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40장: 위로의 이유

해설:

1장부터 39장에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 그리고 주변 여러 민족들에 대한 심판 예언이 수록되어 있다.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구원과 회복에 대한 예언도 가끔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심판의 예언이 중심이다. 앗시리아가 세력을 부리던 주전 8세기가 시대적 배경이다. 

앗시리아는 주전 612년에 바빌로니아에게 멸망 당한다. 바빌로니아는 앗시리아보다 더 공격적으로 정복 전쟁을 펼쳤고, 앗시리아의 공격을 버티고 살아 남았던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빌로니아에게 멸망 당했다. 바빌로니아는 세 차례에 걸쳐 상류층 유대인들을 잡아다가 유배 생활을 하게 했다. 하지만 바빌로니아의 영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주전 538년에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 당했기 때문이다. 고레스 대왕은 바빌로니아에 잡혀 온 모든 포로들에게 조국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칙령을 내린다. 

40장 이후의 예언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39장과 40장 사이에 약 70년 정도의 시차가 있다는 뜻이다. 39장에서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의 실책으로 인해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 당할 것이라는 예언을 준다. 40장은 그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전제한다. 40장 이후의 예언들은 칠십여 년의 유배 생활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1-39장을 ‘제 1 이사야’라고 부르고 40장 이후를 ‘제 2 이사야’라고 부른다. 39장까지의 예언이 음울한 분위기의 단조 음악이었다면, 40장 이후의 예언은 밝고 경쾌한 장조 음악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나의 백성을 위로하라”(1절)고 말씀하신다.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주님에게서 받았다”(2절)는 것이 위로의 내용이다. 이제 심판의 기간은 끝이 났고, 하나님은 구원의 손길을 펴실 것이라는 뜻이다. 고레스 대왕의 칙령으로 인해 유배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은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사야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는 음성을 듣는다(3-4절). 곧 주님께서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인간의 유한성과 하나님의 영원성을 선포하라고 하신다(6-8절). 이 말씀에 근거하여 이사야는 유다 백성에게, “너희의 하나님”(9절) 곧 “만군의 주 하나님”(10절)께서 오셔서 목자처럼 그 백성을 모으시고 안으시고 돌보아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모든 백성에게 알리라고 전한다.

이 예언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사야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적는다. 인간은 피조 세계조차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12절). 반면 하나님은 그 온 세상과 모든 생명들을 창조하고 운행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갈 수가 없다(13-14절). 그분의 전능의 능력에 비하면 인간의 능력은 아무 것도 아니다(15-17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다른 우상에 비교할 수가 없다(18-20절). 그분은 온 우주와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다(21-22절). 절대 권력을 자랑하는 통치자들도 창조주 앞에서는 강풍에 날리는 검불과 같다(23-24절). 그분은 온 우주와 세상 모든 생명을 주관하신다(25-26절).

이런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불행한 일을 당하여 낙심하거나 불평할 수가 없다(27절). 그분은 영원하신 창조주요 전능하신 분이며 지혜가 무궁하신 분이다(28절). 그런 분이시기에 그분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힘 주시고 능력을 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제대로 믿는다면 결코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29-31절).

묵상: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중 하나는 그분을 우리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온 우주와 모든 생명을 창조하고 운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생각한다면 “그 앞에서는 모든 민족이 아무것도 아니며, 그에게는 사람이란 전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17저)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자주 하나님을 우리처럼 작게 만들어 그분을 하찮케 여깁니다. 그래서 아삽의 시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범하는 여러가지 죄악들을 나열하면서 “이 모든 일을 너희가 저질렀어도 내가 잠잠했더니, 너희는 틀림없이, ‘내가’ 너희와 같은 줄로 잘못 생각하는구나”(시 50:21)라고 탄식합니다. 축소된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환난과 역경 앞에서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평하게 만듭니다. “주님께서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 주시지 않는다”(27절)는 말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도 때로 “정말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가?” 혹은 “하나님은 진정 나를 사랑하시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칠십 년이 넘게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1세대 포로들은 모두 사망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언자들이 말했던 “그 날”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예언자들의 예언에 대해 의심하며 숨을 거두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믿어 온 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딤후 1:12)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사야도 여기서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요 “절대자”요 “영원자”요 “초월자”요 “전지자”이십니다. 반면 우리는 “무능자”요 “상대자”요 “유한자”요 “제한자”요 “무지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아이에는 억만 광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을 안다면 우리는 우리의 작은 머리로 그분의 존재와 활동을 평가하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은 십자가를 통해 더할 수 없이 분명하게 1) 그분이 존재하신다는 사실과 2)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그분을 믿음면 우리는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도 그분을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환경적인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진정한 위로는 오직 우리가 어떤 분을 믿고 있는지를 기억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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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responses to “이사야서 40장: 위로의 이유”

