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14장: 모두를 죽게 하는 길, 모두를 살리는 길

해설:

14장에는 네 개의 독립적인 예언들이 묶여 있는데, 시대적 배경이 각각 다르다. 다른 곳에서도 그렇지만, 여기서도 전기 예언과 후기 예언이 뒤섞여 있다. 

1-2절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다. 주전 722년에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 당한 후에 제국의 여러 지역으로 흩뿌려졌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회복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을 다스릴 정도로 강해질 것이다. 

3절부터 23절까지는 “아침의 아들, 새벽별”(12절)이라고 불렸던 어떤 왕의 죽음에 대한 예언이다. 학자들은 이 왕이 누구인지에 대해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 왕의 행태에 대한 묘사를 보면 앗시리아의 산헤립 왕, 사르곤 왕 혹은 바빌로니아의 느브갓네살 왕을 생각하게 된다. 

이 왕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예언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모든 권력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바빌론을 진노의 몽둥이로 사용하여 여러 민족들을 심판하신 후에 바빌론을 심판하신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손을 펼치시자 영원할 것 같던 절대권력은 한 순간에 땅에 떨어지고 만다. 그 왕의 폭정에 눌려 있던 사람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몰락에 놀라고 또한 기뻐한다. 그 왕은 죽어서 음부의 세계로 떨어질 것이며, 그곳에서 그처럼 절대 권력을 누리다가 떨어진 수 많은 권력자들과 함께 참담한 운명을 당하게 될 것이다.

24절부터 27절까지는 앗시리아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다. 이사야가 이 예언을 전할 때 바빌론은 강국으로 부상하지 않았고 앗시리아가 호령할 때다. 무서운 기세로 주변 민족들을 점령해 가던 앗시리아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오면 역사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예언이다. 

28절부터 32절까지는 불레셋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다. 이 예언은 아하스 왕이 죽던 해(주전 712년 경)에 받은 예언이다. “너를 치던 몽둥이”(29절)는 불레셋을 위협했던 아하스 왕을 가리킨다. 아하스 왕이 죽고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르자 불레셋은 사절단을 보내어 화친을 청했다. 하지만 아하스가 “뱀”이었다면 히스기야는 “독사”가 될 것이다. 불레셋은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잇는 통로에 있었기에 열강들의 갈등에 자주 말려 들어갔다.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다와 동맹하려 했으나 히스기야는 그 제안을 거절한다.

묵상: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하면, 권력이 커지면 인간은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해도 된다고 착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 분석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년 전에 어느 유명인이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유명해지면 아무 일이든 해도 돼요. 심지어 지나가는 여성의 치부를 만져도 상관 없어요.”

영국의 사상가 액튼 경은 “권력은 타락하는 경향이 있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타락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의 죄성의 뿌리는 “권력에의 의지”이기 떄문입니다. “아침의 아들, 새벽별”(12절)이라고 불렸던 그 왕이 늘 장담하던 말, 즉 “내가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겠다. 하나님의 별들보다 더 높은 곳에 나의 보좌를 두고, 저 멀리 북쪽 끝에 있는 산 위에, 신들이 모여 있는 그 산 위에 자리잡고 앉겠다. 내가 저 구름 위에 올라가서, 가장 높으신 분과 같아지겠다”(13-14절)는 말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권력에의 의지에서 나옵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교만”이며,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짓게 되는 “일곱 가지 큰 죄” 중에서 교만을 첫번째로 꼽았습니다. 

이것은 권력자나 갑부나 유명인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권력에의 의지가 있기 때문에 권력을 추구하고 작은 권력이라도 손에 쥐면 그 권력을 부리고 싶어합니다. 권력은 자신의 존재감을 가장 강하게 확인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부리는 것만큼 짜릿한 쾌감을 안겨 주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곁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 받고 그 자신도 쾌락 속에서 스스로를 나락으로 밀어 넣습니다. 권력욕을 따라 사는 것은 모두를 죽게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모두를 살리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분은 몸소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낮아지고 약해져서 섬기는 길입니다. 권력에의 의지를 내려 놓고 섬김에의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결국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십자가는 온 세상을 살리는 능력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믿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빌 2:5)을 품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빌 2:6-8)


Comments

3 responses to “이사야서 14장: 모두를 죽게 하는 길, 모두를 살리는 길”

