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장 17-26절: 예배자가 나타나다

해설:

4장 16절과 17절 사이에도 상당한 시간적 간격이 있습니다. 가인이 결혼할 아내를 만난 것은 아담과 하와를 통해 자손이 번성한 후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5장 3-5절에 의하면, 아담은 구백삼십 년을 살았는데, 백서른세 살부터 자녀를 낳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백년의 시간이면 한 부부를 통해 태어난 자손들이 큰 마을을 이룰 정도로 번성합니다. 

가인은 “에덴의 동쪽 놋 땅”(16절)에서 자리를 잡습니다. ‘놋’은 ‘떠돌아 다님’이라는 뜻입니다. 가인의 실존 상태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는 아내를 얻어 결혼한 후에 비로소 정착합니다.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고, 가인은 그를 에녹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착을 영구화 하기 위해 도시를 세우고 아들의 이름을 붙여 줍니다(17절). 

18절은 에녹에게서 라멕에게 이르는 족보입니다. 성경의 족보에서 사용되는 “낳고”라는 말은 반드시 부모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낳고”라는 표현으로 수대를 뛰어 넘기도 합니다. 

이름만을 나열하던 저자는 라멕에게서 멈추어 자세히 설명합니다. 라멕은 두 아내를 둡니다(19절). 이 사실을 통해 저자는, 죄가 증폭되어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망가진 결과 중 하나를 보여 줍니다. 죄는 결혼 제도까지 왜곡시킵니다. 라멕은 두 아내에게서 세 아들을 얻습니다. 저자는 그들에게서 인류의 문화와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전합니다. “장막을 치고 살면서, 집짐승을 치는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20절)는 말은 유목 문화를 가리키고, “수금을 타고 퉁소를 부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21절)는 말은 예술 문화를 가리키며, “구리나 쇠를 가지고, 온갖 기구를 만드는”(22절) 것은 물질 문명을 가리킵니다. 인류가 발전시켜 온 산업과 예술과 문명은 인간의 실존적인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라멕은 세 아들을 통해 도시를 번성시키고 세력을 얻자 기고만장하여 거침 없이 악을 행하고 그것을 자랑삼아 떠듭니다(23-24절). 인간의 죄는 물질 문명을 낳고, 물질 문명은 인간의 죄를 더욱 증폭시킵니다. 죄의 악순환이 점점 심해지는 것입니다.  

아벨이 죽은 후에 아담과 하와는 아들을 얻고 셋이라고 이름 짓습니다(25절).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이후에도 아담과 하와는 계속 자녀를 낳았습니다. 셋은 자라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저자는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하였다”(26절)고 적습니다. 가인의 자손들이 거대한 도시를 세우고 산업과 예술과 문명을 발전시키고 있을 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뜻입니다. 

묵상:

죄의 결과 중 하나가 불안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분을 떠나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 존재의 뿌리는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나무가 대지에서 뿌리 뽑히는 것 혹은 물고기가 물에서 건져내어 지는 것과 같은 현상이 죄를 선택한 인간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 인간은 우주의 미아가 되어 버린 것이고, 그것이 존재론적인 불안의 원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하고 나서 “에덴의 동쪽”(3:24)에 거주합니다. 가인은 동생을 죽이고 나서 “에덴의 동쪽 놋 땅”(4:16)으로 도피합니다. 여기서 “에덴의 동쪽”이라는 말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상태에 대한 비유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는데, 가인은 동생을 죽이고 나서 더 멀리 도피했다는 뜻입니다. 가인이 정착한 땅의 이름 놋은 ‘떠돌아 다님’이라는 뜻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불안을 안고 살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가인은 존재론적인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도시를 세웁니다. 그가 세운 에녹 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에덴 동산과 대비됩니다. 에덴 동산은 모든 필요가 채워져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안식과 만족과 평안이 있습니다. 반면, 가인이 세운 에녹 시는 모든 것이 결핍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 결핍은 존재론적인 불안을 더 심하게 만들었고, 가인의 후손들은 산업과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켜 그 결핍을 해결하려 합니다. 결핍이 해결되면 불안이 해결될 줄 알았는데, 불안은 더욱 깊어지고 강해집니다. 깊어지고 강해진 불안감은 더 크고 흉악한 죄로 비화합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악순환의 고리에 갇혀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 즈음에 그 불안감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예배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물질 문명을 발전시키는 것에 희망을 두고 살 때,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을 예배 했습니다. 비록 에덴의 동쪽에 살고 있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여 다시 그분 안에 뿌리를 두려는 노력이었습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창세기 4장 17-26절: 예배자가 나타나다”

