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15장: 모압에 대한 심판

해설:

15장과 16장은 모압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다. 모압은 지금의 요르단 지역에 있었던 국가로서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과 대치했다. 창세기 19장 30-38절에 의하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후, 롯의 큰 딸이 아버지와 동침하여 얻은 아들의 이름이 모압이고, 그의 자손들이 퍼져서 모압 민족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모압 땅을 거쳐 가야 했는데, 모압 왕은 여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의 진로를 방해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국가로 자라가는 과정에서도 모압은 여러 차례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모압은 다윗 왕에 의해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었다가 여호람 치하에서 유다가 쇠락하자 독립했다. 그 이후로 모압은 주변 나라들과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하곤 했다. 

“알”과 “길”(1절)은 모압의 국경 도시다. 국경이 함락되면 저항할 겨를도 없이 멸망할 것이라는 뜻이다. 나라가 망하게 되자 어떤 사람들은 “산당에 올라가 통곡하고”(2절), 어떤 사람들은 “길거리에 나앉아 울고, 지붕 위에 올라가 통곡하며, 광장에서도 통곡” 한다(3절). 통곡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국경 도시인 야하스에까지 들릴 정도다(4절). 여기서 “통곡하다” 혹은 “슬피 울다”라는 말이 자주 반복된다. 그만큼 모압의 멸망이 참혹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사야는 모압의 심판을 예언하면서 그 광경을 상상한다. 외세로부터 침략을 당하여 모든 백성이 슬피 울며 두려워하여 피난 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니 그의 마음이 아파왔다(5절). 6절의 묘사는 설상가상으로 닥친 자연재해를 가리킬 수도 있고, 전쟁으로 인한 페허 상태를 비유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쨋거나, 그 결과로 인해 귀족들이 재산을 챙겨서 피난을 떠나야 한다(7절). 이렇듯, 모압은 총체적으로 멸망 당하는데(8절),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도 당해야 할 고난이 남아 있다(9절). 이 예언이 묘사하는 것처럼, 모압은 앗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등에 의해 차례로 유린 당하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묵상:

신앙 생활을 함에 있어서 가장 조심할 것이 ‘자기의’(self-righteousness)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태도를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부정하는 태도입니다. 자기의에 빠지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며 거래를 하려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잘못이었습니다. 자기의는 하나님 나라에서 스스로를 밀어내어 버리는 영적 질병입니다. 

자기의는 또한 이웃에 대한 공감 능력을 증발시켜 버립니다. 다른 사람의 상황을 보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경향에 갇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잔인해지는 순간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신앙에 있어서도 적용됩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심판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비정하고 잔인한 언행을 일삼습니다. 다른 사람이 겪는 불행을 보고 함께 아파하기 전에 그 불행의 원인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믿음 좋다는 사람들이 종종 가장 잔인한 사람들이 되곤 합니다. 

이런 점에서 모압의 심판 예언을 전하는 이사야의 마음은 특별합니다. 모압 민족이 이스라엘에 행한 악행들을 생각하면, 그들의 불행한 운명을 예언하면서 고소하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혹은 그들의 죄악을 생각하면서 비정하고 잔인하게 정죄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의 참담한 운명을 상상하면서, “가련한 모압아, 너를 보니, 나의 마음까지 아프구나”(5절) 하고 탄식합니다. 그는 참담한 운명을 앞에 둔 모압 백성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느끼고 아파 했습니다. 그것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심판의 팔을 드신 하나님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합니다. 죄에는 더욱 예민해지고 사람에게는 더욱 자비로와지는 것이 영적 성장입니다.  

모압의 운명을 아파 했던 이사야의 마음이 오늘 우리에게 더욱 절실 해졌습니다. 믿는 이들과 교회들이 이웃의 아픔에 대해 점점 무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해 차별과 혐오의 감정을 거침없이 쏟아내던 교회가 이제는 이웃에게 어떤 피해를 주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들 좋을 대로만 하는 골치 아픈 집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공감의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듯한 모습입니다. 성령께서 이 굳어진 마음을 깨뜨려 여린 마음으로 고쳐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이사야서 15장: 모압에 대한 심판”

