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1장: 회개가 희망이다

해설:

예언자 이사야는 “유다 왕 웃시아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위해 예언을 했다. 편집자는 이사야의 예언집을 시작하면서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 에 대하여 본 이상이다”(1절)라고 소개한다. “이상”은 히브리어 ‘하존’의 번역으로서, 하나님의 눈으로 역사를 보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당시 유다 백성의 타락상을 책망하며 그들이 죄로 인해 받을 심판에 대해 예고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백성을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희망을 주신다. 1)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에 대한 고발, 2) 그 죄에 대한 심판 그리고 3) 회개와 회복의 희망은 이사야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다.

먼저 그는, 그렇게 심판 받을 수밖에 없었던 시온의 타락상을 고발한다(2-17절). 예언자는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웠는지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3절)라는 하나님의 탄식을 전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맞을 짓만을 골라 행해 왔다(4-6절). 그로 인해 땅은 황폐해지고 성읍들은 불에 타버렸다(7-8절). 그나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 가운데 얼마라도 살아 남은 것이 다행이다(9절). 소돔과 고모라처럼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별로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소돔의 통치자들”이요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부른다(10절). 그것은 유다 백성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발이다. 

하나님은 특별히 그들의 영적 타락을 신랄하게 고발하신다(11-14절). 그들의 제사와 제물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성전에 모여 제사 드리는 일에는 열심이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부정과 불의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 보지도 않겠다”(15절)고 하신다.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제사 드리기에 앞 서 그들은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고 악한 행실을 버려야 한다. 정의를 추구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도와 주어야 한다(16-17절). 세상에서는 밥 먹듯 악을 행하면서 성전에 모여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역겨운 일이다.

그들이 살 길은 오직 회개 밖에 없다. 아무리 죄가 많고 크더라도 진실로 회개하면 양털같이 씻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회개 하기를 거부하고 계속 죄악을 즐긴다면 심판을 피할 수 없다(18-20절). 

이어서 예언자는 “신실하던 성읍”(21절) 곧 예루살렘 도성이 폐허가 된 것에 대해 탄식한다. 정의가 충만하고 공의가 가득하던 그 성에 살인자들이 판을 치는 상황이 되었다. 모두가 부정과 거짓을 일삼고 정의와 자비를 외면하고 있다(22-23절). 이런 상황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 해서라도 깨끗하게 하시겠다고 하신다(24-26절). 그럴 때 시온은 다시금 정의의 도시가 될 것이고, 회개한 백성은 공의를 행하는 백성이 될 것이다(27절). 반면,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28-31절).

묵상:

예배와 일상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참된 예배는 일상의 삶에 영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일상의 삶은 또한 예배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신실한 예배자는 일상 생활에서 신실한 사람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일상 생활에서 진실하게 산 사람은 예배의 자리에 신실한 마음으로 설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가 말한 “몸으로 드리는 제사”요 “합당한 예배”(롬 12:1)입니다. 하나님 앞에 따로 드리는 예배가 일상 전체를 예배 드리듯 살게 만들어 줍니다. 

원리는 그러한데, 실제로는 예배와 일상이 분리되어 따로 도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예배를 드리는 일에는 정성을 다하는데, 일상 생활에서는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처럼 자신의 욕망을 따라 죄악을 일삼습니다. 양손에 피가 가득한데 그 손으로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립니다. 일상 생활에서 추하고 거짓된 말을 쏟아내던 입으로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고 기도를 올립니다. 그렇게 되면 예배는 자신의 불의와 부정을 감추는 위장술이 되어 버립니다. 혹은 불편한 양심의 도피처가 되어 버립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역겨운 일이고 예배자 자신에게는 해로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회개를 촉구합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지금 당하고 있는 국가적인 위기는 영적 위기임을 상기시킵니다. 정치적 위기는 영적인 위기입니다. 사회적 불의와 부정은 영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배와 삶이 분리된 것에 대한 뼈아픈 각성을 요구합니다. 불의한 삶을 위장하는 수단으로 예배를 오용한 것에 대해 옷을 찢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예배의 자리에만 가두어 두려 했던 불신앙에 마음을 깨뜨리라 하십니다. 그럴 때 제사와 예배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개입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이사야서 1장: 회개가 희망이다”

