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2장 20-23절: 진정한 경건

해설:

사도는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에 대한 경고를 이어간다. 그는, 골로새 교인들이 “세상의 유치한 원리”(20절)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한다. “세상의 유치한 원리”는 유대인들이 지키던 종교 전통과 이방 종교들의 전통을 가리킨다. ‘스토이케이온’은 “유치한”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초보적인”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믿는 이들은 “세상에 속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산다.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라 산다는 말은 이 세상에 속하여 살고 있다는 의미다. “붙잡지도 말아라. 맛보지도 말아라. 건드리지도 말아라”(21절)는 말은 레위기에 나오는 여러가지의 정결 규정을 가리킨다. 율법은 부정한 것을 만지거나 가까이 하면 부정탄다고 가르쳤다.

“이런 것들은 다 한때에 쓰다가 없어지는 것”(22절)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발언이다. 사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율법은 “사람의 규정과 교훈을 따른 것”이라고 부연한다. 이것은 “장로들의 전통”에 대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정결례를 지키는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막 7:8)고 하시면서,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19절)고 선언하셨다. 

앞에서 사도는, 유대인들이 지키는 종교 전통들을 “장차 올 것(실체)에 대한 그림자”(17절)라고 했다.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니, 사람의 규정과 교훈을 따라 만들어진 그림자는 필요가 없어졌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율법의 전통을 지키는 것은 상관 없으나, 이방인들에게도 율법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다.

유대교와 이방 종교의 전통들은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키지는 못하고 외형적인 경건만 쌓게 만든다(23절). “꾸며낸 경건”은 ‘에텔로트레스키아‘의 번역인데 “위선적 영성”으로 번역할 수 있다. “겸손”은 18절에서 사용된 동일한 단어로서 “몸을 학대하는”이라는 단어와 의미와 겹친다. 유대교와 이방 종교의 전통들을 따라 살면, 육신을 학대하는 결과에 이른다. 금욕주의에 빠진다는 뜻이다. 그것은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 3:5) 위선적 영성으로 인도한다. 

묵상: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막 10:2)라고 여쭙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3절)고 반문하십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신명기 24장 1절을 근거로 하여 “이혼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4절)라고 답합니다.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모세는 너희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이 계명을 써서 너희에게 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5-9절)고 답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율법의 일부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신 것이고, 일부는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담아 정하여 준 것입니다. 이혼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내보낼 수 있다고 율법에 규정한 것은 그들의 “완악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죄성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그들이 행할 수 있는 수준에서 율법을 정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율법 규정들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반영되어 있지만, “최대치의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죄 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소치의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율법은 글자 그대로 지키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그 뜻을 행하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사도는 율법 규정이 “실체의 그림자”라고 했고, 히브리서 저자는 “실재의 모형”이라고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실체요 실재로 여겼습니다. “율법주의”란 율법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기고 그것을 실천하여 구원에 이르려는 노력입니다. 바울 사도는 누구보다 철저히 그렇게 믿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면의 변화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외적인 경건의 껍질만 두텁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공연히 몸을 괴롭히고 학대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율법의 차원에서 만족하지 말고 창조의 차원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지어진 사람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기대하셨던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우리의 죄성이 살아 있는 한,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능력 안에서 거듭 나게 되면 우리는 율법의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높은 기준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면과 외면이 모두 거룩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골로새서 2장 20-23절: 진정한 경건”

  1. 세상의 지식은 우주가 우연히 만들어 졎다고 합니다, 하늘의 지혜는 창조되었다고 합니다.지식은 상대적이고, 신령한 지혜는 절대적입니다. 율법은 유한하지만 은혜는 영원합니다. 유한한 율법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초라한 인생입니다만 십자가 은혜로 자녀로 삼아주신 사랑에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항상 주님안에 거하면서 기뻐하시는 알차고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원합니다.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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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70918 골로새서 2:20-23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세상의 유치한 원리에서 떠났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이 세상에 속하여 사는 것과 같이 규정에 얽매여 있습니까?”(골2:20)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라 “
    (롬8:1-2)

