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44장: 우상 숭배라는 어리석음

해설:

1절부터 8절까지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구원을 예언한다. 이 예언은 이스라엘(실제로는 포로로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주신 것이다(1절). 주님은 그들을 지으시고 양육하신 분이다. 그분은 그들을 “여수룬”(의로운 자)이라고 부르시며 두려워 하지 말라고 격려하신다(2절). 주님께서 그들에게 영을 부어 주시어 회복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3절). 그 때가 되면 그들은 주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자랑하고 다닐 것이다(5절). 그분은 미래의 사건을 미리 예고하시고 그 말씀대로 행하시는 분이시다(6-8절).

9절부터 20절은 참된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뿐이며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은 모두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상은 다만 사람이 만든 것이며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섬기는 일은 어리석고 헛된 일이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수치를 당할 것이다(9-11절). 쇠로 만든 우상이든 나무로 만든 우상이든, 헛되다는 점에서 동일하다(12-13절). 그들은 같은 나무를 잘라서, 하나로는 불을 붙여 고기를 구워 먹고, 다른 하나로는 신상을 만들어 그 앞에 절을 한다(14-17절). 눈이 가려지고 마음이 어두워져서(18절)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기”(19절) 때문이다. 그들은, 우상이 참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20절). 

21절부터 28절까지에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회개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한다. 이스라엘을 지으신 하나님은 그들을 절대로 잊지 않으신다(21절). 그분은 그들의 죄를 제거하시고 당신에게 돌아오라고 부르신다(22절). 그런 예언을 전하면서 이사야는 모든 피조물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부르신다(23절).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24절)은 거짓 예언하는 사람들의 말을 무색하게 만드시지만(25절), 예언자들을 통해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이라는 뜻이다(26절). “깊은 물”과 “강물”(27절)은 유다 백성의 회복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대한 상징이다. 주님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을 목자로 삼으시어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예언을 이루실 것이다(28절). 

묵상:

당시 나라들은 각각 그들이 섬기는 신의 형상을 만들어 그 위세를 과시했습니다. 한 나라의 국력은 곧 그들이 섬기는 신의 힘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나라들은 경쟁적으로 신상과 신전을 크고 화려하게 만들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겼다는 말은 자신의 신이 더 강하다는 뜻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이런 사고 방식 때문에 패전 국가의 국민으로 바빌로니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은 심하게 위축되어 살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섬기던 하나님이 바빌로니아의 신보다 약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시편 137편에서 포로민들에게 “시온의 노래를 불러보라”(3절)고 조롱한 것은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유대인 포로들을 조롱하던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실은 그들이 믿고 있던 하나님을 조롱했던 것입니다.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내려 놓고 바빌로니아의 신과 우상을 섬겼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상황을 내다 보시고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하게 만들었다 해도 우상은 우상일 뿐이며, 역사를 주관하는 참된 신은 오직 한 분, 당신 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돌이나 나무 혹은 금속으로 새겨 만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하지만 우상 숭배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우상 숭배로 옮겨갔을 뿐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예배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그 자리에 다른 것을 세웁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 중에도 우상 섬기듯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불신의 땅에 유배 생활을 하는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을 하나님 답게 섬기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봅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이사야서 44장: 우상 숭배라는 어리석음”

