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41장: 우상과 하나님

해설:

1절부터 7절까지는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대한 예언이다. 동방에서 일어난 “한 정복자”(2절)는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고레스 왕을 가리킨다. 그는 거침없는 기세로 바빌로니아를 비롯하여 주변 민족들을 정복할 것이다(3절).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심판의 도구로 삼으신 것이라고 선언한다(4절). 이 통치자로 인해 온 땅은 두려워 떨 것이다(5절). 두려움에 질린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면서 그들의 우상을 붙들고 버티려 하지만 소용이 없을 것이다(6-7절).

8절부터 20절까지는 유다에 대한 예언이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선택한 야곱아,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아”(8절)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표현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도 않을 것이고 늘 함께 있어 그들을 강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9-10절, 13절). 그분은 또한 그들을 괴롭히던 적들을 모두 제거하실 것이다(11-12절). 앗시리아에 이어 바빌로니아의 폭력적 통치 하에서 그들은 지렁이와 벌레처럼 되어 버렸다(14절).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이다(15-17절). 그것은 마치 광야 사막이 초원으로 바뀌는 것과 같이 놀라운 일이다(18-19절). 사람들은 유다 백성의 회복을 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진실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20절).

21절부터 29절까지에서 하나님은 이방 민족들이 섬기던 우상들에게 도전하신다. 우상들은 과거의 일도 알지 못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22-24절). “내가 북쪽에서 한 사람을 일으켜 오게 하였다”(25절)는 말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의미한다. 그가 뭇 민족들을 진흙처럼 밟아버릴 것이다. 우상들은 그러한 미래를 알지도 못했고 예언도 못했다(26절). 반면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그 사실을 미리 알려 주셨다(27절). 

하나님의 이러한 도전 앞에서 우상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28절). 이로써 “부어 만든 우상은 바람일 뿐이요, 헛것일 뿐”(29절)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묵상:

우상은 개인의 길흉화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우주의 운행과 역사의 흐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실현시켜 줄 도구로 만들어 섬기는 것이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참으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며, 너희가 하는 일도 헛것이니, 너희를 섬겨 예배하는 자도 혐오스러울 뿐이다”(24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상을 예배하는 자들이 혐오스러운 이유는 역사와 사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직 개인적인 평안과 형통과 축복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나님은 우주의 운행과 역사의 흐름을 주관하시면서 개인 개인의 길흉화복에 관심을 두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평안과 형통과 축복에만 관심을 두지 않고 우주의 운행과 역사의 흐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개인적인 평안과 형통과 축복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큰 뜻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합니다. 

불행하게도,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혐오스러운 사람들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독선적이며 배타적이고 희생할 줄 모르는 사람들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긴다고는 하지만 그분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위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며, 우리에게는 해로운 일이고, 이웃에게는 혐오스러운 일입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 깎아 만든 신상을 앞에 두고 섬기는 사람들은 드뭅니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상처럼 취급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아니, 바르게 믿으려는 사람들도 자주 하나님을 우상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그분을 조종하려는 유혹에 이끌립니다. 성삼위 하나님은 “전부”이시고, 우리는 “전무”입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는 다만 입을 다물고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기도할 따름입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이사야서 41장: 우상과 하나님”

  1. 창조주 사랑의 하나님이 나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나라의 전부라고 고백을 하면서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의 부귀영화와 쾌락이 우상이되고 그것들을 넘보며 사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말도 못하고 예언도 못하는 금송아지 석상 목상 보다 money talks의 생각 명예 권세 건강에 전심하는 세상에 살고있는 형편입니다. 이모든것이 바람이고 헛되다는것을 다짐하는 아침입니다. 악한자들이 세상을 휘들르는것 같아도 모든것을 배후에서 주관하시는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저희들의 하나님은 우주를 운행하시는 신실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다시한번 고백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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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41114 이사야 41장

