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2장 16-19절: 머리를 붙들라

해설: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8절)로부터 골로새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도는 좀 더 구체적으로 주의를 준다. “먹고 마시는 일”(16절)은 레위기 11장의 규정에 따라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을 구분했던 유대인들의 전통을 가리킨다. “명절이나 초승달 축제나 안식일 문제”는 유대인들이 특별한 날로 지켰던 전통을 가리킨다. 유대주의자들은 이방인 신도들에게 율법을 따라 이런 전통을 지키도록 가르치고 요구했다. “아무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라는 말은 유대주의자들이 그런 것을 지키지 않는다고 시비를 걸 때 대응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런 것은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17절)이라는 말은 이 땅에서 행하는 종교적 행위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날 일들을 본 딴 것이라는 뜻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요,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드려지는 제사의 모형이다. 

“그 실체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라는 말은 그 모든 종교 행위들을 통해서 추구하려는 실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뜻이다. 앞에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십니다”(9절)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실체의 그림자”인 종교 행위에 만족해야 했는데,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니, 더 이상 그림자(모형)에 붙들릴 이유가 없다. 

“겸손”(18절)은 ‘타페이노프로쉬네’의 번역인데, “절제” 혹은 “금식”이라는 의미도 가진다. 개역개정은 “꾸며낸 겸손”이라고 번역했는데, 영어 성경에서는 “거짓된 겸손”(false humility), “금욕”(asceticism) 혹은 “자기 학대”(self-abasement) 등으로 번역한다. 여기서 사도는, 금욕적인 생활과 천사 숭배를 하도록 요구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 자는 자기기 본 환상에 도취되어 있고”라는 말에서 그들이 신비주의에 심취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신비주의에 심취한 사람들은 자주 매우 세속적인 경향으로 흐른다(“육신의 생각으로”). 또한 신비주의에 심취한 사람들은 영적 교만이 매우 강하여 자신의 생각을 절대 진리로 여긴다.

“그는 머리에 붙어 있지 않습니다”(19절)라는 번역보다는 개역개정의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는 번역이 더 낫다. ‘크라테오’는 무엇인가를 단단히 붙잡는 행위를 가리킨다. 사도는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라고 했다(1:18). 따라서 교회의 지체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각 마디와 힘줄을 통하여 영양을 공급받고, 서로 연결되어서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대로 자라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지체가 된 사람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단단히 붙잡고 살아야 한다. 

묵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분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시작됩니다. 그분은 나의 주님이 되시고, 나는 그분의 제자가 됩니다. 그분은 나와 더불어 먹고, 나는 그분과 더불어 먹습니다(계 3:20).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나만의 주님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내가 그분에게 연결되는 순간, 나는 그분을 통해, 그분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들과 연결됩니다. 

<사도신경>을 따라 “나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왕으로 섬기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과거에 살았던, 현재 살고 있는, 앞으로 살아갈 모든 신자들)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사람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일 수 없기에 각 지역에서 교회로 모입니다. 

골로새에도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머리” 즉 그리스도 예수를 “붙들고 있지 않은”(19절)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몸으로는 교회로 모이지만 마음으로는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에 흔들렸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따라 음식 규정을 지켜야 하며 여러가지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금욕적인 생활과 천사 숭배를 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사도는 그 사람들이 유혹 받고 흔들리게 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머리를 붙들고 있지 않음”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분은 몸의 “머리”이며,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입니다. 지체는 머리와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지체는 또 다른 지체들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각 지체를 온전히 성장하게 하십니다. 

그 연결 상태는 저절로 지속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한 몸으로 연결시켜 주셨으니, 우리는 그 연결됨이 지속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늘 연결되어 있도록 그리고 지체로 붙여주신 교우들과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고, 그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갈 수 있습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골로새서 2장 16-19절: 머리를 붙들라”

  1. 나의 육신과 영혼, 가정, 교회, 공교회의 머리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합니다만 그토록 귀한 말씀을 삶으로 온전히 옮기지 못하는 가련한 존재입니다. 자주 모르는 사이에 종교행위로 상대방을 비방하고 심판하는 위선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고 주님의 성격과 성품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언젠가는 알차고 풍성하게 성령의 열매를 맺게하실 신실하신 주님을 믿는 소망으로 감사하는 아침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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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ung mae kim

    나의 삶에서 주님과 만난 때를 생각해 봅니다. 믿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면 흔히 ‘모태신앙’이라고 하는데 나의 어머니는 주님을 믿었어도 교회는 다니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엄마는 일상적인 대화에서 하나님이나 믿음 이야기하는걸 꺼려 하지 않았지만 교회에 열심인 사람들에 대해선 오히려 엄격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요란하게 믿는’ 사람들을 안 좋아했습니다. 교회에 열심인만큼 생활도 열심히 하는지 관심있게 봤습니다. 매사에 하나님을 ‘들먹이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이상한 집단들이 많아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내가 교회에 가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좋아하는 정도를 넘어 격려하고 감사하게 여겼습니다. 청소년 때부터 교회에 나갔으니 나의 신앙은 사춘기라는 배경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정서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불분명한 시절의 약하고 어린 나를 찾아 오셨습니다. 사춘기는 고독한 계절입니다. 나도 나를 모르겠고, 엄마도 나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은 너무 무서운데, 내 머리 속의 세상은 만만해 보였습니다. 왜 저러지? 왜 안되지? 나도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나를 애로 취급하는 세상이 답답했지만, 세상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나 자신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에 나가기 한 두해 전에 꿈에서 예수님을 만났는데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걷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해 너무 이상하고 속상했습니다. 아무 말 없던 예수님은 또 어느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할 수 없는 이 꿈은 내게 큰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꿈을 꾸면서 느꼈던 감정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은 자랐습니다. 교회에서 듣고 배우는 것이 신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남들이 얘기하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님 꿈을 꾸면서 느낀 것과 반대인 셈입니다. 꿈에선 나의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이 못 봤는데 현실에서 내가 아는 예수님은 남들이 말하는 예수님 뿐이었으니까요. 스무살 중반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슬픔과 아픔에 놓여 있을 때,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혼자 있을 때, 예수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이번엔 말씀을 하셨습니다. 혼자가 아니라는걸 알게 하셨습니다. 후회, 절망, 약함, 수치…주께서 다 아셨습니다. 그 날 예수님은 나의 변호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친구였습니다. 두 단어가 또렷하게 마음에 남았습니다. 사춘기 때 필요했던 보호자와 변호자, 그리고 친구이신 하나님이 이제 어린 성인으로, 그리고 고아로 사회에 나가야 하는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나의 주님을 배우고 사랑하고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교회에 묶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넓게 이해하고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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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4017 골로새서 2:16-19

