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3장 22절-4장 1절: 현실을 초극하는 능력

해설:

당시 가정을 구성하고 있는 또 다른 축은 주인과 종의 관계였다.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에 대해서는 간략한 지침을 주는 것으로 만족한 사도는 종에 대해서는 비교적 길게 지침을 준다. 노예 제도가 당연시 되던 시대에 종들은 자주 주인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곤 했다. 그래서 사도는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종에 대해 지침을 준다. 

자녀에게 요청한 것과 같이 동일하게, 사도는 종에게, “모든 일에 육신의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22절)라고 명령한다. 종은 주인의 절대 권한에 속하는 존재로서 모든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당시 제도 하에서 종에게 기대되던 의무였다. 하지만 사도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성실한 마음으로 하십시오”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사회적 통념에 신앙적인 색깔을 입힌다. “성실한 마음”은 “정직한 마음” 혹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주님을 두려워하면서”라는 말은 살아계신 주님의 눈을 의식하라는 뜻이다. 주님을 의식하게 되면 “눈가림으로” 하지 않고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게 된다. 주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주인을 위해 일할 때 종은 주인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럴 때 “진심으로”(23절) 행하게 된다. “진심으로”는 “마음 다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이어서 사도는 종 된 신도들의 변화된 신분에 대해 상기시킨다. 당시 사회에서 종은 주인에게서 아무런 유산도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여러분은 주님께 유산을 상으로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24절)라는 말은 종들에게는 놀라운 약속이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그들은 인간 주인을 섬기고 있지만, 실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고 있다. 그 주님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으신다(25절). 인간 주인은 종을 부당하게 대우하곤 하지만, 하늘의 주님은 모든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심판하신다. 그러므로 어떤 핑계로도 “불의”를 행하지 말고 늘 정직하고 신실하게 맡겨진 일을 섬겨야 한다.

종들에게 주인에 대한 성실한 복종을 요구한 사도는, 주인에게 종들에 대한 공정한 대우를 요구한다(1절). “정의”는 종에게 노동에 대한 정당한 몫을 주라는 뜻이고, “공정”은 종들을 차별하지 말고 동등하게 대우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당시 스토아 철학자들도 요구하던 덕목이다. 하지만 사도는 “여러분도 하늘에 주인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라고 덧붙임으로써 신앙적인 색깔을 더한다. 간단한 문장이지만, 이것은 주인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숨긴 말이다. 

묵상:

어떤 사람들은, 사도가 정말 진리의 사람이었다면 노예 제도의 철폐를 부르짖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시 사도가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를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그는 신생 종교의 유랑 전도자였고, 그로 인해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 처지에서 노예 제도의 철폐를 부르짖었다면, 그는 정작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일차적인 소명은 사회 개혁이 아니라 인간 개혁이었습니다. 사회 개혁은 인간 개혁의 결과로 이루어져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 개혁의 유일한 능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다른 가족 구성원들(아내, 남편, 자녀, 부모, 주인)에게는 한 절씩을 할애한 반면 종에 대해서는 네 절을 할애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을 순응적인 존재로 길들이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도의 지극한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노예 제도 하에서 종들이 얼마나 자주 폭행과 차별과 착취를 당하고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에게는 그들을 해방시킬 아무런 외적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내적 능력 뿐이었습니다. 

사도는 그들에게, 맡겨진 일을 주님께 하듯 신실하게 섬기라고 권면합니다. “주님께 하듯 한다”는 말은 “예배 드리듯 한다”는 뜻입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죽지 못해 하는 것과 예배 드리듯 하는 것은 천양지차입니다. 그것이 내적 해방의 비결입니다. 또한 사도는 그들에게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들은 신분 상 지상에서 받을 아무런 유산이 없지만 하늘의 주님에게는 영원한 유산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에 대한 믿음 그리고 영원한 유산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그들이 현실의 고통을 견디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노예 제도가 사라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과거 노예들이 처했던 것 같은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고칠 수 없어서 주어진 현실을 감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현실 너머에서 일하고 계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그분의 차원에서 행하시는 일을 소망해야 합니다. 그것이 현실을 이기는 힘이 됩니다.  


