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6장 5-9절: 무력화 되는 노예제도

해설:

당시 가정을 구성하고 있던 세번째 축은 주인과 노예 관계였다. 이 편지의 수신자들 중에는 노예들도 있었을 것이고 노예를 둔 주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 사도가 가부장적 문화를 그대로 둔 채 속으로부터 변화시키려 했던 것처럼, 노예 제도에 대해서도 체제를 그대로 인정한 상태에서 내용을 변화시키려 한다.

이 경우에도 사도는 약자인 종에게 먼저 권면을 한다(5-8절). 권면의 초점은 “그리스도께 하듯”(5절) 혹은 “주님께 하듯”(7절) 주인을 섬기라는 것이다. 21절에서 천명한 기본 원리(“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를 주인과의 관계에 적용한 것이다. 노예 제도가 실행되고 있던 시대에 주인에 대한 복종의 의무는 당연한 것이었다. 아내와 자녀에게 그랬듯이, 사도는 당시 사회적으로 당연히 기대되었던 복종의 의무에 변화를 가한다. 믿는 이들은 사회적 신분에 상관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되었으므로 복종의 의무에서 해방되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에겐가 복종한다면 자원하여, 기쁨으로 복종한다. 

사도는 이 권면에 여러가지 말을 덧붙인다. “두려움과 떨림과 성실한 마음으로”(5절),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답게 진심으로”(6절), 그리고 “사람에게가 아니라 주님께 하듯이, 기쁜 마음으로”(7절) 섬기라고 권한다. 사도는 또한 노예라 해도 선한 일에 대한 보응을 받는 점에 있어서는 주인과 다름이 없다고 강조한다(8절).

사도는 “종들에게 이와 같이 대하고”(9절)라는 말로써 종들에게 준 권면들이 주인들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앞에서 종들에게 여러가지 말로 권면한 것은 바울의 수사적 전략이었을 것이다. 사도는 아내보다는 남편에게, 자녀보다는 부모에게, 종보다는 주인에게 더 큰 관심이 있다. 강자인 그들이 먼저 변해야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편지를 처음 들었을 때, 노예를 소유한 주인들은 5절부터 8절까지의 내용을 듣고 기분이 좋아져서 ‘그럼 그렇지. 그래야지!’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9절에서 “주인 된 이 여러분, 종들에게 이와 같이 대하고”라는 말을 듣고는 마음에 큰 찔림을 받았을 것이다.  

“위협을 그만 두십시오”라는 말은 언어적 폭력과 신체적 폭력을 내려 놓으라는 뜻이다.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노예는 주인에게 가축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주인이 노예에게 가하는 모든 종류의 폭력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사도는 그리스도인에게 그런 언행이 옳지 않다고 믿는다. 주인들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수하에 있는 노예들에게도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신분 제도는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신다. 그러므로 주인들은 노예들을 믿음의 형제 자매로 존중해야 한다. 신분도 다르고 역할도 다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절대적 가치는 동등하기 때문이다.

묵상:

바울 사도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여러가지로 부당한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로마서 13장 1-7절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사도는 불의한 권력자와 정부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라고 요구한 사람으로 비난 받아 왔습니다. 여성과 남성에 대해 쓴 몇몇 본문 때문에 사도는 남성우월적이고 가부장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으로 비판 되어 왔습니다. 노예와 주인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이유로 하여 바울이 사회 정의에 대해 아무런 의식이 없던 사람인 것처럼 매도 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편지에 대한 오독에 근거한 잘못된 비판입니다. 바울이 활동할 당시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종파로서 발아하던 시기입니다. 불의한 정권이나 사회적 불의에 대해 세를 규합하여 소리를 내고 대항하여 싸울만한 형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의한 사회 구조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불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우선적인 관심을 두었습니다. 국가와 사회의 부정과 불의의 문제도 결국 각 개인의 죄의 문제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각 개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회심에 이르게 하고, 그들을 믿음의 공동체로 세우는 일에 전심했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과 믿음의 공동체가 불어나면 그들로 인해 세상이 변화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은 누구를 만나든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21절) 서로를 섬기는 것을 원리로 삼습니다.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그렇게 행동할 때 남성우위의 가부장적 문화는 자연히 해체될 것입니다. 노예와 주인이 이와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대할 때, 노예 제도는 유명무실해질 것입니다. 빌레몬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들 사이에서 노예 제도가 어떻게 무력화 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권력이 주어진다면, 그 권력으로 국민을 섬기는 데 마음을 쓸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들 사이에서 권력의 서열은 해체됩니다.

