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5장 33-41절: 하늘이 찢어지다!

해설:

예수님은 오전 아홉 시쯤에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로부터 세 시간 쯤 지나자 갑자기 어둠이 온 땅을 덮습니다. 그 상태는 오후 세 시까지 계속 됩니다(33절). 이 현상은 예수님의 죽음이 우주적 사건이라는 암시합니다. 

죽은 듯이 계시던 예수님은 갑자기 “엘로이 엘로이 레마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치십니다(34절). 헬라어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쓰고 있던 마가는 가끔 그분이 사용하셨던 아람어를 그대로 씁니다(5:41; 7:34; 14:36). 이것은 시편 22편 1절에서 온 것입니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 같은 처절한 고난을 당하여 하나님께 절규하며 구원을 호소합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그 기도를 암송하며 묵상하셨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고난 당하는 동안 그분은 이 시편을 생각하고 그 첫 절을 기도로 올리신 것입니다. 한 절만 기도했지만, 그분의 마음에는 22편 전체를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그분이 엘리야를 부른다고 오해합니다(35절).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처지를 애처럽게 보았는지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셔서 그분의 입에 대어 드립니다(36절). 갈증을 줄여 드리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십니다(37절). 나중에 안 일입니다만,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성전 내부에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집니다(38절). 이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두꺼운 장막을 말합니다.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그 휘장을 지나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에게 나아갔습니다. 이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르고 있던 장막을 하나님 자신이 손수 찢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값을 담당하고 돌아가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벽이 허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처형을 책임지고 있던 백부장은 모든 상황을 유심히 관찰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운명하신 후에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39절)고 고백합니다. 그가 무엇을 보고 그런 고백을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예수님에 대해 온전한 신앙 고백을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가장 온전한 고백입니다. 그 이전에 예수님께 한 고백들은 모두 설익은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거치지 않은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그 자리에는 갈릴리에서부터 그분을 따르던 여인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40절) 즉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메가 그들이었습니다. 그들 외에도 몇몇 여성 제자들이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묵상:

예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1:10)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분에게 임하십니다. “갈라지고”라는 말은 “찢어지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리워져 있던 ‘하늘의 장막’이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찢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분 위에 임하십니다. 이것은 장차 예수님을 통해 일어날 일에 대한 예고요 전조였습니다. 그분은 죄 없는 분으로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분 자신의 죄가 아니라 인류의 죄를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로부터 삼년 여가 지난 후, 그분은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 지고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드립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집니다. 요단 강에서 예고된 그 사건이 실현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막을 찢어버리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히 10:19-20)라고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께서 생명을 바쳐 그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희생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제대로 안다면, 우리는 가인처럼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형벌이 두려워 떨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아빠!”라고 부르며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나아갑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마가복음 15장 33-41절: 하늘이 찢어지다!”

  1. 나의 모든죄와 인류의 모든죄를 지시고 죽으신 어린양 예수그리스도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동시에 진정으로 황송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시간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 은혜로 감히 주님의 지성소에 나왔습니다. 앞으로 항상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주님과 귀하고 깊은 사귐을 갖고 주님 닮아가기를 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며 나머지 삶을 살아내는 사귐의 소리 가족 모두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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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chi049 Avatar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의 절규를 들으시고 아픈마음을 3시간 동안 어둠을 통해 나타내 보이셨슴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림을 느낌니다.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신 예수님을 아직도 영접하지 않은 불쌍한 이웃의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남은 여정이 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 합니다.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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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던 때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는 때를 나란히 놓고 생각해 봅니다. 해설에서 짚어주는 대로 대칭 장면들이 몇 군데 있습니다. 세례와 죽음은 시간대로는 떨어져 있는 사건입니다. 세례가 먼저이고 죽음은 나중입니다. 세례 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 앉는 것과 십자가 사건 때 성전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두 쪽이 된 것은 이미지적으로 비슷합니다. 하늘이 반응했다는 점이 같습니다. 세례 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십자가 앞에 서 있는 백부장의 입에서 “이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소리가 나옵니다. 세례 때는 하늘이, 십자가 때는 인간이 고백합니다. 시간대로는 3년이 흘렀고, 공간으로는 요단강과 골고다 언덕 사이의 거리를 두고 일어난 입니다. 예수님의 시작은 하나님이고 끝은 인간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그 가운데를 살았습니다. 두 세계를 다 품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조화와 균형입니다. 화해와 친교입니다. 사랑과 나눔입니다. 창조와 완성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던 시대에도 지금 우리 시대에도 세상은 예수를 닮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따르지 않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합니다. 고난의 잔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어제 신문에서 대니얼 카네만 Daniel Kahneman 박사의 부고를 읽었습니다. 심리학자로서 2002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학자입니다. 현대 경제학에 미친 그의 심리학적 통찰의 폭은 넓고도 깊습니다. 그가 쓴 책들 중에는 대중적인 호응을 받은 책도 있는데 몇 년 전에 나온 “Thinking, Fast and Slow”가 대표적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은 시스템 1 (Fast)과 시스템 2 (Slow) 두 체계를 작동시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첫번째 시스템은 빠르게 본능적이고 감정적으로 움직이고 두번째 시스템은 느리게 신중하고 이성적으로 움직입니다. 어떤 결정이나 선택, 판단을 할 때 두 가지를 다 동원합니다. 개인의 기질이나 습관과 훈련에 따라 한쪽 시스템에 더 의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같은 조건과 상황일지라도 시스템 1과 시스템 2를 각각 통과한 뒤에는 다른 결과를 얻습니다. 사람과 사회를 설명하는 그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부고 뉴스를 읽고 책을 주문했습니다. 차근차근 읽어가면서 (slow thinking) 그의 연구가 맺은 과실에서 영양을 취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보아도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유명한 사람이라 그런 것은 아닙니다. 뭔가 (책, 노래, 땅…)를 남기기 때문에 죽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죽으면 다 끝”이라는 빠른 생각을 하면서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느린 생각은 느리고 느리고 또 느리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질문이며 답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시간부터 오늘 숨을 거두실 때까지 시간은 참 빨리 흘렀습니다. 우리는 빠르게 생각하고 결정했습니다. 오늘부터 시간은 천천히 흐릅니다. 천천히 오래 오래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내 안이 완전히 빌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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