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51장: 의와 공의

해설:

1절부터 8절까지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의’에 대해 말씀하신다.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아”(1절)를 직역하면 “의를 따르는 사람들아”가 된다. 여기서의 의는 ‘쩨데크’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한다. 죄로 인해 어긋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잡히는 것이 ‘구원’이다. 바빌로니아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은 마치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것처럼 혹은 구덩이에서 꺼낸 것처럼 약속의 땅에서 떨어져 나왔다. 주님은 그들에게 아브라함과 사라를 생각해 보라고 하신다(2절). 그들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하나님의 선물로 아들을 얻었다. 하나님은 그 능력으로 “광야를 에덴처럼” 혹은 “사막을 주님의 동산처럼”(3절) 만드실 것이다. 포로된 유다 백성을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에게, 그분의 ‘의’가 만백성의 빛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다(4절). 여기서의 의는 ‘미쉬파트’로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미쉬파트’는 악을 일삼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되고(8절), 신실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된다. 하나님은 “나의 의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고, 나의 구원이 이미 나타났으니, 내가 능력으로 뭇 백성을 재판하겠다”(5절)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의를 아는 사람들” 즉 “마음 속에 내 율법을 간직한 백성들”(7절)은 죄악 된 현실을 보고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하며” 그분의 “의는 꺾이지 않을 것”(6절)이기 때문이다.

9절부터 11절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사야의 응답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며 행하신 전능의 능력들을 열거하면서 그 능력을 떨쳐 유다 백성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렇게 되면 모든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기뻐하게 될 것이다. 

12절부터 16절까지는 하나님의 응답이다. 이것은 이사야를 통해 유다 백성 전체에게 전하는 말씀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망각하고 이 땅의 통치자들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은 “죽을 인간들”이며 “한갓 풀에 지나지” 않는다(12-13절). 주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고 포로로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키실 것이다(14-16절).  

17절부터 23절까지는 이사야가 유다 백성에게 하는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진노의 잔”(17절)을 충분히 마셨다. 유다 백성 중에 그들을 구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18절). 전쟁으로 땅은 황폐해지고 자녀들은 모두 포로로 끌려 갔기 때문이다(19절). 포로 생활 칠 십여 년 후에 그들은 만취한 사람처럼 쓰러져 있다(20절). 이사야는 낙심해 있던 동포들에게 자신의 말에 귀 기우리라고 하면서(21절), 주님께서 진노의 잔을 그들에게서 거두어 그들을 괴롭힌 자들에게 마시게 하실 것이라고 전한다(22-23절). 

묵상: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의‘(짜디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다스림 아래에서 모든 것이 제 모습을 얻고 다른 존재들과 어울려 하나의 큰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 ‘공의’(짜디크)입니다.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좋다”(토브)라고 하셨습니다. 

그 아름답고 평화롭고 복된 상태를 깨뜨린 것이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로 선택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 균열이 생겨났습니다. 모든 관계가 깨어지고 왜곡되었고,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간사와 세상사에서 겪는 모든 고난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은 바빌로니아에게 패망하고 칠 십여 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충분히 마셨습니다. 절망의 깊은 구덩이에 누워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회개하고 그분에게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의’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공의’를 행하실 것입니다. 회개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는 구원입니다. 

“진노의 잔”이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대신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마 26:38)라고 하셨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그 잔을 마시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그 잔을 마시지 않고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의’와 ‘공의’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짜디크) 거듭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미쉬파트).    


Comments

3 responses to “이사야서 51장: 의와 공의”

  1. 마땅히 저주받아야할 인생을 십자가의 은혜로 품어주신 사랑에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그러나 손과 발과 마음이 말과 생각을 따르지 못하는 초라한 인생입니다. 구원의 말씀을 입술로 말고 삶으로 어둠에서 헤매는 친족과 이웃에 전하기를 원합니다. 마지막 숨이 코에서 떠날때 까지——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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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ung mae kim