    “그는 머리에 붙어 있지 않습니다.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각 마디와 힘줄을 통하여 영양을 공급받고, 서로 연결되어서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대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골2:19)

    한 생명이 씨앗처럼 태에서 자라 10달을 지내고, 태어나 성장할 때 그 시기에 맞는 발달이 나타난다. 혹, 너무 빨리 태어나게 되면 위험한 상황에 이를 수 있고, 기어야 하는 시기에 기고, 걸어야 하는 시기에 걷고, 말 해야 하는 시간에 말을 하지 못한다면 발달에 문제가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렇듯 인간은 저마다 다른 객체이지만, 그 시기에 맞는 발달과 성장에 따라 살아간다.
    그리고 가정 안에서 부모로 부터 보호받고 자란 아이는 때론 어그러진 모습을 보여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본다. 안타깝게도 가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어릴적 상처나 트라우마, 또는 결핍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가정이라는 형식적인 울타리안에 있어도 부모가 아이를 온전히 양육하지 않고, 방치와 폭력을 사용한다면 아이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평생 가슴에 담고 살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안전한 가정, 부모님, 시기에 맞는 발달이 잘 이루어져야 한 아이가 온전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오늘 골로새서 묵상 말씀에서는 유대인들이 먹고 마시는 문제나 명절, 안식일, 초승달 축제들을 골로새 교인들에게 문제 삼을 수 있다고 언급한다. 또 그들은 교만을 부리며, 비방할 목적으로 그들을 심판하려고 할 것이라 말한다. 사도바울은 이들의 특징을 “그는 머리에 붙어 있지 않습니다.”라고 꼬집었다.

    그러면 그리스도이신 머리에 붙어있는 공동체의 특징은 무엇인가?

    1. 각 마디와 힘줄을 통하여 영양을 공급받는다.
    한 아이가 태에서 조성되어 시기에 맞게 발달하기 위해서는 온전한 가정 안에 붙어있어야 한다. 그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옆에서 돌봐주고 먹여주고,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 치료받게 해야 한다. 가정안에 연결되어 있는 아이가 온전하게 성장할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도 그리스도 안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나님으로 부터 공급받고 성장할 수 있다. 반대로 유대인들 처럼 머리이신 예수님께 붙어있지 않으면 결국 온전한 성장을 이룰 수 없다.

    “나는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살고 내가 그 사람 안에 살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15:5)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를 포도나무로, 우리를 가지로 비유하셨다.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나오면 그저 뗄감이 될 뿐이지만, 나무에 붙어 있으면 때에 따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된다. 오직 나무에 붙어있을 때 가지의 생명의 유지되는 것이다. 가지가 제 잘난 줄 알고, 떨어져 나간다면 그 즉시 그는 생명이 없게 된다.

    내가 생명이 있는가?
    이 공동체(교회)가 생명이 있는가?는 나무되신 예수님께 붙어있는가를 점검해보면 알 수 있다.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에 열매가 맺히듯 그리스도께 연결 될 때, 나는 열매 맺을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연결된 공동체가 생명이 있는 공동체이다.

    2.서로 연결되어서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대로 자라난다.
    포도나무는 자신이 사과를 열매로 맺고 싶다고 해서 사과 열매를 맺을 수 없다. 포도나무의 정체성은 포도나무다. 내가 건강하게 자라는 나무라고 해서 스스로 열매의 종류를 결정할 수는 없다. 원래부터 만들어진 성질대로 포도나무는 포도열매를 맺는게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도 이와 같다. 그 공동체가 어떤 열매를 어떻게 맺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권한이 아니다. 그저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께 깊게 뿌리를 내리고, 연결되어 있기만 하면 된다.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고전3:6-7)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한번 “나는 머리되신 예수님께 붙어있는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머리가 생각한대로, 하기로 마음 먹은대로 몸이 움직이는 것처럼 건강한 기독교인은 머리되신 예수님이 움직이고, 이끄시고, 자라나게 하시는대로 따라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속한 교회공동체, 가정도 머리되신 예수님께 붙어있는 공동체인가 질문해본다. 이 물음 앞에서 우리 공동체가 더욱 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오직 머리이신 예수님을 따라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연합하는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그렇게 머리되신 예수님께 연결될 때, 비로소 내가…우리 공동체가 생명력 넘치는 곳이 될 것임을 오늘 주님이 약속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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