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장 1-3절: 항상 기뻐하는 비밀

해설:

“끝으로”(1절)라는 접속사로써 사도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다른 주제로 전환한다. 사도는 “주 안에서 기뻐하십시오”라고 권면한다. 그는 앞에서 기뻐하라고 권한 바 있다(2:18). 그래서 사도는 “내가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쓰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말을 반복하는 것이 그들에게 “안전”하기 때문에 자신은 그것을 번거롭게 여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뒤이어 나오는 말을 고려하면, 바울이 말하는 “안전”은 거짓 교사들에게 속아넘어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서 그는 “개들을 조심하십시오”(2절)라고 경고한다. 신도들을 찾아 다니면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던 “유대주의자들”을 생각하고 한 말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에 비유했다. 회당에서 예배 드릴 때 사용했던 공동 기도문에 “우리를 개같은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포함되어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사도가 유대주의자들을 “개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 된다.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는 행위에 대해 사도가 얼마나 혐오하고 있었는지를 느낄 수 있는 표현이다. 

그래서 사도는 “악한 일꾼”이라는 표현을 더한다.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요구하는 행위는 악한 것이라는 뜻이다. “살을 잘라내는 할례”는 ‘카타토메’를 의역한 것인데, 직역하면 “자해”가 된다. 사도는 유대주의자들이 요구하는 할례가 이방인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자해 행위라고 평가 절하한다.      

2절에서 사도는 “조심하십시오”라는 명령을 세번이나 반복한다. 말하는 사람으로서는 번거로운 일이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유대주의자들에게 넘어가는 것이 그토록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사도는 진정한 할례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3절)하는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성령이 내주하신다. 따라서 믿는 이들의 예배는 성령 안에서, 성령과 함께 드려지는 것이다. 둘째,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는 것이다. “자랑하다”로 번역된 ‘카우카오마이’는 “기뻐하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를 자랑하고 율법을 자랑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고 자랑한다. 그분을 통해 거듭남을 얻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다. 셋째,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의 “육신”은 육체적인 행동 혹은 인간적은 성취를 의미한다. 

묵상:

사도는 빌립보서 전체 안에서 “기쁨”이라는 단어를 열 다섯 번 사용합니다. 투옥되어 있는 상황에서 쓴 편지임을 고려할 때 이것은 아주 특별한 현상입니다. 상황적으로 볼 때 기뻐할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사도는 자신이 기뻐하고 있으니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기뻐하라고 요청합니다.

“기뻐하라”는 말은 명령이 될 수 없습니다.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뻐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감정을 속이라는 뜻입니다. 감정을 속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이 아닙니다. 시편에 수록된 수 많은 기도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감정에 정직하라는 깨우침을 줍니다. 주어지는 상황 속에서 느껴지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적절하게 표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이라고 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감추고 착한 아이가 되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주 안에서 기뻐하십시오”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기뻐할 이유를 환경적인 조건에서 찾는다면 우리는 기뻐할 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기뻐할 일이 생긴다 해도 그 기쁨은 곧 그칠 것입니다. 하지만 기뻐할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는다면 그분 안에 머물러 있는 한 기쁨의 이유는 고갈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 안에 머물러 사는 한 환경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든 우리는 든든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물러 살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기뻐하며), 육신(환경적인 조건)을 의지하지 않는”(3절)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빌립보서 3장 1-3절: 항상 기뻐하는 비밀”

  1. 세상에서 하나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격하여 무너트리려고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토착 미신을 믿고 사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과 동행하여 그분의 도움없이는 행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 척박하고 광활한 곳에서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선교사들에게 임하여주시셔 힘주시고 능력을 주시므로 영과 육이 강성하여 주신 사명 감당하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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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항상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감사하며 살기를 원합니다만 대부분의 시간에 우울하고 불평하며 사는 형편입니다,항상 주님의 십자가 은혜와 부활과 승천과 새하늘과 새땅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주님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삶을 살아내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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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초대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대에 이방인 신자였다고 가정하고 편지를 읽습니다. 할례에 관한 찬반 토론이 끊이지 않습니다. 사도들의 결정을 최종 권위 (하나님을 대신하는)로 여기지만 사도들끼리도 통일된 입장을 내놓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8일에 할례를 하지만 이방인에게는 그런 의무가 없습니다. 할례의 결정은 부모의 몫인데 결국 공동체가 하는대로 따르는 것이 무난(?)할 것 같아 보입니다. 물론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말들이 많습니다. 이 일로 공동체를 떠난 이들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바울이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것처럼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 의견이 달라 갈등하는 일이 많습니다. 사안만 다를 뿐 논쟁과 갈등은 늘상 있는 일입니다. 현재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알 수 없는 일’을 놓고 논쟁하는 것, 뚜렷하게 선을 그을 수 없는 일을 놓고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요. 후회 없는 결정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당시에는 최선인 것 같고, 그게 맞는 것 같았지만 살면서 다르게 생각되는 일, 아니었구나 싶은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나를 기준으로 삼으면 안된다고 배웠습니다. 나의 이해나 의지는 바람에 날리는 깃털처럼 가볍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명령을 기준으로 삼을 때 바른 결정을 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고,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데 여기서도 또 막힙니다. 사도들 -베드로와 바울-의 중심이 예수님이 아니거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시해서 서로 맞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결정을 할 때 나를 기준으로 삼지 않으면 결정이란걸 할 수 없어집니다. 신자에겐 결정이 곧 결단과도 같습니다. 모든 선택과 결정이 신앙적으로 대단한 선택과 결정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나의 신앙적인 결단이 됩니다.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뜻이 주일의 예배를 포함해 삶 전체, 일상의 시간 속에서 드리는 응답, 살아가는 내 모습과 태도를 뜻한다면 할례와 무할례의 경계는 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결정을 축복하신다’는 가히 혁명적인 문장이 쓰여질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모든 결정’을 하기까지 주님의 사랑과 정의를 붙잡고 애썼는지 아닌지는 결정의 열매를 보고 알게 되겠지요. 감사합니다 주님.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늘 돌아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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