  1. 전지전능의 창조주 하나님 사랑과 은혜와 구원의 주님을 조금이라도 깨닫게하신 거룩한 영 위대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주님께 온전히 굴복하고 주님만 온전히 의지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세상의 잡소리에 흔들리고 고민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어려웠던 예배당 문제를 미리 아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더 좋은 회당으로 인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는 유언비어에 요동되지않고 오직 십자가의 구원만 생각하고 감사하며 거룩한 길을 우직하게 걷는 사귐의 소리 식구 모두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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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문학에 대한 저평가가 단박에 뒤집어지는 사건이 올가을에 일어났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몰고온 변화가 설레임도 주고, 자긍심도 키워주고, 조용한 기쁨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상이 뭐라고, 해마다 하는 행사인데, 수상한 작가와 수상하지 못한 작가들이 정말 다를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강 작가의 글은 여성의 이야기지만 인간의 이야기이고, 한국의 사건이지만 세계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명작의 향을 지녔다 싶습니다. 이사야서 40장에 도착하니 하나님에 대한 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 글 안에서 하나님을 찾아 봅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가장 먼저 눈에 띕니다. ‘복역’을 하고 나온 죄수들을 맞으시며 수고했다, 고생했다, 친절하게 (speak softly and tenderly to Jerusalem) 말씀하시는 어머니 하나님이십니다. 균형의 하나님이 보입니다. ‘모든 골짜기’ ‘모든 산’ 거친 땅과 메마른 땅이 하나님을 위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새롭게 변화됩니다. 낮았던 것은 높아지고 거칠었던 것, 험했던 땅은 편안해집니다. 획일적인 한가지의 모습으로 같아지는게 아니라, 순서를 따라 아름답고 평안하게 달라지는 풍경을 상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돌보시는 분입니다. 목자처럼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팔에 양을 안으시듯 가슴에 품으시고 어미와 그 새끼를 친절하게 이끄시는 (11절) 분입니다. 마치 문학적인 정서나 깊이가 메말라 있던 가슴에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이 시원한 빗줄기가 되어 준 것처럼 40장까지 오는 내내 느꼈던 절망과 실망, 수치심과 체념이 하나님의 다정한 말씀을 듣고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8절은 눈물이 나도록 아름다운 문장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이루어진다 –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 피조 세계의 영광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 창조자의 은혜를 입어 한 순간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상상하게 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의 선물은 얼마나 놀라운 주님의 영광인지요. 풀이 뭐고 꽃이 뭐기에, 인간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한 순간이라도 담을 수 있는 것인지요. 마지막 절은 풀과 꽃의 연약한 아름다움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며 독수리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듯 올라갈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은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할 것이며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풀과 꽃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수퍼휴먼,’ ‘수퍼맨,’ ‘초인’처럼 되는 일도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피곤치 않고 지치지 않는 상태를 경험합니다. 쓰러져야 하는데, 무너져 내려야 하는데 나를 버티게 하는 힘, 흔들릴지언정 주저 앉지 않게 지켜주는 힘을 경험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괴로우면 괴로운대로 걸어온 길입니다. 우상이 아닙니다. 주님이십니다. 내 안에서 만들어낸 주님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만들어진 나입니다. 풀은 시들어도, 우리는 사라져도, 주의 영광은 영영하리로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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