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17장: 두려움을 이기는 힘

해설:

“다마스쿠스”(1절)는 시리아의 수도다. 주전 734년 전후, 시리아는 앗시리아로부터 위협을 막기 위해 북왕국 이스라엘과 연합했고 유다까지 그 연맹에 끌어 들이려 했다. 하지만 유다가 연합군에 가담하기를 거부하자 시리아는 이스라엘과 함께 유다를 공격한다. 이 전쟁에서 시리아는 앗시리아에게 패망하고 이스라엘은 북쪽 영토 대부분을 빼앗긴다.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는 당시 가장 번성한 도시 중 하나였는데, 이제 곧 폐허가 될 것이며(1절), 농경지였던 “아로엘의 성읍들”은 잡초만 무성하여 양들의 놀이터가 될 것이다(2절). 시리아와 이스라엘 연합군이 앗시리아에 패할 것이기 때문이다(3절). 그 날이 되면 이스라엘은 마치 떨어진 이삭 한톨 없는 들판처럼(4-5절) 혹은 열매를 다 따고 난 올리브 나처럼 될 것이다(6절). 

그 날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만들어 섬기던 우상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바라볼 것이다(7-8절). 그러한 재앙에 처한 이유가 우상숭배 때문임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9-10절).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에는 그들이 무슨 노력을 해도 소용 없을 것이다(11절). 

12절부터 14절까지는 유다를 공격하는 이민족들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다. 이 예언은 주전 734-32년에 시리아-이스라엘 연합군이 유다를 반앗시리아 전선에 끌어 들이기 위해 일으킨 전쟁에 대해 주어진 예언으로 보인다. 그 연합군이 “거대한 물결이 밀려오는 것 같이 소리를 내어도”(13절) 하나님 앞에서는 “산에서 바람에 흩어지는 겨와 같고 폭풍 앞에 흩날리는 티끌”같을 것이다. 

묵상: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시리아와 손을 잡았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운명을 결정한 심각한 오판이었습니다. 살기 위해 잡은 줄이 그들의 죽음을 재촉했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 오판이 정치적인 미숙함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영적인 타락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아, 네가 하나님 너의 구원자를 잊어버리고, 네가 피할 견고한 반석을 기억하지 않았다”(10절)고 탄식합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 그들은 지나친 두려움에 빠지고, 그 두려움은 그들로 하여금 정치적인 오판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12절부터 14절은 시리아-이스라엘 연합군이 패배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여기서 화자는 “우리”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사용합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유다 백성을 대표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시리아-이스라엘 연합군은 쓰나미와도 같고 무서운 폭풍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그들이 바람에 흩어지는 겨와 같고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고 그분의 계획을 알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공포스럽지만 그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믿기에 그는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고후 5:7)라고 말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분의 다스림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바라보는 것”(7절)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공포스러운 현실에 처해서도 담대함과 평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이사야서 17장: 두려움을 이기는 힘”

  1. 신실하시고 사랑의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신실하신 주님만 의지하고 믿음의 공동체의 흔들림들을 목회자들과 임원들을 통해 온전히 지켜오게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새로운 chapter로 더욱 도약할수있는 기회에 감사를 드립니다.귀한 이기회를 놓치지않고 열심히 교회를 섬기므로 응답하는 사귐의 소리 가족들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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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예언서의 말씀은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는 뜻보다 맡기신 -예탁하신- 말씀이라는 뜻이라고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예언자의 입을 통해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앞날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여 (점치듯이) 말하는 것으로 읽으면 이 일들이 ‘언제’ 일어나는지에 관심이 가지만, 예언의 목적은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알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언자는 경고 warning 를 하는 것이지 예고 prediction 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으면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돌이키고 고치면 됩니다. 요나와 니느웨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언자의 말이 실제로 일어나면 그의 경고가 먹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서지 않았으니 파멸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사야서에는 강대국의 멸망이 계속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강대국에게 먹히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인간은 그저 무력한 존재일 뿐이라고 이해하고 말면 굳이 이사야서를 읽어야 알 수 있는 진실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이 알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으니 그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라고 생각하면 이것도 맞기는 맞지만 성경에 비추어 나를 돌아보는 일 속에 담긴 기쁨과 아픔은 모른채 사는 것일 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를 통해 어려운 말들을 선포하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뜻이 공의이면서 사랑이란 걸 분명하게 알려주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열강의 무력보다 강하다는 엄연한 사실을 반복 확인 시키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을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권력자들을 두려워하는 연약함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셔서인 것 같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권력자는 도처에 있습니다. 고대 제국의 시스템보다 나은 민주주의 사회의 체제 안에 살지만 어렵고 괴로운 일들에 치인 사람의 수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스스로 판 구멍’ 속에 갇힌거라고 책임을 돌리기엔 불의하고 불행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지은 죄의 값을 받아 (심판을 받아) 고통 속에서 사라지기를 바라시는게 아닐겁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보고 깨우칠 수 있기를 원하시지 않을까요. 어머니가 되시어 우리의 헌 데를 씻기고 상처를 싸매 주시려는 하나님을 만났으면 하고 원하시는게 아닐까요. 앞서 16장에는 애통하고 울고, 통곡하고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구절들이 나옵니다. 전쟁의 무시무시한 장면들 사이사이에 어머니의 모습을 한 하나님이 보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두렵지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두렵지만 하나님을 기다리는 백성으로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신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읽고 기도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의 은혜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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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41017 이사야17장