  1. 예전에는 금송아지와 목상과 석상이 우상이었습니다만, 지금은 풍요와 쾌락이 우상이 된 세상에서 살고있으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과 내사이에 부유함과 명예와 쾌락이 모르는사이에 끼어들고있는 신세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경각심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항상깨어있어 주님만 바라보고 허락하신 십자가를지고 묵묵히 주님뒤를 따르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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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을 섬기는 우상숭배는 아닐지라도 다른 종류의 우상을 섬기거나 심지어 하나님을 우상처럼 여기고 믿는 일은 여전히 진행중이라는 해설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미신과 믿음이 종이 한 장의 간격 만큼 붙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미신은 주먹처럼 가깝고, 믿음은 법처럼 멀어서 조바심 많은 우리는 주먹부터 들이대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한국 언론은 믿음과 미신의 토론장처럼 보입니다. 노벨상을 받은 한강에게 삼촌 목사가 보낸 편지가 믿음이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편지의 문체나 전개는 조카를 축하하고 격려하려고 시작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조카의 문학세계를 자기 나름대로 염려해서 쓰게된 편지로도 읽힙니다. 그러나 그 편지를 읽으면서 느껴지는 두려움 같은 것, 답답함 같은 것이 있습니다. 믿음은 이것이다, 이렇게 믿는 것이 맞다, 너의 시각은 위험하다, 너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언어의 감옥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남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수님이 꺼내 주신 감옥에 다시 들어가라는 말 같은 소리’로 들립니다. 그 편지에 담긴 믿음은 시대의 혼돈과 사회악을 개인적인 비극과 불행을 극복하지 못한 이들이 빚어낸 잡음과 폐해로 여기는 듯 합니다. 그들의 아픔과 절망에 무관심한 교회, 자기의 영적권위와 지배 권력에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과 같다고 가르치는 목사들을 보여 줍니다. 믿음과 구원을 말하지만 믿음과 구원을 외면하게 만드는 편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 언론에선 미신 타령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최고 권력자 주변에 이리도 많은 무속인과 미신 이야기가 들끓고 있는 것을 보면 여기가 선진국 맞나, 지금이 21세기 맞나 싶습니다. 하나같이 다 권력과 연결된 이야기입니다. 권력을 잡기 위해, 권력을 부리기 위해, 권력에 접근하기 위해,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미신은 철저하게 개인용입니다. 개인의 복과 화를 manipulate 조종하기 위해서 불러 들이는게 미신입니다. ‘손’ 혹은 ‘손을 사용하는’ 뜻의 매니 mani 로 된 이 단어는 말 그대로 손을 써서 막고, 손을 써서 바꾸고, 손을 써서 차단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손을 써서 일을 합니다. 손을 사용하지 않고는 일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일이 순수한일인지, 불순한 조종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미신과 믿음은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일까요. 아닐겁니다. 하나님이 손으로 우리를 빚으시고 만드셨다고 할 때 매니퓰레이트라는 동사를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하신다고 말하지 조종하신다, 조작하신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비약으로 들릴 수 있지만, 자기의 믿음을 강요하면 미신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방식을 주장하고 강요하면 그건 믿음의 나눔이 아니라 미신의 전파일 뿐입니다. 돌이나 나무로 만든 형상을 놓고 자신의 바램과 이상을 투영하는 일이 우상숭배라면 우리는 종종 여러 형태의 우상숭배를 하고 삽니다. 아예 ‘우상-아이돌’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 시대의 인기 연예인 팬덤도 우상숭배라면 우상숭배겠지요. 화를 막아주고 방패처럼 보호한다는 부적의 힘을 빌리듯 태투를 하는 것도 우상숭배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런 것이 하나님을 대항한다든가, 하나님을 대신한다고 보는 것은 신경질적인 반응일 수 있습니다. 증상을 없애면 병이 없어졌다고 보는 단견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의 근본적인 만남과 사귐이 믿음입니다. 주님 앞에 정직하게 서는 것, 무엇인가를 바라기 전에, 입을 열어 기도하기 전에 일어나는 만남의 감동과 감사가 믿음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고 또 돌아갑니다. 처음 주님을 찾던 기억, 처음 주님 앞에서 울던 기억, 처음 주님 앞에서 춤추던 기억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우상은 줄 수 없는 기억입니다. 땔감으로 쓰고, 몸을 녹이고, 빵을 굽는 데 쓸 수는 있어도 우상은 내 존재의 깊은 곳까지 닿을 수 없습니다. 주님 뿐입니다. 주님이 나의 믿음이고 구원입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나를 만드신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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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41118 이사야 44장

    “백성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은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볼 수 없기 때문이며,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다. 고작 한다는 말이
    ‘내가 그 나무의 반 토막으로는 불을 피워, 그 불덩이 위에 빵을 굽고 고기를 구워 먹었지. 물을 떼고 남은 나무로는 가증한 우상을 만들었지. 이제 나는 그 나무토막 앞에 절한다’ 하는구나.
    타고 남은 재로나 배를 채우려는 자들, 그들은 어리석은 마음에 미혹되어서, 도움마저 받지 못한다. 손에 쥐고 있는 우상이 참 신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사44:18-20)

    인간은 의식주에 대해 채우는 것을 넘어서는 신을 향한 갈망의 본성을 갖고 있다.
    20대에 매년 겨울 전도여행에서 수많은 나라들을 다녔을 때, 내가 본 모든 나라들 안에 공동으로 존재한 것은 ‘우상’이었다. 이슬람이나 힌두교, 불교, 토착종교 같은 종교 자체인 우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과 유럽과 같은 강대국들은 물질만능주의의 우상이 자리잡고 았었으며, 평온해 보이는 덴마크나 뉴질랜드 같은 곳들은 음란함과 우울감이 우상이 되어 많은 영혼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들을 보게 되었다. 이런 것이 비단 다른 나라의 일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나라도 역사를 보면 오랫동안 우상이 이 땅을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형상화된 우상이 나라 전체에 편만하게 자리잡고 있기도 하지만 개인에게도 각자의 보이지 않는 우상이 존재한다.