  1. 주일에만 성도입니다, 교회에서 정성으로 예배를 드립니다만 교회밖에서는 세상사람과 같거나 더 세속적인 사람으로 살아왔습니다. 온 나라가 불안정합니다, 부조리로 가득합니다, 정치인들의 삶에 문제가 있습니다. 너무늦기전에 내자신부터 시작해서 온 나라가 십자가 밑에 무릎 꿇고 은혜를 구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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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구약의 선지서 Prophets 묶음을 해설한 글을 보면 선지자들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들이 거룩하신 분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 – 각자의 마음속과 가정이라는 ‘사생활’ 속에서 느끼고 행동하는 방식, 돈을 벌고 쓰는 방식, 우리가 채택한 정치 제도, 우리가 싸우고 있는 전쟁들, 우리가 견디고 있는 재난들, 우리가 상처 주는 사람들과 우리가 돕는 사람들 모두-에 대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피터슨 목사는 어느 것도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수 없고,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통치에서 제외되거나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씁니다. ‘모든 것이 거룩, 거룩, 거룩하다’고 그분의 해설에서 말합니다. 열여섯 명의 선지자들이 남긴 기록, 특히 이사야서는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흠 많고 깨어지고 일그러진 우리의 현실을 다루시는 방법은 심판과 위로와 구원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일어날 일 (1절)을 보여 주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고발하고 심판하실 의도를 알려 주십니다.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회개와 회복의 희망이 올 것도 알려 주십니다. 주님은 위로자이며 구원자이십니다. 1장에는 ‘머리는 상했고 마음은 병이 든 (5절)’ 우리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사야가 본 당시의 모습이 지금의 우리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호와는 백성이 바친 모든 제물과 팔을 벌리고 하는 기도를 거부하십니다. ‘옳은 일을 배우고 정의를 찾아라, 억눌림받는 사람을 구해주고 재판에서 고아들을 지켜주며 과부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어라 (17절)’ 말씀하십니다. 제물을 바치고 기도하는 일은 그만 두고 이런 일들을 하라고 하십니다. 한국에서 이번 주간에 열렸던 로잔대회의 ‘서울선언’을 놓고 기독교계에서 이런 저런 말들이 나오나 봅니다. 교회와 복음에 대한 세계 복음주의자들의 토론과 결단의 잔치로 알려진 이 대회는 선언문을 통해 사회적 주요 의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담습니다. 서울선언에는 동성애, 생물학적 성과 성별, 전쟁, 기술발전 등이 담겨 있습니다. 휴먼 섹슈얼리티에 대한 왜곡 (동성간의 성관계, 성적 지향성, 젠더의 선택 등)을 탄식하며 동성애에 대한 반대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습니다.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쪽에선 선언문이 미흡하다고 말합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자체를 입에 올리지 못하도록 (차별하고 혐오할 수 있는 자유가 침해 당하지 않게) 선언문에 담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다른 편에선 기후 변화의 위기에 대해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은 것을 지적합니다. 상대적으로 형편이 괜찮은 나라들로 인해 더욱 심각해지는 기후 위기가 전세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교회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지금 벌어지는 전쟁들에 대해 회개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모호하고, 어떤 입장인지 침묵할 뿐입니다. 로잔대회여서 화제가 되는 것이겠지만 한국 교회의 현주소를 보여 준다는 면에서 그리 놀랍지도 않습니다. 엊그제 있었던 기독교대한감리회의 감독 회장 선출도 만만치 않습니다. ‘감리교 수퍼 삼형제’라는 타이틀을 자랑하며 한국의 대형교회를 이끌다가 은퇴하면서는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교회 세습을 했던 아버지와 아들이 ‘부자 감독회장’이라는 타이틀도 하나 더 얹었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선지자들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고, 인간관계의 기술도 부족하며 세상의 이치에 맞게 순응하는 합리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예언자적인 소명을 등한시 하고 세상의 입맛에 맞추려고 급급하는 모습은 보기에 민망합니다. 한국에서 교인이라고 말하기 참 힘들 것 같습니다. 얼굴이 두꺼워야 할 수 있는 일일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도 감리교단 분리를 놓고 고민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동성애가 이슈였지만, 깊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동성애는 ‘제목’일 뿐이었습니다. 동성애라는 이슈를 놓고 고민하면서 내가 마주한 것들은, 나의 편견, 기득권, 배제, 차별, 편협함, 안일, 불편, 불안…등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분을 무시하는 일체의 행동을 나무랍니다. 성전 마당만 밟고 다니는 분주함을 야단칩니다. 예배하러 교회에 가는게 다가 아닙니다. 예배하며 사는게 중요합니다. 예배하듯 사는게 중요합니다. 이사야서를 시작하면서 예배가 새로와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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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70928 이사야1장

    <악한일에서 돌이킴>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 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주님께서 말씀 하신다.
    “오너라. 우리가 저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너희가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소산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거절하고 배반하면, 칼날이 너희를 삼킬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이사야1:14-20)

    오늘 묵상 본문을 읽는데, 마음 속 깊은 곳으로 부터 탄식과 눈물이 터져나왔다. 누구보다 예배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그 예배를 거절하시는 이유. 그 예배가 짊어지는 짐이라고 말씀하시며, 지쳤다고 말씀하시기 까지 얼마나 인내하셨을까?
    팔을 벌려 기도하고, 수많은 시간을 들여 기도해도… 많은 절기들을 따박따박 지켜가며 예배해도 정결케되지 않은 자의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고 한다.
    하나님 보다 높아진 마음,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지만 자기 만족을 위한 예배는 모두 우상숭배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우상숭배인지 조차 모르는 죄.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 엎드려 회개하길 원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로 얼룩진 인간은 결코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탄식과 절망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에 주목하다보면 마주하는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은 충분히 경고하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진노하실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쓸어버릴 수 있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것이 죄인지 말씀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신다. 그리고 회개하며 나아갈 때 어떤 은혜를 주실지 말씀해주신다. 경고하지 않고, 진노를 퍼부으실 수 있는 분이시나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진노와 멸망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오래참음으로 기다리시고,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오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죄를 보게 하시고, 그 죄로 부터 돌이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들을 쓸어버리기로 결정하신다. 그러나 당대의 의인이었던 한명 ‘노아’를 부르셨다. 그리고 노아를 통해 방주를 건설하게 하시고, 그의 자손들과 동식물들을 방주에 태워 다시 하나님의 새 역사를 시작하신다.
    쓸어버리기로 결정하신 하나님이 구원의 방주를 마련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멸망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을 통해 그들이 돌아오길 원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살아있는 구원의 방주를 다시 마련하셨다. 자신 스스로 육신의 몸을 입고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온 인류를 쓸어 버리지 않고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새 방주를 마련하셨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마음을 돌이켜 죄를 자복하는 것이 구원의 방주에 올라타는 길이다. 내가 살 길은 오늘도 하나님 앞에 바짝 엎드려 내 안에 있는 모든 우상을 회개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 뿐이다.
    내 안에 하나님 높아진 마음이 있는것은 아닌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는건 아닌지 나의 모습을 돌이켜본다. 그리고 주님 앞에 다시 엎드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날 새롭게 하시도록 간구하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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