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43장: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

해설:

1절부터 7절까지는 포로로 살고 있던 유다 백성에 대한 회복의 예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창조하신 분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의 소유다. 그분의 소유인 이스라엘이 바빌로니아에 사로잡혀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다시 찾으실 것이다(1절). 그들이 어떤 고난을 당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이다(2절). 이집트와 에티오피아가 페르시아에 멸망 당한 것은 유다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한 대속물인 셈이다(3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다(4절). 그분은 바빌로니아에 흩어져 살고 있던 포로들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5-7절).

8절부터 13절은 하늘 법정에 모든 민족의 대표들을 모아 각각 자신이 섬기는 신에 대해 변호하게 하는 장면이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눈이 있어도 눈이 먼 자요, 귀가 있어도 귀가 먹은 자”(8절)라고 질책하신다. 그들 앞에서 모든 열방과 뭇 민족에게, 그들이 섬기는 신들에 대해 변호해 보라고 하신다. 하지만 어떤 민족의 신도 미래를 볼 수도, 미래를 예언할 수도 없다(9절). 참된 신은 오직 하나님 뿐이다.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에 대한 증인으로 세움 받았다(10-13절). 

14절부터 21절까지에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에게 하실 일을 구체적으로 예언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속량자”(14절)이시다. “속량”은 친족을 위해 몸값을 대신 치뤄주어 해방시키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분은 이스라엘을 속량시키기 위해 바빌론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는 것과 같은 사건이 될 것이다(16-17절). 하지만 하나님이 바빌론에게 하실 일은 이집트에게 하신 일보다 훨씬 더 놀라울 것이다. 18절의 “지나간 일”은 출애굽 사건을 의미하고, 19절의 “새 일”은 바빌론에서 해방되는 일을 가리킨다. 그 일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20절). 그들이 회복되면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21절). 

22절부터 28절에서 이사야는 죄악에 빠진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싫증을 느끼고 죄악에 스스로를 넘겨 주었다(22-23절). “너희 죄로 나를 수고롭게 하였으며, 너의 악함으로 나를 괴롭혔다”(24절)는 말씀은 죄의 본성을 잘 표현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심판 후에 그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는 이유는 그들에게 그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속되게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25절). 그러므로 하나님이 심판 하신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26-28절). 

묵상:

성경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과 인간의 집요한 배반’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기에 피로를 느끼시지 못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이며 존재 이유이며 존재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그분의 완전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사랑을 히브리어로 ‘헤세드’, 헬라어로 ‘아가페’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반면, 인간은 그분의 사랑에 대해 너무도 자주, 너무도 쉽게 싫증을 느낍니다(22절). 그것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된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은 인간에게 그런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를 멈춘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기를 멈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 된 인간은 자격 없이 받는 그 사랑에 너무도 쉽게 무감각해지고 권태를 느낍니다. 

여기서 죄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짓는 죄는 하나님을 수고롭게 하고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24절). 외도하는 것이 배우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행위가 되는 것처럼, 죄악을 탐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해 상처 받으십니다. 인간의 죄악에 대해 하나님은 때로 심판하십니다. 하지만 그 심판도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렇기에 심판 후에 그분은 반드시 그들을 용서하시고 회복 시키십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마음에 각인 시키려는 메시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해 상처난 하나님의 마음을 보는 동시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분의 사랑을 봅니다. 그 사랑에 마주칠 때 깨어지지 않을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너무나도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이사야서 43장: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

