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장 12-16절: 성숙한 믿음

해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전격적인 변화를 설명한 후에 사도는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12절)라고 말한다. 여기서 “이것”은 1) 11절에서 언급한 “부활”을 의미할 수도 있고 2) “내가 바라는 것”(10절) 즉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달아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 받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당시에도 “구원파적 신앙”(구원은 이미 완성되었다고 믿는 신앙)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혹은 빌립보 교인들이 사도를 완전한 신앙인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사도는 자신이 완성점을 향해 “좇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헬라어 ‘디오코’의 번역인데, “박해하다”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전력을 다해 추적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도는,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기 때문”(12절)이라고 밝힌다. 그분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에 더욱 온전히 사로잡히기 위해 전심전력 하고 있다는 뜻이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 쪽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추적 당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잡히는 것이다. 사로잡힌 자로서 더욱 사로잡히기 위해 힘쓰는 것이 우리의 영적 생활이다. 

바울은 자신의 구원이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달리기 경주자처럼 “뒤에 있는 것”(13절, 즉 과거의 일들)을 잊고 “앞에 있는 것”(즉 완전한 구원)을 향하여 전심으로 달리고 있다고 밝힌다. 그가 지향하는 “목표점”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14절)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숙한 사람은 이와 같이 생각하십시오”(15절)라는 말은 “이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라고 의역할 수 있다. “여러분 중에 완전한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생각을 고치십시오”라는 의미로도 풀 수 있다. 사도는, 만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드러내실 것이라고 덧붙인다. 

“어쨋든, 우리가 어느 단계에 도달했든지 그 단계에 맞추어서 행합시다”(16절)는 “우리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든지, 그것을 출발점으로 여기고 계속 나아갑시다”라는 의미로 풀 수도 있고, “우리 각자의 성숙도에 맞게 행동합시다”라고 풀 수도 있다. 

묵상:

구원파적 신앙은 바울 시대부터 오늘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면서 믿는 이들을 흔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이 완성되었다고 믿는 것이 구원파적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그렇게 믿을 근거가 있습니다. 그분 안에 거하는 사람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요 5:24)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들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거듭남을 통해 “이미” 부활을 경험했고, “이미” 영생을 얻었고, “이미” 영원한 유업을 상속 받았습니다. 따라서 구원파적 신앙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믿는 이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야 하고, 거듭난 사람으로서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며 살아야 하며,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며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으로 받은 모든 구원의 현실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때 완전 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이미” 얻었지만, “아직” 하나님의 자녀로서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이미” 거듭났지만, “아직” 완전한 거룩성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유업을 “이미” 약속 받았지만, “아직”그것을 누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구원파적 신앙은 “이미” 이루어진 일에만 초점을 두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외면합니다. 그들은 자주 “나는 다 얻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나는 목표점에 이르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미 얻은 구원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손상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로 인해 죄악을 범하는 것에 대해 거리낌이 없습니다. 육체적인 행위는 이미 얻은 영적 구원을 손상시킬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를 쓸 때 바울 사도는 매우 높은 영적 경지에 이르러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출발선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얻어 누리고 있는 구원의 은혜로 인해 그는 “아직” 남아 있는 목표점을 향해 전력질주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성숙한 믿음이고, 그것이 온전한 생각입니다.   


Comments

4 responses to “빌립보서 3장 12-16절: 성숙한 믿음”

  1.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바울 서신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구절입니다. ‘나는 아직 목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격려와 도전의 말씀입니다. 대강 살지 말자는 권면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며 열심히 달려가자는 격려입니다. 설령 틀리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부분을 분명하게 가르쳐주실 것 (15절)’이라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확신을 갖고 말하지만 서로 생각이 달라 더이상 함께 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교회 안에서 늘 있는 일입니다. 바울의 말씀처럼 시간이 지난 뒤에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하나님 앞에 가서야 알 것 같이 잘 모르겠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묵상하며 최선을 다해 살겠다는 결단 만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을 매일 정직하게, 겸손하게 살필 뿐입니다. 나의 최선이 유일한 최선인양 착각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나처럼 달리는 것이 달리기의 정석인양 여기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사귐의 소리’ 묵상을 하면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습니다. 어제 백내장 수술 소식을 읽고 격려하는 메시지를 남기신 분이 계셨습니다. 한국에서 한 달 전쯤에 함께 묵상하는 기쁨을 알려오신 분도 있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신기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편물 중에 제게 온 카드가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미국 여선교회에서 같이 일하다 임기를 마쳤는데 교단 분리가 결정되기 전에 감리교회를 떠났습니다. 임원회에서 오랫동안 여러 직책을 두루두루 맡아 봉사했던 사람이라 같이 일할 때 의논도 자주 하고, 그의 경험과 지식이 큰 도움이 되었더랬습니다. 정치적으로 백퍼센트 공화당 성향이라 그 앞에서 ‘다른’ 견해를 말할 때는 조심하라고 내게 주의를 준 친구도 있을 정도입니다. 습니다. 여선교회 총회의 연설자로 힐러리 클린튼을 초대했을 때는 그의 연설이 듣기 싫다고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그와 함께 일하면서 정말 많이 웃었습니다. 그의 좋은 아이디어와 깔끔한 일처리에 존경심을 가졌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 그에게서 ‘요즘 부쩍 너 생각이 많이 난다, 잘 있는거지?’라는 카드를 받았습니다 어제 수술 마치고…얼마나 감사하던지요. 봄부터 걱정거리가 마음 속에 한가득 들어찬 걸 어찌 알았을까, 오늘 수술하는걸 어찌 알았을까…정신 차리고 답장 카드를 써야겠습니다. 의견이 다르지만, 교회에 대한 기대가 다르고 미래에 대한 바램도 다르지만 주님의 은혜 속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공통점이 그와 나를 친구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우리는 다 달리는 사람들입니다. 달리는 목표점이 같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같다고 생각해서 쉽게 말하고 대하던 태도를 바꾸기를 원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달리기를 원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매일 매일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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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 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빌3:13-14)