    그는 과거 율법을 따르는 삶에 앞장섰던 사람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죽이는 것도 마땅하다 여겼던 사람이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도바울은 다매색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그는 예수님만 유일한 구원자이시고, 참 생명이신 것을 모든 곳에 다니며 증거했다. 누구보다 율법적이었던 그였기에, 그의 서신이나 그가 기록한 말씀에 보면 율법을 빗대에 말한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로마서 8장 1절~2절에도 보면 ‘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들에게 최고의 가치였던 율법을 죄와 사망의 법으로,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표현하며- 이 두가지가 어떻게 다른지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오늘 말씀에서도 로마서의 ‘법’과 같이 ‘규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율법을 간접적으로 언급한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롭게 거듭난 사람은 더이상 율법이라는 법과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성령으로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율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성경을 한 문장으로 규정한다면 어떻게 말하겠는가? 누군가 질문한다면 나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 홀로 유아독존(?)하실 수 있는 분이 굳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굳이 인간을 만드셔서 타락한 모습을 보시고, 뒷수습을 하시는 하나님을 성경에서 읽어나가면 왠지 하나님이 짠하기 까지 하다. “왜 굳이 이 고생을 하시는거지? 왜 인간을 만드셔서…?”
    유치한 질문일지 모르나, 나는 이 질문을 하며 성경을 읽을 때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유일한 주제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를 만나게 된다. 굳이 이 번거롭고, 불필요해 보이는 뒷수습을 하시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하나님의 사랑의 정점은 ‘예수님’이시다.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 자신 스스로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나의 죄를 대속하신 이 놀라운 사실은 ‘사랑’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전제하에 성경을 읽게 되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는지, 레위기에 나오는 그 복잡한 제사법들은 왜 생겼는지 이해하게 된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누구가 예외없이 죽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를 대속물로 대신하게 하셨고, 여러 절차들을 거처 하나님 앞에 나아갈 특권을 주신 것이다. 이것이 은혜이고, 이것이 사랑의 증거이다. 율법 역시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 안에서 보호받고, 안전하도록 주신 사랑의 지침서인데- 이것이 하나님 자체보다 우위에 있게 되면 사망의 법으로 작용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영락없이 그 율법의 종이 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 자체를 아는 것보다 더 우선시 여겼다. 율법의 기준을 내세우며, 예수님을 못박는 것을 합리화 시켰던 유대인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데에는 최고였을지 모르나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경험하는 개인적인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던거 같다.

    내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갖고 소통하지 않는다면 나도 유대인들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나를 사랑하기 하시는 그 하나님을 바로 지금 이 순간 만나는 것. 하나님이 주신 성경말씀을 통해, 찬양을 통해, 설교들을 통해, 예배를 통해, 기도를 통해…또 자연 만물들을 통해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때 나는 율법의 종이 아닌 그리스도의 자녀로 살아가게 된다.

    나를 묶어두는 세상의 원리와 규정으로 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오늘도 사랑으로 나에게 말씀하시고, 새 일을 시작하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자.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신 분. 성실하시고, 인자하시고, 자비로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또 무엇을 위해 기도하길 원하시는지 잠잠히 그분 앞에 머물자.

    #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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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할 수 없으니 문제지만, 자기에겐 알리바이가 되기도 합니다. 겉모습만 그럴싸하면 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겉 볼 안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겉모습을 보고 속을 짐작한다는 뜻으로 외양을 잘 가꾸고 관리하는 것의 중요성을 가리킵니다. ‘보여주기식’ 정책, 선행, 화합…이런 것은 속은 어찌됐든 포장을 잘해서 좋아 보이게 만들면 된다는 인식의 결과입니다. 우리 사회의 특징은 보기에 좋으면 그만이다, 비쥬얼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소셜미디어가 그 예입니다. 겉모습으로 판단하게 만들고, 그 겉모습을 좋게 만드는 트릭을 참 많이 씁니다. 경건과 겸손을 높이 평가하는 신자들도 거기에 넘어갑니다. 합니다. 경건은 신자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함정이 되나 봅니다. 경건한 것과 경건해 보이는 것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경건해 보이면 곧 경건한 것이 됩니다. 요즘엔 가짜라는 뜻의 fake 단어가 전성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인공지능을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하기도 전에 fake 부터 양산되었습니다. fake 는 가짜, 모조품이고, 동사로 쓸 땐 ‘…인 척하다’가 됩니다. ‘테드 TED’ 토크 중 최고 인기 강의로 손꼽히는 강의가 Amy Cuddy 교수의 “바디랭귀지의 중요성-Your body language may shape who you are (2012년)” 입니다. 사회심리학자로 하버드 비지니스 스쿨에서 가르쳤던 커디 교수는 20분 분량의 이 강의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는데 강의의 요점은 “fake it till you make it” 입니다. 19살 대학생이었을 때 교통사고를 당해 뇌를 다치고 주요 신체기관도 크게 상해서 의사들은 사고 이전으로 회복하기 어렵겠다고 예측했지만 커디는 대학교 졸업은 물론 학문적인 성과를 꾸준히 거두면서 자신의 삶을 다시 ‘재조립’했습니다. 그는 ‘될 때까지 억지로라도 꾸민다’를 넘어, ‘꾸며서라도 하다보면 그렇게 살게 된다 fake it till you live it”는 메세지를 자기의 삶을 통해 만들어 냈습니다. 경건도 그럴까요. 선하고 의롭게 사는 ‘척’을 하다보면 그렇게 되어질까요.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뜻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복음은 우리를 어른으로 대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 완전에 이른 모습은 아니지만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면 완전해질 것, 그리스도를 닮아 갈 것이라는 소망을 품게 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온전해지면 사랑해줄께 하시지 않고, 죄인이었을 때에도 사랑했다, 완전을 향해 가려고 애쓰는 지금도 사랑한다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에 응답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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