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1장 8-21절: 불의한 현실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기

해설:

7절에서 8절 사이에 삼 년 정도의 시차가 있습니다. 유대 전통에 의하면 세 살 정도 되었을 때 젖을 뗐기 때문입니다.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시대에 젖을 떼는 것은 크게 축하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벌입니다(8절). 

그 때 문제가 생깁니다. 문제의 발단에 대해 저자는 “이집트 여인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9절)고 적습니다. 이 표현으로 저자는 사라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이삭이 생기기 전에 사라는 이스마엘을 자신의 아들로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가 생기고 나니, 그를 하갈의 아들로 본 것입니다. 그러자 사라의 눈에 이스마엘의 모든 행동이 거슬려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요구합니다(10절). 그를 그냥 두면 맏아들의 권리를 따라 아브라함의 재산을 나누어 주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부당한 요구 앞에서 괴로워합니다(11절). 그는 기도로써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여쭈었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통해 한 민족이 나오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12-13절). 이 때 이스마엘은 십육 세 쯤 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찍”(14절) 아브라함은 가죽 부대에 물을 담고 빵을 준비하여 하갈의 어깨에 실어 줍니다. “내보냈다”는 표현은 이혼을 암시합니다(신 22:19). 열여섯 살 된 이스마엘에게 짐을 지우지 않은 것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를 애지중지 키웠던 것 같습니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데리고 “브엘세바 빈 들에서 정처없이 헤매고 다녔다”는 말은 갈 바를 모르고 방황했다는 뜻입니다. 

정처 없이 방황하는 동안 가지고 나온 물이 떨어져 버립니다(15절). 유약하게 자란 이스마엘이 허기와 갈증에 지쳐 기진맥진 하는 것을 보고 하갈은 절망에 빠집니다. “덤불 아래에 뉘어 놓다”는 말은 “죽기를 기다리다”라는 뜻입니다. 하갈은 차마 아들이 죽는 꼴을 볼 수가 없어서 화살을 쏘아 닿을 정도의 거리에 떨어져 앉아 아들 쪽을 바라 보며 통곡합니다(16절). 어미의 통곡을 듣고서 이스마엘도 슬피 웁니다(17절). 

그 때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에게 다시 나타나십니다. 천사는 하갈에게,  아이의 울음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으며 장차 그를 통해 큰 민족을 일으키실 것이니, 힘을 차리고 일어나 아들을 달래고 일으키라고 말합니다(17-18절). 천사의 위로를 듣고 고개를 들어 보니 곁에 샘이 보입니다(19절). 그는 가죽 부대에 물을 담아 아들에게 마시게 하고는 바란 광야로 가서 그곳에 정착합니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 아이와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셨다”(20절)고 적습니다. 하나님은 이삭만을 사랑하여 이스마엘을 내친 것이 아닙니다. 이삭에게는 그 나름의 계획이 있었고, 이스마엘에게는 또 그 나름의 다른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바란 광야에서 강인한 남성으로 성장했고, 혼기가 찼을 때 하갈은 이집트에서 며느리를 구하여 결혼 시킵니다(21절).

묵상:

사라와 하갈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은 분별을 잃은 노인의 편애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불의한 사회 구조와 불의한 인간들 사이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사라는 매정하고 욕심 많은 여주인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에 대해서만큼은 줏대 없이 휘둘리는 남편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한 그들의 처사는 책망 받아 마땅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사라가 하갈에게 갑질을 해대고 있는 셈입니다. 이 일로 인해 고민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을 들어 주라고 하십니다. 

정의와 공평의 하나님이 이러실 수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한 대책을 세워 두고 계셨습니다. 이스마엘을 통해 큰 민족을 세우려는 그분의 계획이 이루어지려면 지금 당하는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사라의 소행은 분명 잘못 된 것이지만, 그 잘못을 사용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빅 픽처를 만들어 가십니다. 임신 중에 하갈이 쫓겨났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사라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 인내하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는 그 처사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 보니, 그것은 이스마엘이 청년으로 성장할 때까지 아브라함의 보호를 받게 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사라의 하나님은 하갈의 하나님이기도 하셨고, 이삭의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하나님이기도 하셨습니다. 