     사도 바울이 위로부터 받은 부르심의 상을 받기 위해 달려나가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에게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존귀하게 여기고, 그리스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그래서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은 해로 여길만큼 그의 모든 삶을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해져 있었다.

     이미 얻은 구원이지만, 구원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십자가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댓가를 지불하시고 날 구원하신 그 사랑이 숨쉴 수 없을 만큼 나를 압도하는 것을 마주한다. 그리하여 뒤의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나갈 수 있는 사도바울의 부르심은 억지로 된 것이 아니였다. 그냥 되어지는 것. 그리스도와 함께 삶이 그리스도로 합하여 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일생은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수치와 모욕과 멸시로 얼룩진 십자가가 예수님의 끝이라고 여겼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신다. 인간의 관점에서 끝인 그 지점이 예수님에게는 새로운 시작이셨다. 

     구원은 시작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받은 구원은 여기서 그 역할을 다 한 것이 아니다.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를 삶으로 살아내는 것. 바울처럼 부르심의 상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이 부활신앙이며, 부르심인 것이다.

     내가 지나고 있는 이 물질의 세계. 이 현상이 끝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나의 모든 것을 걸게 된다. 이 보이는 현상들로 인해 나의 마음이 좌지우지 되고, 나의 삶에 희노애락이 결정이 된다. 

     나는 뒤에 것에 머물러 안주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왕이 되신 예수님을 따라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완성해나가는 사람인가?

    우리 가정이 이 땅에 온 것은 하나님이 달려갈 부르심의 여정에 우리를 초청해주신 것임을 기억하자. 완성이 아닌 과정. 과정이 모여 상급이 된다. 

     여전히 아이들은 학교 적응하는 것애 어려워하고, 나도 아직은 무언가 역동적인 것을 하지는 않는 정적인 상태이지만…이 시간이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해 달려가는 한 지점임을 기억하자.

    그리하여 나의 현재의 삶에서 더욱더 주님을 찾고 찾자. 더욱더 주님을 가까이 하자. 하나님이 나를 온전히 사로잡아 주시도록, 하나님께 사로잡힌바되어 오직 예수로 인해 생각하고 살아가도록…그렇게 달려가기를 멈추지 말자.

    *하나님!

    아이들은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고, 막내는 오늘도 울며 겨우겨우 등교를 했습니다. 피곤과 많은 일들로 힘들어하는 남편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때론 저도 위축이 됩니다. 그러나 제가 바로 이 지점에서 주님께 달려갑니다. 

     보이는 현상은 잊어버리고, 앞에 계신 주님을 향해 달려나갑니다. 부르심의 현장에서 나를 부르신 분. 하나님께 나의 시선을 고정합니다. 그럴 때에 십자가에서 사랑으로 구원을 완성하신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가 저를 덮고 있음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그 사랑으로 달려갈 힘을 얻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새롭고 산 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모든 것이 되시고, 나의 상급이시며, 나의 생명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 사랑으로 나와 가정, 교회, 이 지역, 이 나라, 온 세계와 열방을 덮어주시고, 새롭게 하여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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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주시고 영생의 은총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이해 할 수 없는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옛것을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길을 다하여 주님의 부르심의 상을 받기위해 살기를 원하오니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인도하옵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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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너무나도 더럽고 냄새나고 부꾸러운것은 지났고 이제는 새것으로 인정하시는 그토록 놀라운 은혜에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지금부터라도 주님께 더 가까이 닥아가고 깊고 귀하고 긴밀한 사귐을 갖으며 말씀 순종하고 주님 닮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도오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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