    한 해를 돌아보는 계절입니다. 사는 것은 능동적으로 내가 행하는 일들과 내게 일어나는 일들이 같이 채워져 가는 일입니다. 능동적인 부분에는 나의 의도와 목적이 담기고, 수동적으로 겪게 되는 부분에는 나의 반응과 해석이 담깁니다. 신앙은 수동적인 영역인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자주 선택해야 하는 일을 일을 만나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듯이, 알 수 없는 분을 아는 듯이 느끼는 신비를 살아가는 것 또한 신앙입니다. 1절에 바위에서 떨어져 나왔다, 채석장을 생각하라고 하는데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는 이 계절에 어울리는 이미지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화를 캐는 계절, 살아온 시간 속에서 은혜의 보석을 발견하는 계절을 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의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우리는 모양이 아니라 성품이 하나님과 같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선함과 공의로움, 옳음과 연민이 균형을 이룰 때 평화가 깃듭니다. 우리 마음에도 평강이 자리잡고, 생활과 세상도 편안함을 누립니다. 공의와 사랑은 인간 사회의 이상 idea/ideals 이지만 일상 속의 여러 관계 안에서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는 가치이기도 합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은연 중에 추구하는 이미지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으로 보였으면 좋겠다 하는 이미지가 있다는겁니다. 상대방이 나를 그렇게 보는 지는 또다른 문제입니다. 나는 나를 우아한 사람으로 포장해서 보여주는데 상대방은 나를 우아하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상대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이미지들을 분류하다 보면 두 가지 정도가 된답니다. 존경 respect 인가, 사랑 love 인가 두 가지랍니다. 사랑 받고 싶은가, 존경 받고 싶은가. 반복해서 선택하다가 차차 한 쪽으로 굳어지게 된답니다. 사랑과 존경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두가지가 같이 섞여 있는 것 같아도, 오른손-왼손, 좌뇌-우뇌, 남성-여성, 선천-후천, 내향-외향….등등의 ‘구분’은 늘 있어 왔고 여전히 유효한 토론거리입니다. 어렸을 때 어른들 대화에 ‘인복’과 ‘인덕’이라는 말이 종종 등장하는 것을 듣고 뭐가 다르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인복이 있는 사람은 남에게서 사랑을 많이 받는다는거고, 인덕이 있는 사람은 남들에게 사랑을 많이 준다는거라고 누군가가 답을 해줬습니다. 복은 받는거고, 덕은 베푸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보다 더 깔끔한 정리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어디 가서 중요한 사람으로 대접 받기를 원하는지,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여겨지기를 원하는지…둘 다 원하고 갖고 싶겠지만 실제로는 어느 한 쪽으로 기울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공의와 사랑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목표점이지만 일상에서 만들어가는 나의 성품은 한 편으로 쏠릴 뿐 아니라, 그마저도 욕망의 지배를 받아 뒤틀어진 모습일 때가 많습니다. ‘권력’의 지배 밑에서 존경과 사랑, 의와 연민이 어긋나고 깨지고 또 임의로 적용되기 일수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온전하심에 의지해 나의 부족함을 메꾸기 원합니다. 주님의 완전하신 사랑에 의지해 나의 불완전한 사랑이 바로잡아 지기를 원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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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41126 이사야 51장

    “나의 백성아, 나에게 귀를 기울여라.
    나의 백성아, 내 말을 귀담아 들어라.
    법은 나에게로부터 비롯될 것이며,
    나의 의는 만백성의 빛이 될 것이다.”(사51:4)

    “너희를 위로하는 이는 나,
    바로 내가 아니냐?
    그런데 죽을 인간을 두려워하며,
    한갓 풀에 지나지 않는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는, 너는 누구냐?
    너희는 잊었다. 너희를 지으신 하나님, 하늘을 펴시고 땅을 세우신 주님을 잊었다.”(사51:12-13)

    하나님은 유다 백성에게, 그분의 ‘의’가 만백성의 빛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다(4절). 여기서의 의는 ‘미쉬파트’로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미쉬파트’는 악을 일삼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되고(8절), 신실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된다. 하나님은 “나의 의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고, 나의 구원이 이미 나타났으니, 내가 능력으로 뭇 백성을 재판하겠다”(5절)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의를 아는 사람들” 즉 “마음 속에 내 율법을 간직한 백성들”(7절)은 죄악 된 현실을 보고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하며” 그분의 “의는 꺾이지 않을 것”(6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의‘(짜디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다스림 아래에서 모든 것이 제 모습을 얻고 다른 존재들과 어울려 하나의 큰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 ‘공의’(짜디크)입니다.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좋다”(토브)라고 하셨습니다.

    ——————-사귐의 교회 묵상 <사귐의 소리>본문 중————

    하나님은 만백성의 ‘빛’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 사랑으로 품으시고, 회복하시는 약속의 증거가 ‘빛’으로 예수님이시다. 참 빛이 되시는 예수님은 진리이시며,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시는 분이시다.

    어떤 어려움이나 문제들을 만나면 반드시 불편한 감정들이 올라오면서 도망가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 그 자리에서 감사하며,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 어둠을 직면한 바로 그 순간이 회복으로 이끄시는 참 빛인 예수님이 오시는 때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와의 휴전을 선언했다는 발표를 보았다. 이스라엘측이 제시한 휴전선언의 내용은 이란의 위협을 대비하기 위해, 이스라엘군의 휴식과 무기 비축을 위해, 헤즈볼라와 하마스의 관계를 차단하기 위한 사실상 숨고르기의 시간으로 휴전을 협상한 것으로 보인다. 여러가지 각 측의 입장으로 한숨 돌리게 된 상황이지만, 이 모든 것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보게 된다. 참 빛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시며, 지금도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로 세우길 원하신다는 것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이스라엘과 레바논을 보면서 깨닫게 된다.
    비록 세상에는 많은 생명들이 허망하게 목숨을 잃어가고, 기후변화로 고통받으며, 하루가 멀다하고 아픈 소식들이 들려오지만, 수면위에 운행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이 오늘도 함께 하심을 믿으며 기도하기를 원한다.

    크리스마스가 한달 앞으로 다가왔다. 예수님이 왜 오셨는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묵상해본다. 예수님이 온 세상의 빛이 되셔서 다스리시도록,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생명되신 주님만 믿을 수 있도록 기도한다.

    #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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