  1. 십자가 은혜를깨닫게하신 은총에 감사를 드립니다. 딴길은 모두 멸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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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한국에서는 주요 기독교단과 대형 교회들이 중심이 되어 ‘악법저지를 위한 200만 성도 연합예배’ 집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은 국회에서 2007년부터 계속 발의 되었지만 보수성향 기독교 교단에서 동성애를 특별히 문제 삼고 있어 통과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10월 27일 광화문 집회는 올해 7월에 대법원이 동성 동반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인정을 판결한 것에 대한 반대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동성 동반자도 건강보험의 피부양자 자격으로 인정된다는 법원의 판결이 동성애 합법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교회 안에 커졌습니다. 한국교회 전체가 하나로 단결해 대법원과 법관들에게 교회의 의견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경고의 메세지를 보내야 한다는게 연합예배를 주최측의 의지입니다. 오늘 해설에서 신앙생활의 적이 자기의에 빠지는 것이라는 말씀을 읽는데 차별금지법 반대 연합예배 집회가 떠올랐습니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분들을 정말 존경하고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이 은연 중에 굳어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될 때도 있습니다. 자기가 해야 속이 편하고, 자기 하는 방식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디까지 정성이고 어디서부터 고집인지 본인이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이사야서에 계속해서 망하는 나라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이 멸망에 있는 듯, 나라들이 차례로 망하고 무너집니다. 백성이 도매금으로 날라갑니다. 나라와 함께 사라지기도 하고, 겨우 살아남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하나님의 전권을 보여주는 스토리로는 오버킬 overkill 입니다. 과잉입니다. 인간의 권력의지와 욕망도 오버킬이기는 마찬가지겠지요. 자기의는 all or nothing 이 되기에 신앙의 걸림돌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만이 심판하실 수 있는데 자기가 그 자리에 있으려고 하니 멸망을 맞을 수 밖에 없는거겠지요. 그렇게 보면 하나님의 오버킬은 인간의 욕심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가 우리에게 행하는 불의를 비추어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심판을 멈추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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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41017 이사야15장

    <슬플 때에 함께 우는 것>

    “가련한 모압아, 너를 보니, 나의 마음까지 아프구나.
    사람들이 저 멀리 소알과 에글랏슬리시야까지 도망치고, 그들이 슬피 울면서 루힛 고개로 오르는 비탈길을 올라가고, 호로나임길에서 소리 높여 통곡하니, 그들이 이렇게 망하는구나.”(사15:5)

    이사야 15장은 모압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다. 1절에 나오는 ‘알’과 ‘길’은 모압의 국경 도시로, 이 국경까지 망하게 되면서 모압의 안과밖 모두 멸망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모압을 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본문 내용 가운데, 그들을 보는 이사야의 고백이 눈에 띈다.

    “가련한 모압. 너를 보니 나의 마음까지 아프구나.”

    하나님의 계시로 멸망하는 나라들의 예언을 들은 이사야는 그저 장차 이뤄질 일에 대한 사실만을 전달하는 사람은 아니였다. 그가 하나님 앞에 머물며, 예언의 말씀을 들을 때- 그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는 것을 이 이사야의 고백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요나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니느웨는 마땅히 그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죄로 가득한 그들을 멸망하실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다고 할지라도 내 마음이 완악하며지고, 들을 마음이 없으면 강건너 불구경하듯 그 문제를 대하게 된다. 요나에게는 니느웨가, 이사야에게는 모압이 그들에게 달가운 존재는 아니였다. 두 나라 모두 이스라엘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한 나라였기에 어쩌면 요나의 반응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왜 이 일에 대해 나에게 말씀하셨을까?
    왜 이스라엘의 적국인 모압의 멸망을 이사야에게 말씀하셨을까?

    그들에게 심판은 예정된 것이었으나 근본된 하나님의 마음은 그들이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였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때, 아버지의 마음으로 멸망과 심판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적국이 심판 받는 것에 대해 인과응보라고 생각하며, 당연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울부짖음과 고통을 듣는 것. 그리고 그 고통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 이 일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원수가 벌받는 것에 대해 당연시 여기는 마음은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서있는 것이다. 심판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역이다. 하나님만이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을 쫒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의 옷깃만 베고, 이 일에 대해 하나님께 전적으로 위임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자를 해할 권리가 자신에게 없다는 것. 즉, 자신에게 심판자의 권리가 없음을 인정했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복수할 수 있는 기회보다 이 일에 대한 권리가 하나님께 있음을 직시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원수의 멸망을 보여주신다면 무엇을 말씀하시는것일까?
    하나님과 하나님께 원수된 자의 사이에 서서 중보자로 있는 것. 그들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권리인 것을 기억하자.

    “주님. 세상의 흉융한 소식들과 날로 격화되고 있는 전쟁의 소식들을 들을 때-
    어떤 이들은 적국들에 대해 마땅한 벌을 받는다 박수를 칩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죄의 경중이 다르지 않는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가 누구를 비교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이 일들에 대해 보이신 이유가 있다면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서서 중보하길 원하신다는 것임을 깨닫게 하여주세요. 결렬된 틈에서, 높은 성벽위에서, 무너진 곳에서 제가 서길 원합니다. 오늘도 여전히 한 영혼이 주님앞에 돌아오기 원하시는 아버지의 그 마음을 부어주시옵소서. 그래서 아버지의 그 마음으로 기도하게 하시고, 저의 기도를 통해 심판가운데에서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갈 수 있도록 일하여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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