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사도는 교회 안에서 “헛된 말로 속이는”(6절)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권면한다. 그들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죄를 범해도 구원을 잃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사도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음해이나 온갖 더러운 행위나 탐욕”(3절)을 행하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짝하다”(7절)는 삶을 깊이 나누는 관계를 의미한다. 빛과 어둠은 공존할 수 없다. 믿는 이들은 “주님 안에서 빛”(8절)이 되어 “모든 선과 의와 진실”(9절)의 열매를 맺는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10절)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 사람이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끼어드는”(11절)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그것을 “폭로”해야 한다. “폭로하다”라는 번역보다는 개역개정의 “책망하다”라는 번역이 더 낫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은밀하게 행해지고 있는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들”(12절)을 보았을 때, 그것을 지적하여 바로 잡으라는 뜻이다. 빛은 어둠 속에서 행해지던 일들을 드러나게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13절).
14절의 인용구는 구약성경에서 출처를 찾을 수 없다. 초대 교회에서 불려지던 찬송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잠자는 사람”과 “죽은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 혹은 어둠의 열매를 맺는 사람을 가리킨다. “일어나라”(헬라어 “에게이라”)와 “일어서라”(헬라어 “아나스타”)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묘사할 때 사용된 동사들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일종의 부활 사건이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빛을 비추시기 때문에 그들이 빛으로 산다.
묵상:
과거에 교회는 취사선택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한 지역에 하나의 교회 밖에 없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면 곧 하나님을 떠나는 것과 같았습니다. 교회로부터 추방 당하면 하나님에게서 추방 당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교인 중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사람들이 심각한 죄를 범했을 경우, 교회가 그 문제에 대해 조사를 하고 그에 따라 권징을 행했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 죄악의 독버섯이 퍼지지 않게 하고, 죄를 범한 사람들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조치가 행해지면 죄악을 범한 당사자는 묵묵히 교회의 조치를 따랐고, 다른 교인들은 그 사람과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거룩하게 살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 기능으로 인해 교회는 바깥 사회보다 월등히 높은 도덕적 기준을 따라 사는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권징의 기능이 사라진 이유가 여럿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교회가 취사선택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교회를 다니다가 자신의 은밀한 죄가 드러나면 다른 교회로 떠나 버립니다. 자신의 죄가 교인들에게 공개되는 수모를 견디면서 교회에 남아 있을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 교회에서 문제가 되어 다른 교회로 이적할 경우, 그 교회는 아무것도 문제 삼지 않고 받아 줍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받아들여 교회를 키우고 싶은 욕심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권징의 이유가 되고도 남는 문제가 발견되어도 교인 잃을 것이 두려워 쉬쉬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교회의 거룩성은 점점 흐려집니다.
어떻게 하면 교인들이 교회를 취사선택의 대상으로 삼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믿는 이들이 “선과 의와 진실”(9절)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도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한 교인에게서 중대한 문제를 발견했을 때 엄중히 경책하여 회개로 인도할 정도로 높은 영적 권위를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를 보고 “과연, 다르다!”고 인정하게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오늘의 교회를 향한 고민이며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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