Comments

2 responses to “골로새서 3장 22절-4장 1절: 현실을 초극하는 능력”

  1.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신 주님을 항상 기억하고 순복하기를 원합니다, 땅끝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굳게 붙잡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사람들을 대할때 진심으로 주님을 대하는것 처럼 존경하고 섬기는 태도를 갖도록 도와 주십시오. 착하고 부지런한 종이라고 주님께로부터 칭찬받는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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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문득, 바울의 편지 수신자들은 종이 많았을까 종을 부리는 주인이 많았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오늘 본문은 종에게 하는 말씀이 네 구절이고 주인에게는 한 구절 뿐입니다. 주인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을 구체적으로 합니다. 주인을 주님으로 대하라고 까지 말합니다. 당시에 복종하지 않는 종들이 많았다는 걸까요.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은 댓가를 받게 될 것 (25절)이라고 엄중하게 경고한 것을 보아 노예들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초대 예수 공동체들도 이런 일들에 노출되어 있고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구약 성서도 그렇지만 바울의 서신들도 우리가 읽을 때 역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읽으면 의미를 찾아내기 어렵습니다. 동양의 고전이나 명저 중엔 짧은 글 속에 깊은 뜻을 담은 책들이 있습니다. 채근담 같은 책이 한 예입니다. ‘채근담’을 인터넷에 검색하면 ‘대인춘풍 지기추상’ 같은 구절이 바로 뜹니다.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 (춘풍)처럼 따뜻하고 관대하게, 그러나 자신을 대할 때는 늦가을의 서리 (추상)처럼 엄하게 대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타인과화목하게 지내면서 자기를 돌아보는 일에도 게으르지 말라는 말입니다. 채근담을 쓴 사람이나 그의 시대를 잘 몰라도 구절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탈무드’도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경전은 토라이고 토라는 대개 세 가지를 뜻합니다. 모세가 썼다고 믿는 모세오경 -구약의 처음 다섯권 책-을 토라문서라고 부릅니다.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으며 회당에 모였을 때 읽습니다. 두번째로 토라라는 말은 히브리 성경 -우리가 구약이라고 하는 성경과 상당부분 일치하는-이라는 뜻으로 스물 네권의 성경책 전체를 가리킵니다. 끝으로 토라는 유대인의 법과 교육과 관습 전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유대인의 ‘정신’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지요. 문서로 작성된 부분 (모세오경) 말고,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토라를 모아 정리하는 작업 주후 1, 2세기부터 시작해 5세기까지 활발하게 이어졌다는데 이것을 미쉬나라고 부릅니다. 바리새파의 랍비들이 토라를 놓고 토론하고 해석한 것이 미쉬나 (반복이라는 뜻) 입니다. 탈무드는 미쉬나와 미쉬나를 해석한 책입니다. 토라를 연구하고 해석한 미쉬나, 미쉬나를 연구하고 해석한 (주석과 해설을 단)한 것이 탈무드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지혜를 원석이라고 보면 탈무드는 정제와 가공의 과정이 많이 들어간 보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탈무드는 ‘정의’ 를 추구하며 살라는 신명기를 해석하면서 ‘서로 살 수 있는 상생의 길을 찾기 위해 타협하는 것도 정의’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건국 시대에 활동했던 랍비는 ‘세속적인 현대 국가가 이와 전혀 다른 가치와 법에 기초를 둔 종교 공동체와 공존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두 낙타가 좁은 길에서 마주치면 어느 쪽이 더 먼 길을 여행하는지, 어느 쪽이 더 무거은 짐을 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고 답하면서, 국가가 종교 공동체에 더 양보하고, 더 오랜 세월 동안 유지될 수 있는 가치들을 존중해 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견해를 내놓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탈무드의 지혜나 채근담의 명구 같이 누구나 들으면 아하! 할만한 지혜를 뽑아내기란 어렵습니다. 말씀 묵상이 지향하는 것이 그렇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보다 성경을 해석한 책, 간략하지만 심오한 아포리즘을 모아놓은 책들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종으로 사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라, 주인을 어려워하라, 눈 앞에서만 충성하지 말라…이런 말은 ‘기본’입니다. 종에게 갖는 일반적인 기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주인에게 종을 공정하게 대하고 좋은 것을 베풀어 주라는 말은 기본 보다는 파격에 가깝습니다. 함부로 대하고 덜 좋은 것을 준다고 제재를 받는 것이 아닌데 굳이 잘 대해주라는 것은 일반적인 관행을 파하는 부탁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은혜에 빗댄 은유일까요…주인을 주님으로 대하라는 구절과 주인들 역시 하늘에 계신 주인을 섬기는 사람 (종)이라는 구절이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인 것 같습니다. 서로를 주님 대하듯이 대하는 것, 현재의 지위나 처지 너머를 보는 초월적인 눈을 갖는 것, 땅에 묶여 있지만 하늘을 고향으로 여기는 것…이런 것이 바울이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요. 실제로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으니까요. 성령께서 깨닫도록 도와 주시고, 깨달은 것을 행동으로 옮기도록 도와 주시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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