  1. gachi049 Avatar

    하나님 밖에 모르고 있던 아담과 하와가 새로운 세계를 바라봄으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서 동물적 본능으로 자녀들을 생산하고 그들의 재능에의해 물질 문명의 발달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어두어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뿌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자랐기에 언젠가는 하나님에게 돌아와야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들중 소수자들이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화려한 물질로인하여 눈이 가려져 아직도 먼져 믿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여 주셔서주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지상명령, 복음전파를 행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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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인류의 문명이 (컴퓨터 AI 대량 학살무기 미사일)극치로 발달되어 가고있는 반면에 인간의 죄성은 갈수록 더 악랄해저서 온인류가 불안해갑니다. 정신질환이 증폭하고 있습니다.생각과 마음으로 서로죽이며 삽니다. 살길은 오직 십자가의 길인것을 세상에 알리는 사귐의 소리 식구모두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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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가인은 아벨을 죽인 죄의 벌로써 에덴의 동쪽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쫓겨납니다. 그의 이마에는 표시가 있어서 사람들은 그를 죽이지 않습니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일곱 배나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죄를 묵인하는 것은 아닐텐데 왜일까 생각해 봅니다. 죄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또 다른 사람이 가인처럼 죄를 짓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임으로써 땅에게도 못할 짓을 했습니다. 동생의 피를 땅에 쏟음으로써 땅은 가인에게 적대적인 환경이 됩니다. 가인은 평생 떠돌아 다니는 신세로 사람을 경계하며 사는 고독의 벌을 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살던 중에 아내를 얻고 자식을 낳습니다. 그의 자식들은 또 자식을 낳아 기르고 번성하여 후대를 이어 갑니다. 그런 후손 중에 라멕이 있었는데 그는 자기에게 상처를 입힌 젊은이를 죽이고 반성 대신 조상 가인에 빗대어 자기의 이름을 자랑합니다. 라멕의 아들들에게서 문명과 문화가 갈라져 나옵니다. 창세기는 라멕에 대해 길게 씀으로써 그의 역사적 위치가 남다르다는 인상을 줍니다. 아담과 가인으로 인해 저주를 받은 땅이 라멕의 대에서는 저주가 풀린걸까요. 가인의 이주와 정착 성공 스토리는 또다른 불행의 시작일까요. 이쯤에서 아담과 이브는 ‘아벨 대신에’ 다른 아기를 얻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셋인데 그의 아들 에노스 대에서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예배에 대한 이야기는 한 줄로 그칩니다. 여기서 또 생각해 봅니다. 사람은 호의적이지도 않고, 호락호락 하지도 않은 땅을 길들이기 위해 온종일 씨름하며 생명을 이어갔을 것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정복할 수 없는 자연을 상대로 고통과 기쁨을 경험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도 문득 문득 자기의 근원을 생각하기도 하고, 커다랗고 위대한 어떤 존재를 상상하고 의지하면서 살았겠지요. ‘어떻게’ 예배했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단순한 예배였을 것입니다. 라멕의 아들 대에 와서 시작한 유목과 음악과 연장 문화는 예배를 드리면서 깨닫게 된 인간의 좌표에 대한 성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창세기를 여기까지만 읽어도 인간사의 여러 모습이 담겨 있음을 봅니다. 질서와 혼돈이 공존하고, 감정과 이성이 뒤섞입니다. 의무와 책임이 질투와 분노에 묻힙니다. 죄와 벌, 선의와 악의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고독은 인간의 기본값처럼 보이고, 노동과 절망은 일상입니다. 땅에 발이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는 인간의 인식에 ‘예배’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나를 찾으라. 나의 이름을 부르라” 하시는 여호와의 음성을 누군가가 처음으로 듣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멀리서 동이 터오는 것 같이 희미하고 작은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Men and women began praying and worshiping in the name of God.” 하나님도 에덴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에덴은 기억 속의 정원이 되고, 하나님은 내 마음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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