  1. 인간의 욕심에는 한계가 없는것을 깨닫습니다, 권력을 한번잡으면 더 큰권력을 잡을려고 온갖 술수를 쓰는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항상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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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11월 5일에 있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유명해지면 아무 일이든 해도 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또 당선되면 어쩌나, 그런게 ‘심판’이고 ‘멸망’이지 않겠나…두려워집니다. 현집권당이 잘해서 찍어주는게 아니라 다른 당보다 여러 이슈에서 ‘덜 악한’ 것 같으니까 찍어줘야지 판단하면서도 선거는 왜 늘 차악의 선택이 되는지, 왜 희망보다 포기가 익숙한 감정인지 답답할 뿐입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예전 사람들은 정말 어리석었구나, 이렇게까지 악했구나, 지금은 이렇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생각이 들면 좋겠는데 전혀 아닙니다. 지금의 세계를 그리는 것 같고, 그들보다 나을게 없어 보입니다. 권력을 탐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 심리라면 신앙은 그것에 굴하거나 안주하는 것을 격려해선 안 될 것입니다. 그 심리를 이용해 자기를 신으로 높이기 까지 하는 못된 인간들이 종교를 내세워 먹고 살고 있습니다. 자기 편하자고 남을 이용하고 힘들게 만드는 것은 권력의지의 일종입니다. 모든 관계의 방향을 자기 좋은 쪽으로 돌리는 사람은 권력을 숭상하는 사람입니다. 나도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나 좋을대로 생각하고 나 편한대로 타인을 대하는 습관은 권력을 향한 부러움과 선망에서 나옵니다. 나 중심으로 보고 판단하는 습성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살피는 일에 열심을 내기를 원합니다. 나의 일방적인 생각 아닐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렇게 안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놓치는 것은 없을까…잠깐만이라도 이런 생각을 하며 숨을 고른다면 ‘구름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나님과 같아지고 싶은 욕망의 싹을 자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 주께서 통치하시는 나라가 과연 가능할까, 이 땅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나라라면 우리는 왜 그 나라를 품고 기도하며 기다려야 하는걸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기억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이라고 믿는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나 자신을 간수하는 것, 나의 싸움 – 욕망과의 싸움, 컴플렉스와의 싸움, 헛되고 거짓된 것에 저항하는 싸움 -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주의 나라를 꿈꾸는 백성의 일이라고 믿습니다. 세상을 바꾼다? 내가? 선뜻 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전에는 생각해 보지도 않던 일들을 지금은 생각도 하고, 행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바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느려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너무 작아서 보려고 애를 써도 잘 안 보이지만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시는 속도는 이보다 빠를 수가 없겠지요. 내가 이리 늦고 굼뜨니까요. 주님 감사합니다. 멸망과 심판의 글 속에서 주님의 은혜를 읽습니다. 주의 은혜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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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41014 이사야14장

    <하나님의 주권>

    “주님께서 야곱을 불쌍하게 여기셔서, 이스라엘을 다시 한번 선택하시고, 그들을 고향 땅에서 살게 하실 것이다.”(사14:1)

    “이것이 주님께서 온 세계를 보시고 세우신 계획이다. 주님께서 모든 민족을 심판하시려고 팔을 펴셨다. 만군의 주님께서 계획하셨는데, 누가 감히 그것을 못하게 하겠느냐? 심판 하시려고 팔을 펴셨는데, 누가 그 팔을 막겠느냐?”(사14:26-27)

    이사야서 14장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바빌론, 앗시리아, 블레셋의 멸망에 대해 예언한다.
    비록 앗시리아에 멸망되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들의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바빌론, 앗시리아, 블레셋의 멸망을 계획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인류의 흥망성쇄가 자신이 가진 의와 노력,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목적만을 위해 달려가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을 놓치고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보곤한다. 작게는 나의 개인의 삶, 또 크게는 모든 나라들의 서사가 이러한 가치관들로 결정된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오늘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멸망했던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강성했던 바벨론, 앗시리아, 블레샛을 멸망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보게 된다. 멸망했던 이스라엘이 회복의 길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성하고 찬란했던 강대국인 바벨론, 앗시리아, 블레셋을 멸망시키신 것은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위해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탄탄대로를 달린다고 자만하지 말아야 하고, 당장 고통스럽고 망했다 여겨지는 상황속에서도 낙담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만군의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하셨는지, 어떻게 팔을 펴셨는지가 중요하다. 그저 나는 엎드려서 하나님의 긍흘과 자비를 구하며,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스림가운데 사는 것이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 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 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 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죽음은 우리에게서 작용하고, 생명은 여러분에게서 작용합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으며, 그러므로 말합니다. 주 예수 를 살리신 분이 예수 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세워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서,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후 4:7-15)

    예수님은 질그릇 같은 나에게 찾아오셨다. 깨어지기 부서지기 쉽고 보잘 것 없는 나애게 찾아오셔서 내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으로 인해 사시게 한다. 사나 죽으나 나는 주님의 것이고,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생명의 길로 가는 것이다.
    의지할 수 없는 다른 것들을 의지하는데에 힘을 쏟지말고, 진노중에라도 하나님을 찾는 백성들에게 긍휼을 잃지 않으시며 회복을 약속하시는 분을 의지하자.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이 땅에 모든 크리스쳔들이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회복을 주시는 유일한 구원자 되시는 하나만 의지하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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