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장 11-14절: 게바와 바울의 충돌

해설   

예루살렘 방문 이야기에 이어 사도는 얼마 후에 안디옥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 전한다. 베드로의 원래 히브리 이름은 ‘시몬’(혹은 시므온)이었는데, 예수께서 그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다. 아람어 ‘게바’는 헬라어로 ‘페트로스’ 즉 바위를 의미했다.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그 신앙 고백의 기초(바위)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겠다면서 새 이름을 지어 주셨다(마 16:18). 바울은 이 편지에서 ‘게바’라는 이름을 ‘베드로’라는 이름 보다 더 자주 사용한다(1:18; 2:9, 11, 12, 14). 베드로라는 이름에 덧씌워진 사도적 아우라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언제, 무슨 일로 게바가 안디옥을 방문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는다. 그 때 바울은 게바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격하게 충돌했다(11절). “그를 나무랐습니다”로 번역된 ‘안티스테미’는 악한 행동을 한 사람을 맞서 싸우는 행동을 의미한다. 바울이 게바와 충돌한 이유는 그의 위선 때문이었다. 그는 안디옥에서 지낼 때 비유대인 신도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곤 했다. 게바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을 통해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 의식을 버릴 수 있었고(행 10장) 그로 인해 이방인들과 합석하여 음식 먹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야고보에게서 몇몇 사람이 왔다”(12절)는 말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대표들이 안디옥을 방문했다는 뜻이다.게바는 비유대인 신도들과 음식을 먹고 있을 때 그들이 도착하자 게바는 얼른 몸을 피했다. 그러자 다른 유대인 신도들도 그를 따라갔고 바나바까지도 그렇게 했다(13절). 바울은 이 행위를 “위선”이라고 정의한다. 그 모습을 보고 바울은 격분하여 게바를 따라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따져 묻는다(14절). 게바의 행동은 예루살렘에서의 합의를 무효화 하는 것이며, 이방인 신도들에게도, 유대인 신도들에게도 혼란을 주었기 때문이다. 

묵상: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가 가장 멀다”는 말이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쉬울지 몰라도 마음으로 믿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뜻입니다. 머리에서 손과 발까지의 거리는 어쩌면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보다 더 멀지 모릅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의 환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행 10:36)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넬료의 집을 방문했고, 그 집에 모인 이방인들에게 설교하는 중에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세례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는 이 일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소환되어 변호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근거하여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예루살렘 신도들에게 설득시킵니다(행 11:1-18). 

하지만 전통은 그리 쉽게 벗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종교적인 전통은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신도들은 그리스도가 만민의 주님이며 복음은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머리로 받아 들였지만, 그 지식과 믿음대로 행동하기에 내적 저항이 너무도 강했습니다. 유대인 신도들 중에는 첫째,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으려면 유대교로 개종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유대주의자들)도 있었고, 둘째, 이방인이 찾아와 복음을 믿겠다면 받아 주겠지만 굳이 찾아가 전도할 것 까지는 없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셋째, 적극적으로 이방인들에게 찾아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초대 교회의 가장 중요한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었습니다.

게바는 세번째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방 도시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그도 역시 강경한 유대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디옥에서 게바가 취한 행동은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일 수 있습니다. 엉겁결에 그렇게 행동했을 수도 있고,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을 참을 수 없는 위선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정을 따라 게바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었습니다. 게바는 바울의 태도로 인해 심히 당황했겠지만, 뭐라 답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행동이 비겁함에서 나왔고 자신의 믿음대로 행동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도들이라고 해서 인격적으로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습니다. 게바의 행동은 책망 받아 마땅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격분하여 공개적으로 게바를 몰아 세운 바울의 행동도 잘 했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두 사도는 인간적인 약점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위선과 실패와 실수를 거듭하며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갔습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갈라디아서 2장 11-14절: 게바와 바울의 충돌”