  1. 저희들의 잘못을 깨끗이 잊으시고 십자가의 용서로 사랑하셔야만 하시는 주님,끝없이 큰 사랑으로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이 저희들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신것을 고백합니다. 그외의 신들은 잡신들이고 예언도 못하는 헛된 우상들인것을 고백하면서도 자신도모르는 사이에 유혹당하는 어리석고 희망이 전혀없는 인생에게 매일아침 사귐의 소리를 통하여 말씀으로 무장하여 승리의 삶으로 살도록 인도하시는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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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성적으로 따지고 앞뒤를 재어 이해해보려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사랑이 없어지는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랑 받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경험했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하지 못해도 알 수 있는 묘한 지식입니다. 43장에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고백이 여러 번 나옵니다. 이집트, 에티오피아, 스바를 내주고 이스라엘을 얻었다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의 목숨과 이스라엘을 바꾸시겠다고도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구원자라고 당신을 정의하십니다. 이것만 보면 이스라엘의 수호신, 이스라엘의 부족 신으로 당신의 존재를 축소 시키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는 하나님일 뿐인가 싶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처음 등장한 데는 얍복강가에서 야곱이 천사와 씨름할 때였습니다. 새벽이 되도록 천사에게 달려붙어 싸우는 야곱에게 천사는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줍니다. 하나님과 겨룬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예, 하나님의 백성, 그들에게 주신 땅 등을 일컫는 단어지만, 그 의미는 특정인 (야곱), 특정지역 (팔레스타인)에 국한 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보는걸로 그친다면 성서는 이스라엘의 율법서로 충분하고 예수님은 만인의 구세주도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물이라면, 그 물은 이스라엘이라는 그릇을 채우고 넘쳐났습니다. 그 물은 나에게까지 흘러왔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닌 나도 그 물로 살아나고, 몸을 씻고 정신을 차립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힘을 주는 ‘너의는 전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마라. 과거의 일을 생각하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겠다. 그 일이 이미 나타나고 있는데 너희는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사막에 길을 내겠고, 메마른 땅에 강을 내겠다. (18-19절)’ 이 두 구절은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이자,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출애굽과 바빌론 해방 같은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역사에 국한되지 않은 인간의 보편적이며 다양한 씨름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겨루는,’ 하나님과 ‘함께’ 애쓰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주의 말씀으로 과거에서 오늘로, 오늘에서 내일로 걸어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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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41116 이사야 43장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너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을 내주고, 너의 생명을 대신하여 다른 민족들을 내주겠다.”(사43:4)

    “내가 이제 새 일을 하려고 한다. 이 일이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내가 광야게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

    들짐승들도 나를 공경할 것이다. 이리와 타조도 나를 찬양할 것이다. 내가 택한 내 백성에게 물을 마시게 하려고, 광야에 물을 대고, 사막에 강을 내었기 때문이다.

    이 백성은, 나를 위하라고 내가 지은 백성이다. 그들이 나를 찬양할 것이다.”(사43:19-21)

    살아가다보면 위기와 어려움의 시기가 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어려움 앞에서 나의 현재를 보게 되면 소망이 없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나는 이곳에서 감사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순간순간 찾아오는 외로움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렇게 쉽지 않은 시간이 찾아 올 때 오늘 묵상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신 것이 있다.

    “무엇이 중요하니?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긴다.

    나는 네가 부르는 찬송을 항상 받고 있단다.”

    늘 부족하다고 여기고, 늘 자신을 돕는자가 없다고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이 의지할만한 것을 찾기 위해 바빌로니아의 손을 잡았을 때-

    더 큰 두려움과 진노가 그들에게 임했다.

    그들의 부족함은 보이는 것을 의지할 때 채워지는 것이 아니였다. 비록 보이는 현상은 부족함과 두려움이 전부인것 처럼 여겨지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손을 내미는 것. 하나님만 나의 도움이자 방패요, 의지할 분이심을 믿는 것이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채우는 길이다. 그리고 그저 나는 어디에 있는지, 그 자리에서 주님을 찬양하면 되는 것이다.

    요즘 사무엘상을 읽고 있는데, 읽으며 묵상했던 것이 있다.

    다윗은 어떻게 그 오랜 시간 사울을 피해 도망하며 살 수 있었을가?

    다윗은 어떻게 사울을 죽일 수 있을 기회가 두번이나 있었음에도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사랑이라도 받았지만, 다윗은 아버지나 형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거 같은데- 홀로 양떼를 돌보며 어떤 시간을 보냈기에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 앞에서 찾은 답은…

    “다윗은 자신을 사랑한 하나님만 사랑했다.”였다.

    다윗은 가족들의 사랑에 있어서도 결핍이 있었을지 모른다. 형들은 배우고, 전쟁에 나갈 때 그는 양떼를 돌보는 자녀가 아닌 종처럼 대우받았을지도 모른다. 기름부음 받았지만, 매일같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사울로 부터 도망쳐야 했다.

    그의 삶은 비극과 같이 보여지는 시간이 더 많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서도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고, 그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힘은 가장 외롭고 힘든 그 때, 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것으로 부터 나왔다.

    오늘 내가 직면한 상황들 속에서 눈을 감는다. 귀를 닫는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그 분에게만 눈을 열고, 그 분에게만 귀를 연다.

    이미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앞에 다시한번 엎드려, 하나님 한분만을 높이고, 경배하길 원한다.

    나를 부르신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나의 정체성은 보배롭고, 존귀한 자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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