복음은 이렇게 속에서부터 희망을 일구어 갑니다. 그것은 비록 느리지만 확실합니다. 우리의 내면에서부터 시작된 그 변화는 다시 오실 주님께서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계 21:5)고 하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내면으로부터의 변화를 추구하며, 불완전한 평화와 정의를 견디며, “그 날”이 오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에베소서 6장 5-9절: 무력화 되는 노예제도”

  1. 얼마전에 ”갑질“이라는 단어가 화두가 되였었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군림하는 태도와 행동입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기득권을 마구부리는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성도들 모두가 주님과 항상 동행하며 주님께서기뻐하시는 삶으로 서로 섬기는 삶을 살아내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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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바울도 고민이 있었을겁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모르지 않았을겁니다. 예수님을 만나 전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난 그는 전보다 더 잘 보았을겁니다. 모든 것이 핑크빛이요, 모든 사람의 좋은 점만 보이는게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왜곡되거나 훼손되게 만드는 바르지 못한 상황들이 더욱 잘 보였을겁니다. 고민을 했겠지요. 예수님은 체제전복을 꾀하는 정치적인 혁명가의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사랑과 희생의 제물이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환난이나 재앙으로 사람이 바뀌는 방법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 열리고 내적인 질서를 새로 잡는 방법으로 개인과 세상이 변화될 것을 원했습니다. 바울도 예수님처럼 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노예를 부리는 주인들에게 노예를 다 풀어주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잘해주라고, 주님은 차별 없이 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권면이 너무 이상적이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하나님의 뜻을 행하듯 주인을 위해 일하라는 말이 실제로 가능할까 싶습니다. 바울의 스타일입니다. ‘참마음으로 순종하라’고 명한 뒤에 ‘주인이 볼 때만 잘하는 척하지 말고 마음을 다하라’고 설명을 덧붙입니다. 주인을 대할 때 뿐 아니라 부모와 남편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맞습니다. 부인을 교회 사랑하듯 사랑하는 남편 역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바울의 목표는 우리 모두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을 사는데 있을겁니다. 산의 정상은 그리스도입니다. 정상에 오르는 길이 여럿이고, 저마다 등정을 시작하는 자리가 다릅니다. 걸음 속도도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의 스타일은 명제와 원칙을 알려주고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을 합니다. 그 다음은 독자의 몫입니다. 바울의 편지를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정답’이라고 보는 의견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겁니다. 그리스도를 섬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산다…이런 목표는 시대가 달라져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목표와 목적을 이루는 방법에 어떤 것이 있는지 예를 들려고 하면 자기 시대의 현실에서 나온 예를 들어야 합니다. 사람이 결혼을 안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해도, 지금 현실에서 보는 남편과 아내의 상황을 짚어 주어야 바른 가르침이 됩니다. 바울 서신을 읽으면서 속이 편치 않던 때가 많았습니다. 여성에 대한 구절들은 실망스럽고 난감했습니다. 게다가 성경의 권위까지 더하여 그대로, 고스란히 받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큰 부담이던지요.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과 현실에서 삶으로 감당하는 일은 각각 고유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묵상과 삶이 각각이라는 뜻이 아니라 서로를 품고 있으며 1+1=2 이상의 값을 낸다는 뜻입니다. ‘기도와 노동 (일)’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기도 따로, 일 따로 하지만 기도도 일이고 일도 기도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해 가는 여정에 성령의 도우심이 꼭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셔야 읽은 텍스트를 살아내는 데까지 갈 수 있습니다. 말씀 묵상이 삶의 경험과 만나는 데까지 가기를 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내 삶을 변화시키는 데 까지 갈 것을 믿으며 소망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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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gachi049 Avatar

    자신에게 주어진 티끌 만큼한 자만심과 자존심 때문에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셔서 사랑으로 낮은 자와 힘없는 자를 돌보시고 죄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영생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 믿음의 공동체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힘없고 굶주린 자들을 돕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주님! 성령님께서 함께하시고 도와 주셔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낮은 자와 힘없는 자들을 도울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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