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5장 6-14절: 되찾아야 할 영적 권위

해설:

사도는 교회 안에서 “헛된 말로 속이는”(6절)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권면한다. 그들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죄를 범해도 구원을 잃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사도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음해이나 온갖 더러운 행위나 탐욕”(3절)을 행하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짝하다”(7절)는 삶을 깊이 나누는 관계를 의미한다. 빛과 어둠은 공존할 수 없다. 믿는 이들은 “주님 안에서 빛”(8절)이 되어 “모든 선과 의와 진실”(9절)의 열매를 맺는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10절)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 사람이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끼어드는”(11절)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그것을 “폭로”해야 한다. “폭로하다”라는 번역보다는 개역개정의 “책망하다”라는 번역이 더 낫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은밀하게 행해지고 있는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들”(12절)을 보았을 때, 그것을 지적하여 바로 잡으라는 뜻이다. 빛은 어둠 속에서 행해지던 일들을 드러나게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13절). 

14절의 인용구는 구약성경에서 출처를 찾을 수 없다. 초대 교회에서 불려지던 찬송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잠자는 사람”과 “죽은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 혹은 어둠의 열매를 맺는 사람을 가리킨다. “일어나라”(헬라어 “에게이라”)와 “일어서라”(헬라어 “아나스타”)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묘사할 때 사용된 동사들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일종의 부활 사건이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빛을 비추시기 때문에 그들이 빛으로 산다.

묵상:

과거에 교회는 취사선택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한 지역에 하나의 교회 밖에 없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면 곧 하나님을 떠나는 것과 같았습니다. 교회로부터 추방 당하면 하나님에게서 추방 당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교인 중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사람들이 심각한 죄를 범했을 경우, 교회가 그 문제에 대해 조사를 하고 그에 따라 권징을 행했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 죄악의 독버섯이 퍼지지 않게 하고, 죄를 범한 사람들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조치가 행해지면 죄악을 범한 당사자는 묵묵히 교회의 조치를 따랐고, 다른 교인들은 그 사람과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거룩하게 살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 기능으로 인해 교회는 바깥 사회보다 월등히 높은 도덕적 기준을 따라 사는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권징의 기능이 사라진 이유가 여럿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교회가 취사선택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교회를 다니다가 자신의 은밀한 죄가 드러나면 다른 교회로 떠나 버립니다. 자신의 죄가 교인들에게 공개되는 수모를 견디면서 교회에 남아 있을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 교회에서 문제가 되어 다른 교회로 이적할 경우, 그 교회는 아무것도 문제 삼지 않고 받아 줍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받아들여 교회를 키우고 싶은 욕심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권징의 이유가 되고도 남는 문제가 발견되어도 교인 잃을 것이 두려워 쉬쉬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교회의 거룩성은 점점 흐려집니다. 

어떻게 하면 교인들이 교회를 취사선택의 대상으로 삼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믿는 이들이 “선과 의와 진실”(9절)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도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한 교인에게서 중대한 문제를 발견했을 때 엄중히 경책하여 회개로 인도할 정도로 높은 영적 권위를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를 보고 “과연, 다르다!”고 인정하게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오늘의 교회를 향한 고민이며 기도입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에베소서 5장 6-14절: 되찾아야 할 영적 권위”

  1. 십자가 은혜로 제자가 되어 말씀을 가지고 각자의 삶의 현장에 들어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하는데, 죄로물든 어두운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추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는 가련한 신세입니다. 세상 풍조와 교활한 유혹에 너머지지않고 주님앞에 바로서고 새롭게되고 깨어있어 주님이 기뻐하시는 생각과 언어와 행함이되는 사귐의 소리 가족 모두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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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chi049 Avatar

    인간의 죄성은 스스로 학습하여 강하게 발전되어 변형되고 더욱 강해지는 코비드19 바이러스와 같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회의 지도자, 정치인들은 물론 심지어 말씀을 전하는 자들까지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욕망과 쾌락의 죄로 물들어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또한 전쟁으로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죽어가고 자연은 파괴 되어 삶의 터전을 잃고 있습니다. 마라나타! 주님 어서오시옵소서! 그리하여 새하늘과 새땅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하나님 아버지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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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교회를 입맛대로 고른다는 말은 듣기 불편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게 사실입니다. 왜 ‘저’ 교회가 아니라 ‘이’ 교회에 나오는지 교인들에게 물어보면 다 답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교회, 다니고 싶은 교회가 사람마다 다를 것 같지만 실은 공통점이 더 많습니다. 그런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이 한 교회를 다니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였으니까 교회는 그런 사람들을 닮아 가기도 합니다. 사회의 산업화와 국제화가 시민 생활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영향을 미치는데 종교 활동이라고 예외가 되지는 않겠습니다. 권리에 예민한 시민들이 모인 사회에서 교회 선택은 예외라고 한다면 당장 난리가 일어나겠지요. 그러니 교회를 취사선택 하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고 (막아서도 안되고), 대신 출석하는 교회에 책임적인 참여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길을 찾아보는 데 애를 쓸 수 밖에 없겠습니다. 내가 너무 고루한 생각을 하는 것 아닌가 싶지만, 교회 생활이나 결혼 생활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50년만 보아도 결혼에 대한 의식이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결혼은 누구나 다 하는 일인줄 알았습니다. 결혼 상대를 본인이 아니라 부모가 (혹은 집안 어른이) 정한다는게 결코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결혼을 하면 죽을 때까지 같이 사는걸로 알았습니다. 지금은 결혼을 안 할 수도 있습니다. 본인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무한정 찾고, 바꾸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배우자라도 싫어지면 헤어지기도 합니다. 교회도 예전에는 평생토록 한 교회만 다니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교회를 바꾸게 되면 피치못할 사정이 생겨서이지 개인적인 호불호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결혼이 지극히 사적인 일이지만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공적인 행위이듯 교회 출석도 개인의 결단이면서 시대의 방향이 따라서 움직이는 공적이며 역사적인 행위입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시대의 현상을 닮았고, 시대의 병은 교회라고 건너 뛰지 않습니다. 교회는학교도 아니고 봉사 단체도 아니지만, 학교처럼 가르치는 것도 있고, 봉사 단체처럼 커뮤니티 서비스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풍조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단단한 신학이 있는 교회를 꿈꿉니다. 그러려면 시대의 사상과 풍조가 뭔지 정도는 아는 교인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젊은이들한테 조롱 받지 않는 교회가 되려면 그들이 싫어하는게 뭔지,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게 뭔지 아는 교회여야겠습니다. 생각하는 교인, 행동하는 교인이 다니는 교회에 다니고 싶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예배의 전부라고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고,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이 ‘영혼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를 입맛대로 고르는 일은 일어나면 안되는 일입니다. 컨디션에 따라 입맛도 바뀌는데 교회처럼 중요한 일을 입맛에 맞추다니요. 은혜를 경험하는 일, 마음이 새로와지는 일, 눈이 떠지는 일, 다리에 힘이 생기는 일…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주님이 교회에만 계신 것은 아니지만, 교회에서만 이런 일들이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교회엔 특별한 그 무엇이 있습니다. 교회이신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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