    우상이 무엇인가? 우상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이 우상이다.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것에 익숙한 백성이었다. 오랫동안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잊고, 이집트의 수많은 신들을 자신의 신으로 여기고 모셨다. 출애굽 후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가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우상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에게 임하고 있을 때, 그들은 보란듯이 우상을 만들어 숭배했다.
    10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경의로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했지만, 그들안에 남아있는 ‘우상숭배’는 끊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으로 이어졌다. 이대로 가나안으로 들어간다면, 가나안에 자리잡고 있던 또 다른 우상 앞에 절할 것이 불보듯 뻔했다. 하나님은 40년 광야의 시간을 통해 우상을 제거하시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의 유일한 구원자이자 인도자이심을 나타내셔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우상을 선택하기를 반복한다.

    사무엘상에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던 다윗의 집에도 우상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름아닌 그의 아내이자 사울의 딸인 미갈이 우상을 갖고 있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자, 미갈은 그 소식을 듣고 다윗에게 사울을 피해 도망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집 안에 있는 우상을 가져다가 침대에 누이고, 머리에는 염소털로 짠 망을 씌우고, 그 몸에는 옷을 입혀 사울의 부하들이 다윗을 잡으러 오자 남편이 병들어 누워있다고 둘러댄다. (삼상19:13-16)

    다윗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분을 경외하는 자였지만, 그의 아내인 미갈은 우상을 버리지 않고 집안에 두었던 것이다. 다윗의 하나님이 그의 아내 미갈과는 상관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나 그의 가정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교회에 다녀도, 신실해 보여도 어딘가에 우상을 남겨둘 수 있다는 것을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을 통해 보게 된다.

    우상은 거대한 형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보다 더 믿고 있는 것, 나에게 더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모두 우상이다. 그리고 우상숭배하는 자들은 오늘 이사야서 말씀처럼 그 우상이 참 신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
    “백성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은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볼 수 없기 때문이며,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사44:18)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는 생각도, 지식도, 총명도 없다고 하신다.

    반대로 우리의 눈이 열리고, 마음이 밝아질 때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오직 하나님만 유일한 참 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지식과 총명이며, 생각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게 되면 나는 그 우상숭배자가 된다. 그러면 나의 우상은 무엇인가? 힘들거나 어려울 때, 하나님이 아닌 내 안에 우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두려움’, ‘불안’, ‘걱정’, ‘분노’, ‘슬픔’, ‘비교하는 마음’, ‘낮는 자존감’ 이러한 것들이 나의 우상임을 발견했다. 하나님의 성품이 아닌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보는대로 반응하는 것. 그럴 때 내 안에 하나님보다 이러한 것들이 왕노릇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럴 때 “아…이렇게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말씀을 보는데도, 소용이 없구나. 나는 형편없는 존재구나.”하는 감정이 나를 강하게 압도한다. 이럴 때, 이 감정을 선택하면 나는 우상숭배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의 진리가 아닌 비진리를 붙들고, 그것이 진리인것처럼 엎드리는 것이다. 사실상 나는 그 감정들과 느낌을 경배하는 자가 된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 4:8-10)

    그럴 때, 어떻게 감정의 우상을 끊어낼 수 있는가?
    하나님 말씀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 돌파하는 힘이 된다.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이 있을 때,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명확하게 알고 계셨다.
    내가 하나님보다 사랑했던 것, 그리고 자신해서 그것에 힘을 부여한 우상의 영역들이 있다면 주님 앞에 가져가서 회개해야 한다. 또 내 힘으로는 그것을 이길 힘이 없음을 인정하며, 나를 사로잡은 우상을 깨드리시도록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으로 선포하며 기도할 때 내가 만든 모든 우상들이 깨어지고, 나를 속이고 사로잡고 있던 어둠의 영역들이 산산조각 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언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내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그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잠잠히 그분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신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라고 말씀하신다. 자연세계와 우주를 바라볼 때 그것을 우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신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 (시편 119:18)

    오늘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나를 만나주시길…그리고 나의 눈을 열어 주님의 기이한 법을 보게 하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더불어 우상에 사로잡혀 허무한것에 인생을 허비하는 영혼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들이 악한길을 떠나 주님께 돌아오도록, 생각나는 영역과 나라,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자.

    #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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