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장 1-8절: 그리스도의 애끓는 사랑으로

해설:

사도는 그리스-로마식 편지 형식에 따라 발신자를 밝힌다. 다른 편지에서는 자신을 “사도”로 소개하는데 여기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1절)이라고 소개한다.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사도적 권위를 주장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호칭은 이 편지의 주제 중 하나를 암시한다.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종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스스로를 낮추어 종이 되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바울은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디모데와 다른 동역자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수신자에 대해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살고 있는 모든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이라고 쓴다. “감독”은 믿음의 공동체를 지도하는 영적 지도자를 가리키고, “집사”는 교인들의 필요를 섬기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복수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빌립보 안에는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가 여럿 있었을 것이다. “성도”라는 말은 사도가 믿는 이들을 부를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다. ‘호이 하기오이’는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그들의 윤리적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은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들의 물리적 주소는 빌립보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주소는 “그리스도 예수 안”이다. 

사도는 다른 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그는 그리스-로마인들의 인사법(은혜)과 유대인들의 인사법(평화)을 묶어서 보편적 인사법으로 만들고, 거기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2절)이라는 말을 붙여서 신앙적인 인사법을 만들었다.

바울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수신자들을 생각하며 감사의 말과 기도문을 적곤 하는데, 빌립보서에서도 그렇다. 먼저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현한다.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가 터져 나오고(3절),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기쁨이 샘솟는다는 것이다(4절). 빌립보 교인들이 사도의 복음 사역에 동참해 오고 있기 떄문이다(5절). “첫날부터 지금까지”라는 말로써 사도는 그들의 한결같은 헌신을 강조한다. “동참”은 ‘코이노니아’의 번역인데, 시간과 물질을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선한 일”(6절)로서, 시작하신 그분이 완성하실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도가 빌립보 교인들을 편애하고 있다고 오해할 수 있다. 사도는, 편애라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은 빌립보 교인들에 대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인다(7절). 그들은 사도가 어떤 상황에 있든 변함 없이 그를 도왔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그들은 큰 희생을 감당해야 했으나, 사도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누리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빌립보 교인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으로”(8절) 그리워 하고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시는 일이라고 확증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으로”는 “그리스도 예수가 보여 주셨던 그 애끓는 사랑으로”라는 뜻이다. 

묵상:

바울 사도와 빌립보 교인들의 관계는 모든 교회가 귀감으로 삼아야 할 대상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가 솟구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기쁨이 넘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적 감정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일을 위해 그들이 바울의 희생과 헌신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복음이 전해지는 일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았습니다. 그토록 소중히 여겼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일을 빌립보 교인들도 소중히 여기고 기꺼이, 아낌없이 헌신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니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기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빌립보 교인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으로” 생각하고 그리워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스프랑크논’은 애간장이 끊어질 정도로 강력한 감정을 가리킵니다. 

기도해 본 사람들은 압니다.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에는 탄식과 한숨이 나오고,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에는 감사와 기쁨이 솟아 나옵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 혹은 나태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면 가슴이 답답하고 한숨이 나옵니다. 그런 기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찢는 것은 하나님 앞에 귀한 일입니다. 반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생각하면 감사와 찬송을 올리게 됩니다. 그 사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빌립보서 1장 1-8절: 그리스도의 애끓는 사랑으로”

  1.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섬김과 기도가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수고가 없었습니다, 소망이 있다고 하면서도 너무나 조급했습니다. 영혼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주님의 종이되기를 원합니다. 언젠가 주님앞에 섰을때 착하고 부지런한 종이라고 칭찬받고 천국잔치에 초대받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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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chi049 Avatar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감옥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동역한 성도들을 사랑하고 애타게 그리워하는 모습을 생각하니 나 자신이 그러한 상태에 있다면 어찌 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척박하고 광야 같은 아리조나 호피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 부부를 생각하게 됩니다. 부족하고 연약하여 선교사 부부를 위해 사귐의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 할 뿐입니다. 주님! 호흡이 멈추지 않는 한 조국의 통일과 발을 딛고 서있는 미국, 선교사들, 가족 복음화를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여 주시고 인도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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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빌립보서는 시작부터 느낌이 다릅니다. 따뜻한 봄날에 꽃들이 핀 거리를 걷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옥중에서 쓴 편지 같지 않습니다. 빌립보의 신자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바울처럼 내게도 그립고 사랑스러운 교회의 벗들이 있습니다. 더 친하고, 더 잘 통하는 감정의 유희라는게 있어서 그렇겠지만, 사귐과 교제에도 연륜의 프리미엄이 있는 건 분명합니다. 처음 교회에 나가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뒤에 20대 끝 무렵에 어느 친구의 소개로 교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성경 공부를 하러 간 교회였는데 아주 작은 교회였습니다. 청년들 반, 부모 세대 반 쯤이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시간도 즐거웠고, 끝난 뒤에 계속된 코이노니아 (그 당시에 이런 말을 흔하게 쓰는 교회가 많지 않았습니다)도 참 재미있고 좋았습니다. 그 교회를 다니면서 채용 시험에 붙어 직장에 들어갔고, 직장에서 남편도 만났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던 남편이 이 교회에서 성경 공부를 시작해 믿음의 길을 같이 걷게 되었고, 시어머니도 교회에 같이 나오셨습니다. 어떤 교회도 멀리서 보면 그저 좋게만 보이지만 깊이 들어가면 여러 가지 문제가 보입니다. ‘문제’가 없는 교회는 없다고 봐야 할 겁니다. 문제가 걸림돌이 되어 교회를 떠나는 교인들이 이 교회라고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같이 성경 공부하고 교제를 나눈 끈끈한 정이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그 이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빌립보의 신자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를 드린다는 바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게 만듭니다. 그 교회의 목사님은 예기치 않은 병으로 돌아가셨지만 풋풋했던 시절의 동생 교인들, 같이 애들 키우면서 신앙과 삶의 괴리를 놓고 고민하던 친구들과는 지금도 가끔 연락합니다. 나도 그들도 그 때는 더 모자라고 더 어리석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가 아니라 지금 만났더라도 친구가 되었을까 싶은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어릴 때는 친구였지만 크면서 멀어지는 친구도 있지만 오래된 관계는 세월이 주는 프리미엄 같은 게 있어서 부족한대로, 아쉬운대로 접어주게 됩니다. 나도 또 그렇게 이해 받으며 삽니다. 바울이 빌립보의 신자들을 더욱 특별하게 생각했다면 그것대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연’에는 때와 시간이 따로 있어서, 같은 사람일지라도 언제 만났느냐에 따라 관계의 방향과 깊이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만남과 추억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오늘 여기 있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이어지기를 원합니다.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볼 수 있게 하소서. 삶의 불연속성, 살아 있음의 일회성을 잘 받아 들이며 살 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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