인간 현실을 보면 “하나님의 정의는 과연 살아 있는가?”라는 의문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온 우주의 운행과 인류의 역사를 다스리고 있다고 전제하고 보면, 하나님의 처사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을 보아도 그렇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저토록 악한 권력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의 처사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개인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때로 너무도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겪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가?”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당한 일이 딱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인간의 실수와 악행을 통해 하나님이 빅 픽쳐를 그려가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때로 당하는 부당한 일들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악의 현실에 대해 침묵하고 견디기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악의 현실을 고칠 수 있으면 고치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악을 제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개인적인 일이든 사회적인 일이든 국가적인 일이든, 당하고 견디는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시며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통해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심을 믿는다면, 하갈처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날 힘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이 빚어가시는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Comments

4 responses to “창세기 21장 8-21절: 불의한 현실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기”

  1. 사라의 권유로 아브라함과 하갈사이에 이스마엘이 태어난 그자체가 문제이지만 모든 인간사가 불완전한 인간의 역사입니다. 사라의 권유도 줒대없는 아브라함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영혼구원의 하나님의 계획은 신실하게 계속되는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십자가가 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녀들이 다시돌아와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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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chi049 Avatar
    gachi049

    피조물은 창조 주께서 일하시는 진정한 뜻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하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사탄은 이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는 날마다 말씀을 먹고 하나님과의 대화의 끈을 놓지 않음을 통해 영혼이 강건하게하여 어떤 사탄의 훼방에도 이겨낼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실 때 고난을 통해 받을 만한 자격을 만들어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백성들의 앞길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아버지께서 절대로 버리시지 않음을 믿고 고난의 뒷편에 숨겨진 축복을 바라볼 수 있는 영의 눈을 밝혀주시고 시련과 고난을 견딜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도와주시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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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늙은 사라가 아들을 낳은 것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삭의 탄생은 아브라함의 가문에 내린 특별한 은혜의 예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사라의 위치가 전에도 높았지만 이삭을 낳은 뒤엔 더더욱 높아졌을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틴에이저 이스마엘은 두 세살 짜리 동생을 놀립니다. 이삭이 밉고 우습게 보여서 놀린 것일 수도 있고, 틴에이저의 얕은 생각에서 나온 충동적인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그걸 보는 사라의 눈에서 불이 번쩍 일어납니다. 사라는 남편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정리하라고 요구합니다. 아브라함이 ‘매우’ 괴로와했다니 사라의 요구는 간청의 수준을 넘어 협박에 가까왔을 것 같습니다. 주님께 기도한 아브라함은 물과 양식을 준비해 모자를 내보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어떤 인사를 주고 받았을까 상상하기조차 피곤합니다. 하갈은 사라한테 내쫓겼고, 이번엔 아브라함한테 내쫓깁니다. 이제는 아들 밖에 없습니다. 광야를 헤매고 다니는 모자의 신세가 딱하기 그지 없습니다. 오늘 이 장면을 읽는데 하나님께서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들으셨다는 대목에서 나 또한 주저앉게 됩니다. 열 여섯살 소년이 웁니다. 아이도 아니고 청년도 아닌 어정쩡한 소년입니다. 엄마가 통곡하는걸 듣고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는 이스마엘을 보는 하나님은 우리의 일에 관심을 갖는 하나님, 우리를 지나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사라의 감정도, 아브라함의 고민도, 하갈의 억울함과 이스마엘의 혼란도 이해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사람들의 요청을 다 들어주십니다. 우리는 자기 형편에서 자기의 시각으로 주님께 구합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기도는 늘 부족하고 불완전합니다. 요즘 나는 언어로 펼칠 수 없는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한숨과 탄식이 전부입니다. 이스마엘이 우는걸 들으신 하나님은 엄마 하갈의 눈을 밝혀 우물을 보게 하시고 거기서 물을 얻어 아들을 일으키게 하십니다. 아들과 엄마가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우며 살아갈 것을 예고하는 듯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아브라함 집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 만을 보았을 것입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총애를 입었다고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돌보신 하나님의 스토리는 뒤늦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집에서 쫓겨난 모자의 스토리를 기록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광야에서 물이 나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자비를 베푸시는 당신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내게도 우물이 보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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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kkim2 Avatar

    하나님의 그림 – 당장은 제 눈에 펼쳐진 그림이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것이 부분이고 과정일 것이라고 믿는 강력한 신앙을 갖기 원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예전에 큰 고래를 그리던 어떤 공익광고가 생각이 나기도 합니다). 분명하게 그리고 한치의 오차도 없는 가장 완벽하고/완전한 그림을 그리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과정에서 세상적인 기준으로 최고가 아닌, 저에게 “딱 맞는” 최상의 것을 허락하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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