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장 1-16절: 죄를 이기는 힘

해설:

1-3장과 4장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1-3장은 현재 인간이 처해 있는 실존 상황에 이르게 된 과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고, 4장 이하에서는 타락 이후에 인간의 현실존이 확정된 이후에 일어난 일을 그리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1-3장의 이야기는 현실도 아니고 비현실도 아닌, 신비적인 분위기로 장면을 연출하고, 4장부터는 현실적인 분위기로 연출해야 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가인과 아벨, 두 아들이 태어납니다. 후에 보면, 둘 사이에는 더 많은 자녀들이 생겼습니다. 구백삽십 년을 산 아담은 백서른세 살에 첫 아들을 낳고 나서 팔백 년 동안 아들딸을 낳았습니다(5:3-5). 가인과 아벨은 처음 태어난 자녀들입니다. 그들은 자라서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양들을 쳤습니다(1-2절). 그들은 각자 자신이 노동하여 얻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4-5절). 7절에 의하면 가인의 제사가 올바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물에 문제가 있었는지, 제사를 드리는 그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동생의 제물은 받아 들여진 반면 자신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자 가인은 하나님에게 분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잘못은 당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지 않은 제물을 드린 그 자신에게 있음을 밝히면서, 그 분노가 죄로 흐르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합니다(6-7절).

불행하게도, 가인은 하나님의 경고를 가볍게 여깁니다. 그는 분노에 압도되어 동생을 돌로 쳐죽이고 숨어 버립니다(8절).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자(9절), 가인은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반문합니다. 그는 형으로서 아우에게 가져야 할 마땅한 의무와 책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의 죄를 꾸짖으시면서 그가 그 죄로 인해 무거운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0-12절). 그제서야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죄를 지었는지를 자각한 가인은 하나님께 자비를 호소합니다(13-14절).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누구를 만나든지 가인을 해치지 못하게 하십니다(15절). 가인은 주님의 낯을 피하여 에덴의 동쪽에 있는 놋 땅으로 이주합니다(16절). 이 대목에서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14절) 혹은 “가인을 죽이는 자는”(15절)이라는 표현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지구 상에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 밖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의 자녀들을 통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날 미래를 두고 하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묵상: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신 말씀 즉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 하려고 한다.”(7절)는 말씀이 마음에 큰 울림을 줍니다. 죄 자체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를 인격적인 존재로 경험합니다. 사탄이 우리 마음을 교란시켜 죄를 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우리의 존재는 죄 성에 깊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죄가 우리의 ‘존재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언제라도 들어와 사로 잡으려는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사탄은 그것을 고리로 삼아 우리를 죄로 이끕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경계 하면서 죄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조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죄를 도구로 하여 우리를 집어 삼키려는 사탄의 공격을 우리 홀로 당해 낼 수 없습니다. 자연인으로서의 우리는 죄의 공격에 너무도 무력하게 넘어집니다. 우리의 존재를 성령께 내어 드려 그분의 능력에 사로 잡히지 않으면 우리는 죄를 이길 수도 없고 죄 성을 치료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주기도’를 통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악’은 중성 명사로 번역할 수도 있고 남성 명사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신약학자들의 다수는 남성 명사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다만 악한 자에게서 구하여 주십시오”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만일 이 명사가 복수로 사용되었다면 “악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수 명사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악한 자”는 바로 사탄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말한 “영적 싸움”입니다. 사탄의 교란에 넘어가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죄의 유혹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의 영력을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존재의 문지방에 죄가 늘 도사리고 있음을 의식하고 늘 성령께 의지해야 합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창세기 4장 1-16절: 죄를 이기는 힘”

  1. 지금까지 남들과 비교하고 시기하며 미워하고 수 많은 사람들을 마음으로 죽인 사형수입니다. 경쟁하며 보다 더 높아지고 앞 서갈려는 욕망의 스트레스로 탈진된 처지입니다. 그럼에도 십자가의 사랑으로 품어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말씀안에서 낮아지고 섬기는 삶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모든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삶이 주님께 올려 드리는 거룩한 산제물이 되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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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chi049 Avatar

