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장 17절-4장 1절: 십자가의 친구

해설:

사도는 앞에서 신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모델로 제시한 다음(2:6-8),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고 있음을 본보기로 제시했다(2:19-30). 이어서 사도는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따라 살아 왔는지를 서술했다(3:4-16). 이어서 사도는 신도들에게, 다 함께 자신을 본 받으라고, 또한 자신을 본 받아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라”고 청한다(17절).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18절)로 살 위험에 빠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는 적극적으로 복음을 거부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다. 이 글을 쓸 때 사도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다”고 했다. 그들의 현재 삶과 미래의 운명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에 눈물을 참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의 마지막은 “멸망”(19절)이다. 여기서의 “멸망”은 영원한 죽음을 의미한다.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는다”는 말은 육신적인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살아가는 태도 즉 유물론적이고 물질주의적인 태도를 가리킨다.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는다”는 말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랑한다는 뜻이다. “땅의 것만 생각한다”는 말은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산다는 뜻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척하고 박해하게 되어 있다.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유물론적이고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그대로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 살 수가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들여 자신이 누리는 것을 더욱 키우고 더욱 높아지고 더욱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사도는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이들과 “우리” 즉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십자가의 친구”가 되어 사는 사람들을 대조시킨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20절)라는 말로써 사도는 믿는 이들의 궁극적인 소유권과 소속감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하늘”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가리키는 비유 언어다. 로마 제국 내에서 로마의 시민권은 막강한 특권을 의미했다. 빌립보 교회의 신도들 중 다수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라는 말이 강한 울림을 주었을 것이다. 

우리가 하늘의 시민이라면 우리의 통치자는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앞(2:9-11)에서 사도는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존재의 주님(‘퀴리오스’)으로 높여지셨다고 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되면 다시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다. 그래서 사도는 그분을 ‘소테르’ 즉 “구주” 혹은 “구원자”라고 부른다. 그분이 오시면 믿는 이들이 모두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여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21절)이다. 그것은 그분에게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 즉 무엇이든 당신의 뜻대로 하실 수 있는 전능의 힘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의 운명과 “십자가의 친구”로 사는 사람의 운명을 극적으로 대조시켜 보여 준 다음, 사도는 앞에서부터 거듭 강조했던 권면을 다시 쓴다.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4:1). “굳건히 서다”로 번역된 헬라어 ‘스테코’는 군사 용어로서 진지를 사수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렇게 권면하면서 사도는 여러가지 말(“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 “사랑하는 여러분”)로써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다.   

묵상:

바울 사도를 따라 다니며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방해하고 박해했던 사람들은 명시적인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십자가가 그들을 원수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십자가를 원수로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원수 되었다”고 말할 때도 “하나님이 우리를 원수로 여기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원수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원수”가 되었다는 말은 십자가를 부정하고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제대로 대면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고발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십자가를 거부하고 부정합니다. 그 거부와 부정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거부와 부정이 되고, 그 거부와 부정의 끝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여기까지 읽고 ‘나는 십자가를 믿으니 다행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잠시 멈추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께서 당하신 그 희생이 자신의 대속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구원은 시작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회복시켜 주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시어 거듭나게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새로 지어진 사람은 십자가 형의 삶으로 초청 받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누리고 즐기기를 사양하고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이 바울의 삶이었고,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의 삶이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친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육신적인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땅의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 우리도 때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명시적인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것만큼이나 감추어진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것도 불행합니다. 

십자가로 구원 받았으니, 우리도 십자가 형틀의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하며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든든히 서 있을 때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습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빌립보서 3장 17절-4장 1절: 십자가의 친구”

  1. 십자가 사랑과 은혜에 감사와 명예를 드립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아버지의 품으로 향하는 길인것을 고백합니다, 마땅히 죽어야할 인생을 살리신 놀라운 은혜를 보답해야하는데 모르는사이에 자주 딴길을 걷고있는 처량한 신세입니다. 앞으로는 오직 십자가의 길만 걷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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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육신적인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을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땅의 것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비천한 인간입니다.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자를 십자가의 값으로 선불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닮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친한 친구로 붙잡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도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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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나는 신자인가?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는가? 십자가의 친구로 사는지, 아니면 십자가를 부끄러워 하거나 부담스러워 하는지 돌아봅니다. 이번 주로 가게를 한 지 11년이 되었습니다. 가게를 새로 차리고 한 3년 장사하던 사람에게 권리금이 포함된 매매가를 주고 가게를 샀습니다. 종업원들도 그대로 인수를 했습니다. 장사를 파악하고 익숙해 질 때까지는 변화를 일으키지 않기로 했습니다. 종업원들에게 잘 해 주는 좋은 주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굳이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원칙처럼 생각했던 것 하나는, 크리스찬이라는 걸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인 크리스찬 보스가 최고 보스라는 소리까지는 못 들어도 피해야 할 보스라는 소리는 듣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해외에 선교를 갔다가 돌아온 친구가 들고온 선물을 종업원들과 나누기도 하고, 교회 일로 외출할 때는 교회에 간다는 말을 하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주인이 다 말을 할 필요는 없지만 될 수 있는 한 오픈된 관계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처음에 인수한 종업원들은 10개월 쯤 지나자 모두 교체 되었습니다. 전 주인이 말한대로 6개월쯤 지나면 대개들 다른 데로 옮겨 갔습니다. 문화적인 것보다 세대의 특징이다 싶습니다. 자기들 원하는 시간대에, 원하는 시간만큼 일하기를 원합니다. 대부분이 대학생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11년 동안 오고 간 종업원들이 하도 많아서 얼굴과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친구가 반 이상일겁니다. 그들은 우리를 어떤 주인으로 기억하는지, 모르고 그들 마음을 안 좋게 한 일은 없는지 남편과 가끔 이야기를 합니다. 십자가가 우리 삶의 표시라는 것은 분명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믿는다는 사람이 왜 저래?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참아야 할 것, 절제해야 할 것 정말 많습니다. 그런 소리를 듣고 안 듣고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떳떳한지 아닌지 입니다. 하루에도 여러번 ‘조용한 분노’ 가 일어납니다. 개인적인 관계로 인해 화가 나는 것 말고, 세상의 부조리와 불의 때문에 화가 납니다. 한숨 같이 짧은 기도가 나옵니다. 세상은 바꾸지 못해도 자기 자신은 바꾸자는 결심을 합니다. 균형을 갖추고, 이리저리 살펴 보고, 잘 들여다 보자고 결심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자기부정, 자기부인의 길입니다. 욕망의 부정과 부인입니다. 믿음을 달리기에 비유하며 바울의 서신을 읽었습니다. 목표를 향해 달리는 달리기이기도 하고, 욕망으로부터 도망치는 달리기이기도 합니다. 자기완성의 마라톤이자 자기지우기의 마라톤이기도 합니다. 달리고 또 달립니다. 임마누엘의 주님을 구하며 달립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나는 신자입니다. 나는 믿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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