와의 법과 규범을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들의 다른 이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이나 기대로서의 율법은 물론이요, 우리가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경계를 긋는 여러
    가지가 다 율법일 수 있습니다. 흔히 ‘스펙’이라고 부르는 조건, 자격, 실력, 배경 이런 것들은 우리가 원하는 이상과 목표
    -학교일수도, 직장이나 지위일 수도 있는-에 다가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생각하듯 율법을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지위’를
    얻으려면 이러이러한 조건을 갖춰야 한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사람은 이런 것들 하는 사람, 이런 것들은 안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믿는다면 기본적으로 이 정도는 지켜야 한다…등등의 사고는 율법적인 사고입니다. 바울은 율법이라는 분야에서 독보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박사이고 전문가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그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마스커스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사울아, 너는 율법을 정말 잘
    지키는구나!’가 아닙니다. 사울은 약간 억울하기도 당황스럽기도 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백성의 도리를 잘 하기
    위해 하는 일들이 ‘핍박’으로 보인다는 것에 당황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와 예수를 따르는 무리의 소문을 들으면서 율법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이라는 생각부터 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확신하는 것, 생명보다 값진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은 거짓이요 죄이며 악이라고
    여겼을 뿐입니다. 핍박을 한다고 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어 그는 묻습니다. ‘주님은 누구십니까?’ 여기서 그가 주님이라고 한 것은
    신앙고백적인 주님이라기 보다 예와 존경을 담아 부른 칭호였을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적으로 나의 상상인데 이 답을 듣는 순간 사울의 가슴에서는
    뭔가 하나가 뜯겨 나가는 듯 했을 것 같습니다. 가슴이 옥저오거나 커다란 구멍이 뚫리는 듯 했을 것 같습니다. 그를 지탱했던 율법이라는
    버팀목이 빠져 나가는 순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사울이 당신을 핍박한다고, 박해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엄청
    나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때가 있습니다. ‘체면’이 좋은 예입니다. 남들이 나를 이러이러하게 봐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게 있습니다. 믿을만한 사람으로 봐주길 바라고, 헛된 소리 안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지성적인
    사람, 바르게 사는 사람, 정리가 잘 된 사람…이런 이미지가 내가 지키고자 하는 나의 체면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체면이 완전히
    구겨지는 때가 있었습니다. 사기를 당해 실패를 맛보았을 때 물질적인 손해도 아팠지만 체면이 깎였다는 사실이 그 못지 않게
    고통스러웠습니다. 체면(이미지)을 지키려고 애썼던 것은 체면이 나에게 율법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게 무너지니까 나를 잃어버리는
    것 같았고, 존재의 이유도 같이 증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때 내 마음 속엔 ‘아, 잘못 살았구나. 이게 아니었구나. 믿음으로 산다고
    했지만 그게 아니었구나’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그 순간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면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셨을 지 모릅니다.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 더 귀한 것, 더 사랑스러운 것이 있다고 하니 예수님은 왜 당신을 박해하느냐고 물으실 수 밖에
    없겠지요…율법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사울은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되돌리고 싶지 않습니다. 율법으로 채워졌던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베드로에게 하는 말이 그런 것이었을 겁니다. 참된 것으로 채워진 마음에 왜 헛된 것을 다시 집어넣으려
    하냐고. 율법이 완전히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체면의 중요성이 없어진 세상은 야만의 세상일 것입니다. 주님은 율법보다 크신 분,
    율법보다 중하고 아름다운 분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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