    날마다 부족하고 연약하여 자신도 알게 모르게 솟구치는 죄성을 이길 능력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사탄은 이러한 나약함을 터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탄의 먹이가 됨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도 부활의주님, 성령님께 나의 온 마음과 육신을 맡깁니다. 동행하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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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는 에덴의 동쪽에 정착해 가정을 꾸립니다. 가인과 아벨 두 아들을 낳아 기릅니다. 둘 만 낳았는지, 둘의 이야기만 기록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창세기를 처음 읽었을 때 가졌던 여러 궁금증은 세월을 지나며 조금 옅어지긴 했지만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인류의 기원’이라고만 생각하고 읽으면 가인의 앞날 즉, 집을 나와 유랑하면서 당할 위험이나 여자를 만나 자기 일가를 이루는 일 등을 논리적으로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오늘은 문득 아담의 이야기가 ‘지구상에 있는 유일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인간 드라마로 읽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혹은, 자신의 삶을 창조주와의 관계 안에서 보고 이해한 한 사람(아담)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러면 첫 사람 아담의 죄와 슬픔은 특정한 어느 한 사람의 죄와 슬픔이 아니라 죄와 슬픔의 제네시스가 되고, 아담의 아들들의 다툼은 보통 사람들이 겪는 형제와의 갈등의 제네시스가 됩니다. 일방적인 통보처럼 들리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도 – 가인은 불합격 아벨은 합격, 가인은 리젝트 reject 아벨은 억셉트 accept – 문맥 안에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일어난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경험 세계로 이 사건을 끌고 들어와 보면 오히려 단순하게 풀립니다. 기대한대로 진행되지 않는 일, 예기치 않은 일, 내가 손을 쓸 수 없는 일…제사 이야기는 이런 일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스토리의 전개로 보면 가인과 아벨은 처음으로 제사를 드린 것처럼 보입니다. 각자 노동을 해서 소산을 낸 뒤에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올렸을 겁니다. 가인은 자기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하나님께 화가 납니다. 화를 내는 이야기는 여기가 처음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뱀의 꼬임에 넘어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화를 내셨을 것 같지만 그런 표현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벌을 내리실 때 화를 내시며 말씀하셨을 것 같은데 그런 설명은 없습니다. 가인이 화를 냅니다. 분노의 대상이 하나님인지 아벨인지 혹은 자신인지 알 수 없습니다. 셋 다일 것 같습니다. 가인이 처음으로 하는 것이 또 있습니다. 말대꾸를 합니다. 대놓고 하나님께 대듭니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Am I my brother’s keeper? 해설에서 목사님은 가인이 형으로서 동생에게 가져야할 마땅한 의무와 책임을 알고 있었다고 보십니다. 그것과 더불어 여기서 가인은, 내가 그것만 하는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I am more than my brother’s keeper! 라고 자기 존재를 주장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스스로에게 ‘동생을 잘 돌보고 가르쳐서 좋은 제사를 올리게 했으니 나는 꽤 괜찮은 형이네’ 까지는 갈 수 없었던 가인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또 항의합니다. “이 벌은 제게 너무 무겁습니다 (13절).” 아! 이 구절은 나의 단골 레파토리입니다. ‘사는게 너무 힘듭니다,’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벌을 주십니까,’ ‘너무 하십니다,’ ‘나만 잘못합니까,’ 가인은 동생을 죽인 큰 죄인이지만 나는 아닌데요…벌은 늘 무겁게 여겨집니다. 잘못에 비해 벌이 너무 무겁다고 느낍니다. 죄가 깊은 곳에 은혜가 깊다는 말이 여기서 시작되지 않았을까요. 왜냐면 가인이 자기가 받을 형벌이 무섭다고 징징거리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누구든지 가인을 죽이는 사람은 일곱 배나 벌을 받을 것이다 (15절).” 반전입니다. 은혜입니다. 가인이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은 가인의 표시를 보고 (히브리 사람들 집 문에 그린 표시) 죽이지 않습니다. 가인은 벌도 받고 은혜도 받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추방될 때도 하나님은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죄와 반항의 스토리에 은혜도 들어 있습니다. 혹시 하나님은 울지 않으셨을까요. 아담이 떠난 뒤에, 가인이 떠난 뒤에 하나님은 돌아서서 한숨을 쉬시지 않으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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