    <살 길: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이스라엘아, 네가 하나님 너의 구원자를 잊어버리고, 네가 피할 견고한 반석을 기억하지 않고, 이방 신을 섬기려고 이방의 묘목으로 ‘신성한 동산’을 만들었구나.
    나무를 심는 그 날로 내가 울타리를 두르고, 그 다음날 아치메 네가 심은 씨에서 싹이 났다 하여도, 네가 그것을 거두어들일 무렵에는 흉작이 되어, 너의 슬픔이 클 것이다.”(사17:10-11)

    이스라엘은 앗시리아로부터의 침략을 극복하기 위해 시리아와 연합했으나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얼마가지 않아 시리아는 패망하고, 이스라엘은 영토를 잃었다. 그들 나름의 살길을 찾기 위해 방법을 모색하였으나 망하는 어리석을 길을 선택하게 된다.

    이사야 17장 10-11절에서는 구원자, 피할 견고한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이방신을 섬기기 위해 이방인의 묘목으로 ‘신성한 동산’을 만든 이스라엘에 대해 언급한다. 기다리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은 외면한채 자신들의 신을 스스로 또 만들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심은 이방인의 묘목에서 싹이 나고, 거두어들일 수 있는 추수의 때가 오게 된다고 할지라도 모두 흉작이 되어 슬퍼하게 되리라 말씀하신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창세기 11:1-8)

    창세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나온다. 바로 ‘바벨탑’ 사건이다. 언어가 하나였던 그 때에 사람들은 그들을 위한 바벨탑을 건설한다. 하나님은 이를 보시고 그들을 흩으셨다.
    인간의 죄 된 본성은 스스로 방어하고, 보호하며, 자신만의 제국을 이루어 안락함을 추구하게 한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길이자, 살 길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16:24)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높이고, 나를 지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타협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 유일한 살길이라고 예수님을 삶으로 가르쳐주셨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기 위한 방법을 다 동원했다. 몰려오는 적국인 앗시리아를 물리치기 위해 시리아와 손잡았지만, 결국 같이 패망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도 이스라엘은 깨닫지 못하고, 이방의 묘목을 가져다가 ‘신성한 동산’이라는 곳에 묘목을 심었다. 그 나무가 자신들을 지켜주리라 믿고, 다시 하나님을 떠났다.

    그러나 이사야 17: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은 자기들을 지으신 분에게 눈길을 돌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바라볼 것이다.”(사17:7)

    나를 창조하신 분이신 하나님.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살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나는 나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
    나와 생각이 비슷하고, 같은 목적이 있는 자들과 손잡고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것은 아닌가?
    아니면 어느정도 효염이 있다고 믿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나의 믿음을 두고 그것이 나를 지켜주고 번성하게 할거라고 주술적인 믿음을 갖는것은 아닌가?

    기억하자. 그 어떤 것도 사망에서 나를 건져낼 수 있는 것은 없다. 오직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 눈을 돌리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의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것이 사는 길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며 내가 죽어지는 삶이 도리어 예수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생명의 길임을 기억하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
    (민수기 2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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