  1. 자신을 다시 깊게 성찰하는 말씀입니다, 지난날의 위선을 다시 하번 한탄하면서 또한 도저히 가망없는 자에게 조금 희망을 안기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제자 바울의 강직함이 희망의 제자 베드로의 위선의 거울로 자신을 비춰보고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해보는 말씀입니다.주님 십자가의 문이 항상 열려있는 은혜에 감사합니다.십자가없이 한순간도 살수없는 가련한 존재를 십자가를 지나 긍휼의 하나님 품에 안겨주시는 사랑에 감사 또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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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별 것 아닌 일이 큰 일이 되고, 작은 시작이 선한 운동으로 발전합니다. 긍정적인 일도, 부정적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찮은 일에
    짜증이 났는데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중요한 일까지 망치는 날도 있고, 크다 작다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이 때에 한다는 마음으로 했는데 다른 이들도 같이 하는 선한 일이 되기도 합니다. 바울과 베드로가 부딪친 사건이 나옵니다. 바울이
    썼으니 바울의 입장에서 본대로 입니다. 바울은 아예 베드로가 ‘잘못한 일’이 있어서 그를 대면해서 나무랐다고 적고 있습니다 (11절).
    베드로가 이랬는데 나는 생각이 달라서 그와 부딪혔다…이런 정도가 아닙니다. 13절에서 그는 베드로가 ‘거짓된 행동’을 했다고까지
    말합니다. 바울은 베드로에게 심한 말을 합니다 그것도 많은 사람이 듣는데서…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처럼 살지 않고 이방인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처럼 살라고 합니까?” 예전에 이 구절을 읽을 때는 바울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멋있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엔 마음에 걸립니다. 유대인은 우월하고 이방인은 열등하다는뜻이 밑에 깔려 있구나 하는 생각부터 듭니다. 더 나아가
    이방인은 곧 “죄인”이라고 바울 스스로 바로 다음절에서 말합니다. ‘죄인’이라는 말이 유대인=선민, 이방인=죄인 이라는 등식에서
    나왔는지 아니면 예수를 믿으면 의인으로 새로와지고 믿지 않으면 여전히 죄인의 상태에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 사용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꾸짖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지적하고 넘어가야 하는 중요한 사안이라도 어떤 시간에 어떤
    자리에서 짚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바울의 이 행동은 잘한 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엄청난 고백 또한 나왔습니다. 바울은 베드로와의 불화를 마음에 짐으로 안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베드로의
    행동을 따져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바울의 율법성이었을 수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유대인’의 책임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동성애 이슈로 혼란스럽던 때 회중기도를 하는 장로님들 중에 “죄를 죄라고
    말하지 못하는 시대,” “죄는 미워하고 죄인은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던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그의
    언어는 한국에서 차별금지법안을 통과하면 큰 일이 난다고, 즉 선택적인 차별은 한국의 고유한 가치와 문화를 지키는 데 필요하니 무조건
    차별하면 안된다고 하는 금지법안을 통과 시키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죄는 극렬히 미워하면서도 그 죄인은 끔찍히
    사랑할 수 있는지…나는 그거 못할 것 같고, 죄를 죄라고 말할 수 있는, 그렇게 대놓고 말하고 지적하는 사회가 과연 좋은 사회고
    좋은 시대인지…나는 그거 아닌 것 같은데…그래서 참 아멘! 하기 어려운 기도를 듣던 때가 생각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나눕니다. 율법으로 죄인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기
    때문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베드로의 실수와 바울의 지적은 따로 따로가 아니라 같은 동전처럼 보입니다. 베드로를 지적하면서 바울도
    실수를 합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공개적으로 수모를 받지만 자신의 비겁함을 직시하는 기회도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나도 이렇게
    부족한 데는 채워지고 넘치는 데는 덜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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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gachi049 Avatar
    gachi049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을 보시고 모두 내쫒았습니다.(요한복음 2장 14~15절) 아마도 사도 바울도 이 사건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항의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성령 충만한 사도 바울에게 그런 마음을 주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런 행위는 지도자가 위선의 길을 갈때는 지적하고 고치도록 격려도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단 자신은 믿음의 공동체가 인정하는 진정한 하나님 백성이라고 인정 받을 만해야 합니다. 주님!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있을때라도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위선적인 삶을 살지 않도록 성령께서 도와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위해 끊임 없이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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