    “누가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하였느냐? 누가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였느냐? 태초부터 나 주가 거기에 있었고, 끝날에도 내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사41:4)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선택한 야곱아,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데리고 왔으며, 세상의 가장 먼 곳으로부터 너를 불러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의 종이니, 내가 너를 선택하였고, 버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니, 떨지 말아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사41:8-1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복과 소망의 메세지를 주시는 41장을 묵상하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말씀은 41:4말씀이었다. 모든 역사를 이끄시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결정하시는 분은 누구일까? 이 세상은 모두 우연이나 지도자들 몇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지만, 이 모든 세상의 일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말씀하신다. 태초부터 거기 계신 하나님이 끝날 때에도 거기에 계시며,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될수록 나 자신에 대한 평안과 안식만이 아닌 이 세상에 대한 평안과 안식으로 바뀌게 되는 것을 본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사명이 생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기도의 사명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내가 아닌 하나님의 열심이 나에게 부어질 때 가장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이사야서 41장 14절에서는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 벌레같은 이스라엘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라는 부분이 나온다. 우리의 존재가 본래 지렁이 같고 벌레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41:8절에서는 이들을 가르켜 나의 종, 내가 선택한 야곱,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신다. 즉, 벌레와 지렁이 같은 우리는 하나님이 선택하여 주시고, 종이라고 부르시며, 친구라고 부르실 때 하나님으로 부터 새로운 정체성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부터 새로운 정체성이 생기면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벌레는 먹이사슬의 최하위에 있는 존재이다. 지렁이도 마찬가지이다. 포식자로부터 늘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존재들이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친구라고 부르셨다니…나의 정체성이 어떻게 바뀌는 것일까?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불러주실 때, 지렁이와 벌레가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힘으로는 당장 몇 분 뒤의 상황조차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시고,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태초에 계셨고, 마지막 날에도 계실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다.
    바로 그 하나님을 만날 때, 나의 정체성이 확실하게 세워지고 벌레처럼 두려워떨던 내가 두려움을 이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오늘 이사야서 말씀은 단순히 내가 어려울 때 선택할 수 있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심판과 멸망으로 소망을 잃어버린 황폐한 땅 이스라엘이 벌레와 같이 버려진 자에서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엄청난 말씀인 것이다. 우리를 친구로 부르셨기로 작정하셨기에, 먼 곳에서 부터 나를 불러내셨다. 어둠 가운데에서 건져내셔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마음을 하나님의 강한 팔로 붙드사 참된 승리를 주신다. 그리고 이 일은 오늘 나의 삶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 세상과 모든 역사 가운데에서도 일어날 것이다.
    오늘도 소망을 잃어버리고, 삶의 의미를 모른채 방황하는 자들. 하나님이 없다 말하며 고통속에서 울부짖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속량하시고, 도우시도록…그리고 그들의 역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쓰여지길 기도하자.

    오늘도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온 만물의 왕이자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한다.

    #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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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엄마한테서 물려 받은 유산이 뭘까 생각해보니 ‘우상을 우습게 보는’ 태도를 꼽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 콕 집어 말하자면 엄마는 미신에 쩔쩔매거나, 헛된 것을 믿는 사람을 ‘바보’ 취급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엄마는 타종교에 대해 대놓고 배타적이지는 않았지만, 불상 앞에 절을 하며 빌고 또 비는 일, 무슨 일이 있을 때 마다 점집을 찾아가 묻는 것, 부적을 붙이는 일, 굿을 해서 혼을 달래거나 소원을 비는 일 등을 무척 못마땅해 했습니다. 엄마는 그런 일들이 다 ‘정신 사나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이런 정신 사나운 일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안 좋게 생각한건 어떤 특정 종교가 아니라 믿는 행위의 표현이었던 것 같습니다. 드러내놓고 자기 믿는 바를 표현하는 사람을 안 좋게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절에/교회에/성당에 열심히 다닌다는걸 말로 떠드는 사람, 신심이 좋다는걸 보여 주려고 하는 행동 같은 걸 참 안 좋아했습니다. 신학적인 바탕이 있을리 없고, 체계적인 신앙관도 전무하고, 꾸준한 교회생활을 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 아닌 것을 믿는 것은 다 우상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믿음의 본질이나 핵심 하나는 정확하게 본 것입니다. 나의 믿음이 믿음인지 미신인지는 내가 있는 여기가 어디인지를 보면 판가름이 납니다. 지금 여기 이 땅은 나만 사는 세상인가요. 나의 문제만 문제인 세상인가요. 나와 하나님 둘 만 있나요. 해설에서 보듯 믿음은 나 만을 위한 것일 수 없습니다. 어릴 때는 자기 만 생각합니다. 자기 너머를 보거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점점 자라면서 타자를 보게 되고, 세상을 배우게 됩니다. 믿음이 미신으로 시작할 수 있어도 미신에 머물면 미신일 뿐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처음 부를 때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랐다 해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 가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미신의 땅에서 걸어나와야 합니다. 나와 하나님 뿐인 땅에서 나와야 합니다.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세상은 없고 오직 하나님 만이라는 말을 잘 합니다. 하나님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나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혹시 게을러서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의 세상은 시공을 초월하며,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한데 나는 순간보다 짧고 먼지와도 같은 인생에 하나님을 맞추고는 좋아하는 것 아닐까요. 하나님의 땅으로 들어 오라는 초대가 믿음의 기원이라는 묵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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